6. 중학교 교사 시절.
부임하지 않겠다고 인사하고 온 학교에, 다시 가서 부임하러 왔다고 인사를 했더니, 교장이 싸늘하게 대하면서, 오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필요 없으니 가라고 했다. 교장실에서 나오니, 교감이 나를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교장이 저렇게 해도 곧 좋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근무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러면서 3학년 2반 담임과 3학년과 1학년의 일부 수업을 배정해 주었다. 며칠 동안 교장과의 대면을 피하면서 근무했더니, 교감 말대로 좋아졌다. 학교에 근무가 정해지니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할 집을 구해야 했다. 교회에 가서 집을 구해 달라고 해 보았더니 즉시,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방이 하나 있다고 보라고 했다. 대문간에 있는 방으로 길가에 있는 방이었다. 넓은 부엌에는 소가 메어져 있었다. 소와 함께 살아야할 방이었다. 아내를 빨리 데려와야겠기에 그냥 그 방에서 살기로 했다. 금산중학교를 떠날 때까지 아내와 함께 그 방에서 1년을 살았다.
고흥의 금산중학교는 섬마을에 있는 학교다.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인 거금도에 있는 학교다. 거금도를 행정단위로는 금산면이라 했고 1개면이었다. 주민들은 김 생산과 고구마 위주의 농사가 주업이었다. 당시에 광주에서 학교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은, 먼저 광주에서 직행버스로 녹동까지 가야 했다. 비포장도로로 4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금은 4차선 포장도로가 되었고, 두 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 곳이다. 녹동에서 다시 배를 타고 거금도의 금진항까지 가야했다. 소록도를 지나간다. 그리고 금진항에서, 섬 안에서 운행되는 버스로 학교가 있는 금산면소재지까지 가게 된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학교까지 가는데 하루 종일 가야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광주에 가려면, 주말 시간을 이용해서는 어려웠다. 방학 때에나 다녀야 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 가야되면 아내 혼자 다녀와야 했다. 주말 같은 때에는 아내와 가까운 해변을 산책하면서 생굴을 파먹기도 하고, 학생들이 초대한 곳에 가서, 노 젓는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학생들 집에는 김 양식에 사용하는 작은 배들이 있었고, 어린 학생들도 노를 잘 저었다. 왼 일인지 우리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1971학년도의 섬마을에서의 생활은 아내와 오붓한 시간이었다.
섬마을 학교에서 1년을 근무하면 육지 학교로 이동 할 수가 있었다. 가고 싶은 적당한 학교가 없었지만, 일단 섬에서 나오기 위해서, 광주 시내학교로 전출 내신을 했다. 지방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야 광주 시내로 전출이 가능한 시기였기에, 시내로의 전출을 희망 한다기보다는, 인사권자에게 임지를 맡기는 식의 내신이었다. 결과는 영광백수중학교로 전출이 되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처가 동네인 연고지로 이동을 시켜준 것이었다. 감사할 일이었다.
1972학년도부터 1976학년도까지 영광백수 중학교에서 5년 동안의 생활은, 교사의 맛을 제대로 알게 해준 행복한 시기였다. 백수중학교에 부임하니, 신임교사인 나에게 교장이 교무과장을 하라고 했다. 11명의 교사가 근무하다가 7명이 떠나고 4명이 남은 학교에 12명의 교사가 부임해 갔었다. 중학교 평준화 정책으로 학교가 두 배 정도 학급수가 늘어난 상황이었다. 남은 교사 4명 중에 한분이 지도과장으로 임명되고, 새로 부임해 간 교사 중에서 나를 교무과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교무실 조직을 양과 체제로 한 것이다. 당시에 교육청에서 임명한 주임교사 제도가 있었고, 주임교사 중에서 과장을 맡게 되어 있었는데, 마침 임명 받아온 주임교사가 없어서, 주임교사가 아닌 내가 주임교사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의 서열이 교장 교감 다음의 세 번째 자리였다. 열심히 해야 했다.
처음에 선생님들의 눈초리도 따가 왔다. 무슨 배경을 가지고 부임하지 않았나 하는 눈초리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 했었다. 내가 서중 일고 출신이라는 것이 교장의 선택 조건이었던 것이다. 교장이 평교사 시절 서중 근무 경력이 있어서 우수학생들의 면모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무과장은 학급 담임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학급 담임이 하고 싶었다. 학생들이 담임에게는 우리 선생님 하지만, 담임이 아니면 과목을 지칭해서 수학선생님 하고 불렀다. 학생들에게 우리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무자격 교무과장 일로 피곤하기만 했다. 중학교 평준화 정책의 시작으로 복잡한 행정적인 일거리들이 많았다. 교육과는 상관없는 형식적인 사무 처리로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2년이 지났을 때, 그 지방 출신이면서 나이도 많은 주임교사가 고향학교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교무과장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하고 교장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안 시켜 주어서 불평이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자리를 안 하겠다고 한다고 교장이 만류 했으나 사정을 해 가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