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영아리 오름은 정상에 물을 여물게 가득 앉혔다고 해서 '물영아리'란 이름이 붙여졌다. 물영아리 오름은 어떤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물영아리 오름. 윤주형 기자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물영아리 오름 등 '보물' 가득
척박한 토지 일궈 이룬 마을 남원리 등 이야기 많아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책할 수 있는 큰엉산책로와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물영아리 오름이 있고, 영화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머물렀던 곳 남원읍이다. 귤이 익어가는 제주의 가을 풍경이 가는 발걸음을 붙잡을 만큼 경관이 뛰어난 남원읍은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감귤 주산지이자 뛰어난 자연과 더불어 전설이 깃든 남원읍 마을 유래를 들여다보자.
물을 바라는 '물보라마을' 수망리
수망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탐라지도, 제주삼읍도총지도 등에 따르면 '물'을 의미하는 수(水)와 '바라다'를 의미하는 망(望)이 합쳐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망리의 옛 이름은 '물우라' '무라' '무 ' '무랏' 등으로 불렸고, 현재 '향사동' 1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향사동은 수망리 중심 마을로 예전에 마을의 공공업무를 보거나 마을 주민들이 회의를 하는 오늘날 마을회관과 같은 곳인 향사가 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한 마을이란 데서 연유했다고 알려졌다. 향사동은 '묵은가름'과 '알동네'로 나뉜다.
수망리가 남원읍 의귀리 위쪽 쉐기오름 서쪽에 있는 중산간 지역 마을임을 감안하면 수망리에 물과 관련된 전설이나 습지로 보호받는 오름 등이 있는 것은 제주에서는 특이한 현상이란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임금에게 옷을 받은 마을 '의귀리'
조선조 선조 33년(1600년) 김만일이 병마 500필, 1659년 이후 그의 아들 대길이 매년 500여 필의 병마를 조정에 헌납했다. 1724년 제주 도민들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자 김대길의 손자 남헌이 비축미 1340석을 풀어 도민을 구휼한 공 등을 인정받아 1752년 영조왕이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
임금이 하사한 옷을 받은 마을이라 해서 '옷귀'로 불리다 1914년부터 '의귀리'로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일기를 보면 '김만일은 제주의 부유한 백성이다. 말을 길러 만필이나 하였으며 나라 안의 좋은 말은 모두 그가 기른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말 500여필을 가지고 와서 바쳤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게 된 것이다. 그 뒤에 특별히 부총관을 제수하였는데 곧 2품의 시위직이다'라고 기록, 광해군시대인 1620년에 벼슬을 받은 것 등을 감안하면 마을 이름 '옷귀'는 김만일의 후손이 임금에게 받았다는 옷과 상관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만일은 의귀리 출신이다. 김만일은 조선 선조 시기 전국 최대의 목장 지대였던 제주도에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고 기르던 부자였다.
그는 목장 경영에 성공해 많은 말을 소유했고,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전란으로 중앙정부가 말 부족에 시달릴 때 자신의 말 중에 상당 부분을 국가에 바쳤다.
말을 국가에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김만일 자신은 물론 아들 손자까지 벼슬을 받았다.
▲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 윤주형 기자
120여년 전 이뤄진 마을 '남원리'
남원리는 주변 다른 마을에 비해 교통이 불편, 120여 년 전에야 마을이 형성됐다고 알려졌다.
북제주에 살던 제주 고씨가 '쇌앗개'부근에 정착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이후 넓은 연못이 마을 가운데 있어 '너브못'으로 불리는 지역에 사람들이 살면서 또 하나의 마을을 이뤘다.
너브못에 정착한 사람들은 현재 남원1리 포구를 말하는 '재산이개'에서 바닷물을 이용해 소금을 만들고 해조류를 채취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이 마을의 이름을 '재산이개'라고 했는데 1924년부터 '남원리'로 쓰기 시작했다. 남원리는 남쪽의 중심이란 뜻으로 불렸다고 한다.
제주도 남쪽에 위치하고 남원읍의 중심지이며 해안 절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남원1리내 해안경관이 뛰어난 큰엉 유원지는 산책로를 따라 해안 절경을 바라볼 수 있어 절벽 위를 걷는 듯 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큰엉은 마을 앞 동북쪽으로 조금 치우쳐 자리 잡은 바닷가 기암절벽 양 끝에 있는 바위동굴을 말한다.
'엉'은 바닷가나 절벽 등에 뚫린 바위그늘을 일컫는 제주어로 '엉덕'을 줄인 말이다.
한편 남원읍은 남원1·2리, 태흥1·2·3리, 위미1·2·3리, 하례1·2·3리, 신례1·2리, 한남리, 수망리, 의귀리, 신흥1·2리 등 17개 행정리와 남원리, 태흥리, 위미리, 하례리, 신례리, 한남리, 수망리, 의귀리, 신흥리 등 9개 법정마을, 비안동, 신성동, 광지동, 서의동, 수은동, 월산동, 가원동, 소서동, 위엄동, 진원동, 무도동, 조치원동, 금성동, 삼덕동, 서성동, 대화동, 명륜동, 공천포, 학림동 등 42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윤주형 기자 21jemin@jemin.com
잃어버린 소에 얽힌 전설
▲ 물영아리 오름 앞 들판에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남원읍 수망리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난 2000년 습지보호지역 지정, 2006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물영아리오름'이다.
오름 정상에 분화구가 있어 늘 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다는데서 '물영아리'라 불린다.
물영아리오름 습지는 제주도 기생화산분화구의 대표성과 전형적인 온대산지습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습지와 자연성이 높은 숲이 어우러진 생물, 지형, 지질 및 경관생태학적으로 우수한 습지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다.
물영아리 오름에 얽힌 설화도 있다. 남원읍 지역에서 한 젊은이가 소를 들에 방목했는데 소 한마리를 잃어 버렸다. 젊은이는 소를 찾아 수망리 일대와 주변 오름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소는 찾지 못하고 배고픔과 갈증에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다.
비몽사몽하며 털썩 주저앉은 젊은이 앞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여보게 젊은이, 소를 잃어 버렸다고 상심하지 말게. 내가 그 소 값으로 이 오름 꼭대기에 큰못을 만들어 놓겠네. 그러면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소들이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고 다시는 소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는 일도 덜어질 것이네. 부디 잃어버린 소는 잊어버리고 다시 한 마리 구해 부지런히 가꾸면 분명 살림이 늘어 궁색하지 않을 것이네"라고 말했다.
주변을 살펴봐도 백발노인은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면서 어두워지더니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하늘이 두쪽이 나는 것 같은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더니 젊은이는 기절, 다음날 아침까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는 오름 정상에 푸른 물결이 호수를 이뤄 출렁이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후로 마을 주민들은 오름 정상에 물을 여물게 가득 앉혔다고 해서 '물영아리'라고 주민들은 불렀고, 물영아리는 어떤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