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기도 / 김형미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어느 날 스무 살 봄이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그 후로 다시 스무 해 동안
노모는 아들 옆에서 말을 잊은 채
조금씩 가라앉는 생을 바라보고 있다
병실에서 늙어버린 어머니는, 오늘도
푸른 채소와 과일들을 잘라 믹서기에 넣는다
무딘 세월만큼이나 칼날이 닳았는지
쉬이 자르지 못하고 딸각거린다
털털거리며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
잘게 잘린 꿈들이 분해되고
하루만큼 야윈 얼굴을 내미는 햇살
사십 년을 하루같이
두 개의 심장으로 올리는 간절한 기도
아직 엄마와 한 몸으로
탯줄을 감고 누워있는 나는,
침상 밑에 깔려 납작해진 봄을
창에 내어 건다
바람 탓인지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거리고
나는 뒤돌아 콜록거린다
목구멍을 넘기지 못하는 것들이 분해된 꿈만은 아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상처들로 범벅된 생의 조각들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으랴
아무리 갈아도 좀처럼 부서지지 않은
질긴 마음의 쓴 뿌리를 어이 다스릴 수 있으랴
산처럼 서서 침묵하는 사랑 때문에
나 오늘을 넘기고 있음을
노모가 빈 그릇을 들고 병실 문을 나서자
말 없던 봄의 심장 소리가 쿵쾅거린다
카페 게시글
세계명시.성시.한시
봄날의 기도 (국민일보 신춘문예 신앙시 우수작) / 김형미
리차드
추천 1
조회 49
14.08.07 18:40
댓글 1
다음검색
첫댓글 계절은 산자의 놀이터. 사랑이 뒹굴다 지쳐 하늘을 보고 웃는 곳. 그곳에 흘린 누군가의 꿈을 줍는 것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