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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사상
책머리에
필자가 중관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우연과 같은 인연 때문이었다. 대학재학시절 생업 이외에 불교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한 이후부터 김동화 박사님의 저술들을 하나 둘 정독하기 시작하였다. 김동화 박사님의 저술 중에는 원시불교, 대승불교, 구사학, 유식철학, 불교교리발달사 등 그야말로 불교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었지만 유독 중관학과 관련된 저술만은 없었다. 지금이야 서점에 중관학은 물론이고 불교학 관련 서적들이 넘쳐나지만 그 당시에는 황산덕 박사님의 <중론송> 이외에는 중관학과 관계된 우리말 단행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민족사에서 <대정신수대장경>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중론>을 직접 읽음으로써 중관학을 파악하겠다는 생각에 대장경을 구입하여 <중론> 청목소를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그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논문을 쓸 때가 되었는데, 그나마 스스로 완독한 논서가 <중론>이었기에 <중론> ‘관거래품’을 소재로 삼아 석사논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수업 도중 중관학과 관계된 부분을 도맡아 발표하다보니 어느 결에 중관학 전공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 그리고 일종의 책임감에서 중관학과 관계된 문헌들을 하나 둘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만 2년간의 작업을 통해 <중론> 청목소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1993, 경서원). 한역본만으로는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 게송들이 많았기에 산스끄리뜨 게송도 함께 번역하여 실었다. 산스끄리뜨 게송에 대한 번역을 시작할 당시 필자의 산스끄리뜨 실력은 그야 말로 걸음마 수준이었다. 그러나 중관학 전공자로서 언젠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와 각 단어의 문법적 역할을 찾아가면서 게송에 대한 번역문을 만들었다. 띄어쓰기 없는 문장들에서 낱낱의 단어를 가려내고 문법을 찾아내는 일은 산스끄리뜨 공부가 일천한 필자에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나의 게송을 번역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을 소모한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발간하면서 그렇게 찾은 단어의 의미와 문법 설명을 모두 각주에 실었다. 문법 설명에 많은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누군가가 <중론>의 산스끄리뜨 원문을 스스로 해독하고자 할 때 그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 개정판을 내면서 문법 설명에 대한 착오를 수정하긴 했으나 아직도 잘못된 문법해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그 후 중관학 개론서인 <불교의 중심철학>(T.R.V. 무르띠, 경서원, 1995), 원전 번역서인 <회쟁론>(용수, 경서원, 1999)과 <백론․십이문론>(경서원, 1999), 그리고 <회쟁론>의 산스끄르뜨문과 티베트어 번역문의 문법을 해설한 <회쟁론 범문․장문 문법해설집>(1999, 경서원) 등을 출간하였고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동국대대학원, 1997)이라는 이름으로 박사학위논문도 완성하였다. 최근에는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 2004)이라는 이름의 <중론> 입문서를 만들어 출간하였는데 이들 모두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순서대로 만들어진 책들이다.
중관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전공자로서 언젠가 필자 나름의 시각을 담은 개론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갖고 있었으나, 공부 도중에 있는 필자로서 방대한 중관학 관계 문헌들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개론서를 쓴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이라는 보살의 서원에서 말하듯이 밑도 끝도 없는 것이 불교공부이지만, 중관학이라는 한 분야만 하더라도 평생을 바쳐도 다 읽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양의 문헌들이 산스끄리뜨어, 티베트어, 한문 등의 고전어로 씌어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처음 중관학 강의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근 10년 동안 동국대학교와 강원 등에서 중관학을 강의해 왔지만, 중관학과 관계하여 아직도 해독해야할 문헌들이 산적해 있고 풀어야 할 숙제들 역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넘게 이렇게 중관학 입문서를 만들게 된 것은 그 동안 여기저기서 어쭙잖게 해 왔던 필자의 강의내용을 일단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민족사’로부터 본 입문서의 집필을 의뢰받은 것은 약 4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원효 스님의 <판비량론>과 관계된 연구를 하게 되어 잠시 곁길을 가다 보니 이제야 중관학 입문서를 완성하게 되었다.
불교는 발견된 진리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아 선정에 들어 발견하신 것이 바로 연기(緣起)의 이치였다. 마음과 물질, 인간과 세계,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이 바로 연기법이다. 중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교학이 있을 수 없겠지만, 언어화된 연기를 넘어서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게 해 준다는 데 중관학의 독특함이 있다. 중관학을 통해 연기를 자각함으로써 우리는 초기불교, 아비달마, 유식, 밀교 등의 인도불교는 물론이고 중국에서 발생한 화엄, 천태, 선 심지어 정토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다양한 교학들이 모두 한 맛임을 알게 된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사회의 제 문제에 접목시키는 무궁무진한 응용의 토대가 되는 것이 바로 중관학이다. 불교의 종교성, 세계관, 인생관, 윤리관 등이 모두 연기법에서 연역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학과 실천과 응용의 중심에 중관학이 자리한다
본서가 ‘일반대학생도 읽을 수 있는 입문서’가 되어야 한다는 출판사측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필자는 독특한 논지전개방식을 사용하였다. 중관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중관학 발생 이전까지 전개되어 온 인도불교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조망할 수 있어야 하고, 중관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방식이 상반된 불교인식논리학에 대한 기초지식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중관학 관계 문헌들의 원전언어인 산스끄리뜨어의 성격에 대한 약간의 상식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대학생들이 이런 지식들을 갖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중관학에 대해 서술하다가 예비지식이 필요한 경우에는 잠시 맥락에서 이탈하여 그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하였다. 본서에서는 논지 전개 방식에 있어서 ‘체계의 아름다움’과 ‘이해의 편리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 가운데 후자를 중시하였다. 혹 산만한 느낌이 들지 몰라도 이렇게 강의하듯이 풀어가는 것이 초심자에게 중관학을 이해시키는데 효과적일 것이다.
본서는 ‘I.중관학과 초기불전의 중도, II.중관논리, III.중관사상의 전개, IV.중관학 관계 문헌’이라는 제목의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관학이 불교인 이상 그 사상적 토대가 되는 것은 한역 ‘아함경(阿含經)’이나 남방불교의 ‘니까야(Nikāya)’와 같은 초기불전들이다. 제Ⅰ장에서는 먼저 ‘중관’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다음, 중관학적인 시각에서 초기불전의 중도사상에 대해 조망해 보았다. 제Ⅱ장이 본서의 핵심이다. 중관학의 정수는 그 반논리적인 방식에 있다. 이를 ‘중관논리(中觀論理: Madhyamaka Logic)’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론>이나 <회쟁론> 등 용수의 저술들이 어떤 체계를 갖는 논서가 아니라 게송 모음집이기에, 이들 저술만으로는 중관논리적 방식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기 쉽지 않다. 그래서 제Ⅱ장에서 중관논리에 대해 소개하면서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논리학의 3대 주제인 ‘개념’, ‘판단’, ‘추론’에 대비시키면서 중관논리의 반논리적 방식에 대해 설명하였다. 수학 공부를 잘 하려면 많은 연습문제를 풀어 보아야 하듯이, 중관논리에 숙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나 판단들을 중관논리에 의해 해체해 보는 훈련을 많이 해 보아야 한다. 중관논리에 대해 보다 많이 훈련해 보고자 하는 독자는 졸저(拙著)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 2004)을 참조하기 바란다. 제Ⅲ장에서는 대승불교문화권에서 용수 이후 중관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조망하였다. 인도에서 발달한 중관학을 ‘주석학’이라고 명명하였고, 티베트적인 연구방식을 ‘계보학’이라고 명명하였으며,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의 중관학을 ‘삼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동아시아의 삼론학은 전통적 호칭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인도의 주석학이나 티베트의 계보학이라는 필자의 규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위 즈냐나가르바, 샨따락쉬따, 까말라쉴라 등 후기중관파 학승들의 경우 주석가가 아니라 저술가였기에 인도의 중관학이 반드시 주석학인 것만은 아니고, 티베트의 경우도 쫑카빠의 <정리해(正理海)>에서 보듯이 <중론>을 주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기에 티베트의 중관학이 모두 계보학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필자의 규정은 전체적인 흐름에 근거한 것이다. 소소한 예외가 문제가 된다면 그 어느 사상이나 문화에 대해 단일한 호칭을 통해 규정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제Ⅳ장에서는 중관학과 관계된 문헌들에 대해 소개하였다. 중관학과 관계된 원전과 현대의 연구서들을 모두 소개하려면 한 권의 책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원전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소개하였지만, 현대의 연구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일부만 소개하였다. 그리고 중관학 관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국내 연구자들의 이름과 학위논문을 모두 소개하였다.
머리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동안 필자의 중관학 강의에 참석하여 경청하고 호응하고 질문하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엇을 공부하고자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남에게 가르쳐 보는 것이라고 한다. 또 누군가 말했듯이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배우게 되고, 수강자가 던진 질문을 숙고하면서 배우며, 시험 답안을 채점하면서 배우고, 과제를 발표하는 학생들의 번득이는 아이디어에서 배운다. 중관학을 강의해 오면서 필자가 수강자들에게 배운 내용들이 본서 여기저기에 많이 묻어 있을 것이다.
당신께서 담당하셨던 중앙승가대학교의 중관학 강의를 기꺼이 내어주시면서 필자가 중관학 강사로 첫 발을 내 딛도록 도와 주셨던 원의범(元義範) 교수님, 유별날 수도 있는 필자의 활동과 학문을 선입견 없이 지켜보시면서 항상 감싸주시고 조언해 주시는 법경(法鏡)스님, 그리고 경주 동국대학교에서의 중관학 강의 첫 시간에 필자를 우리 불교학과 학생들에게 소개하여 인연을 맺어주셨던 호진(浩眞)스님께 감사드린다. 이 세 분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 책은 영원히 세상에 선을 보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필자에게 본서의 집필을 맡겨주신 민족사의 윤창화 사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민족사에서 그 동안 발간해 온 수많은 영인본, 번역서, 저서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물론이고 오늘의 우리 불교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입문서이지만 아무쪼록 이 작은 책을 계기로 ‘청출어람청어람’할 중관학 전공자들이 군웅처럼 나타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끝으로, 얼마 전 작고한 이현옥 박사님의 명복을 비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글로 옮기지 않을 수 없다. 고(故) 이현옥 박사님께서는 동국대학교에서 중관학을 전공하여 청변의 자립논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최근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새로운 학문의 길을 발견하곤 의욕에 넘쳐 연구에 매진하시다가 예기치 않은 병을 얻어 마흔을 막 넘긴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함께 중관학을 공부했던 동학(同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몸을 바꾸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현생에 못 다한 연구를 이루시기를 삼보 전에 기원한다.
불기 2549년 11월 5일
圖南 金星喆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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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운 공성과 진속이제에 대한 명쾌히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유튜브 강의를 통해 감사히 배워가고 있는 일반인(?)입니다.
본문 첫문단에 언급하신 김동화 박사님의 책이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모두 절판인 듯합니다.
저는 어떤 분야든 개론서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교수님께서는 김동화 박사님의 <불교학개론>과 같은, 입문서를 저술하실 생각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이미 많은 개론서들이 있지만, 교수님 강의를 좋아하게 된 한 사람으로서, 교수님께서 쓰신 개론서는 어떨까, 세상에 나온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본문 첫문단을 읽으면서 갑자기 들어, 댓글 남겨 보았습니다.
경주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에서 기획하여, 출판사 불교시대사에서 김동화 박사님 저술을 모두 모아서 전집으로 발간한 적이 있는데 아직 재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전화번호는 02-730-2500 / 725-2800입니다. 연락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 앞으로 할 일들을 저 스스로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는데, 앞으로 계획한 일들이 모두 종료되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불교개론> 책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수년 전 작업하다가 중단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불교논리학의 개념론 - 아포하(Apoha)>라는 제목의 책인데 100페이지 정도 쓰다가, 보다 자세하고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작업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이 끝나면 그 작업을 이어서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불교적 관점에서 서양철학 전반을 재단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하는 책을 쓰는 일입니다. 그 후에는 불교 밖으로 범위를 넓혀서 상대성 원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빅뱅 이론의 문제점 등 물리학과 수학의 첨예한 문제를 불교와 연관시켜서 해설하는 책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