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 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등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찬(撰)뿐만 아니라 서(書)와 전액(篆額)을 아울러 했다. 숭복사지비는 인몰(湮沒)해 전모를 알 수 없다가 1931년 경주 동면(東面)에서 잔석(殘石)이 나와 그 편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문의 문체는 4·6 대우(對偶)와 6·6 대우가 주류를 이룬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이다. 특히 문장 밖에서 사실을 끌어와 뜻을 증명하고 옛것을 빌려 현재의 뜻을 증명하려는 용전(用典)이 많으면서도, 대우구(對偶句)를 만들 때 필요한 고사(故事)나 고언(故言)을 잘라 모으는 전절(剪截)과, 발췌한 고사성어를 개역(改譯)해 자신의 글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는 융화(融化)의 방법을 잘 구사해 화려한 어사(語辭)의 수식과 함축미·전아미를 보여준다. 즉 불교를 상당히 이해하고 특히 선종에 공감하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런 사상적 내용보다는 문장 수식에 더욱 깊이 유의했음을 알 수 있다. '사산비명'은 광해군 전후에 철면(鐵面)노인이라는 사람이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 孤雲集〉 중에서 뽑아내어 이름붙인 것이다. 불교학인들에게 송습(誦習)되면서부터 그 과외독본을 이루게 되었고, 순조와 헌종 때에 홍경모(洪景謨)가 주해를 더해 유행하게 되었다. 석전노사(石顚老師)는 다시 정주본(精註本)을 만들었는데, 이외에도 여러 주해본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사산비명'은 최치원 문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상사와 한문학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