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 선언
1096년 제후들 중근동으로 출발
1097년 안티오키아 공방전 시작
1098년 안티오키아 공략 성공
1099년 예루살렘 해방
(1) 십자군의 제2세대
1118년 보두앵 2세가 3대 예루살렘 왕이 됨.
절대적인 병력 부족으로 수세의 시대로 접어 듬.
(2) 템플기사단의 탄생
프랑스 상파뉴 지방 출신 "위그 드 파앵"과 "고드프래드 생 오메르" 외 7인이 야파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토록 요청해 옴.
보두앵이 기원전 유대 시대의 성전 터를 본부로 제공함으로써 템플 기사단이라고 명명하게 됨.
① 기사일 것.
② 수도사일 것.
③ 청빈, 복종, 순결 서약.
④ 제호와 왕, 황제, 주교로 부터 독립된 존재.
⑤ 이교도 말살을 회칙에 명기.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쓴 글..."템플기사단 서: 새로 탄생한 기사단을 찬양하며"
(3) 성 요한 기사단의 변모
1050년 전후 아말피의 상인 "마우로"가 이집트의 칼리프에게 부탁하여 예루살렘에 유럽의 진료소를 설립. 최초에는 아마도 살레르노의 의학교 출신의 의사들이 진료를 보아 오다 차츰 수도사의 소능로 옮겨가게 됨.
1099년 시밪군 공격을 받자 에루살렘 총독이 그리스도교도들을 전원 추방했지만. 성 요한 수도사들은 남겨 둠. 성벽을 기어 오르는 십자군 병사를 향해 돌을 던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제라르도"의 제의로 돌 대신 빵을 던졌다가 참수형을 결정 받음. 다행히 참수되기 전에 예루살렘이 해방됨.
1118년 보두앵 2세가 에루살렘 왕으로 취임한 후 2년 뒤에 제라르도가 사망을 함.
"레몽 뒤 퓌"가 후임으로 취임하면서 종교 기사단으로 변모 됨.
"로도스 기사단", "몰타 기사단"으로 바뀌어 가면서도 일주일 중 하루는 의료 업무를 담당하는 의무를 짐.
(4) 보두앵 2세
에데시 백작령... 조슬랭 드 쿠르트네를 백작으로 임명.
안티오키아 공작령... 루지에로가 보에몬드 2세의 섭정을 맡음.
- 알레포 군이 공격을 해 오자 보두앵을 기다리지 않고 루지에로가 단독으로 요격을 나섰다가 참패하고 루지에로가 사망. 베르나르두스 대주교가 방어 부대를 편성하고 트리폴리 백작 퐁스와 보두앵을 기다려 공동으로 격퇴. 내정을 베르나르두스 대주교에게 일임.
- 쿠르트네가 원정 중 알레포 병사들에게 잡혀 감. 보두앵이 에데사로 북상했으나 행적을 찾지 못함.
- 보두앵2세가 에데사에서 사냥을 나갔다 알레포 영주의 조카에게 습격을 당해 붙잡힘. 쿠르트네를 만남.
- 쿠르트네를 추종하는 아르메니아 병사들이 성채를 급습하여 두사람 같이 탈출에 성공.
- 보두앵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오던 중 또 다시 포로로 잡히게 됨.
- 1123년 십자군 측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도 기사 "외스타스 가르니에"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베네치아 해군의 후원을 받아 티루스르르 공격함. 1124년 2월 티루스를 함락.
-보두앵의 몸값이 떨어지자 쿠르트네가 교섭에 나서 보두앵이 1년 정도 포로 생활 후 풀려 남.
(5)십자군의 여자들
보두앵 2세와 아르메니아 공주 모르피아 사이에 네명의 딸이 있었음.
① 멜리장드... 데릴사위를 얻어 예루살렘 왕위를 물려줄 계획
1129년 프랑스왕 루이 6세의 추천으로 앙주 백작 풀크와 예루살렘에서 결혼
② 알리스......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몬드 2세에게 시집 보냄.
③ 오디에르나...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에게 시집 보냄.
④ 요베타..........미래의 수녀원장 자리 예약.
"장기(Imad ed-Din Zengi)"의 촐현
-투르크 군 내에서 실적을 올린 후 모술의 패권을 손에 넣음.
-보에몬드 2세가 전사하고 미망인 알리스가 딸의 섭정을 맡음.
-장기가 알레포를 점거하자 알리스가 자기의 지위를 인정 받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
-서한이 보두앵 2세의 손에 넘어 감.
-알리스는 라타키아로 추방됨.
1131년 보두앵 2세 사망
조슬랭 드 쿠르트네 사망.
(6) 프랑스에서 온 예루살렘 왕
"풀크"는 예루살렘 왕으로 취임 후 왕국 내에서 유력 제후들로부터 인간벅인 지지를 받지 못함.
같은 해 바그다드에서는 술탄이 사망 함.
"아타베그" 신분인 모술의 태수 장기는 술탄 계승에 개입하기 위하여 알레포의 수비를 아들 누레딘에게 맡기고 바그다드로 돌아 감. 3년 후에야 시리아 전선 복귀.
1137년 풀크가 다마스 쿠스 공략 중이던 장기와 접전을 벌였는데 풀크가 몽페랑의 성채로 내몰리게 되자 먼저 교섭을 요청하여 성채를 비워주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림. 이 사건으로 풀크는 더욱 인심을 잃게 됨.
1140년 풀크는 장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 영주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나 장기가 에데사 쪽으로 향하자 십자군 측만 손해를 보게 되었슴.
1142년 비잔틴 제국군의 지원을 노리고 안티오키아를 속령으로 내어주는 실수를 범함.
1143년 풀크가 사냥을 나갔다 낙마하여 사망하고, 멜리장드가 여왕의 지위에 오름.
(7) 성채
왕으로서 낮은 평가를 받은 풀크이지만 성채 건설에 앞장선 점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를 할 수 있는 성채의 건설이 절대적인 병력 부족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금력이 있는 자에게는 건설 허가를 내 주고, 없는 자에게는 경제적으로 원조를 하여 건설케 하였다.
1142년 성 요한 기사단 "크락 드 슈발리에" 건설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