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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왕(王) - 성(性):이(李) 27대 518년(서기1392~1910) |
대 | 왕 명 | 즉위년도 직위나이 | 재위기간 | 약 사 |
1 | 태조(太祖) | 1392~1398 57세~74세 | 6년 2개월 | 휘는 성계.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세움. |
2 | 정종(定宗) | 1398~1400 41세~63세 | 2년 2개월 | 휘는 방과. 태종의 아들.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 1400~1418 33세~51세 | 17년 10개월 | 휘는 방원. 정종의 동생.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 1418~1450 21세~54세 | 31년 6개월 | 휘는 도. 태종의 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 1450~1452 36세~38세 | 2년 3개월 | 휘는 향. 세종의 아들.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 1452~1455 12세~17세 | 3년 2개월 | 휘는 홍위. 문종의 아들.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 1455~1468 39세~52세 | 13년 3개월 | 휘는 유. 단종의 숙부.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오른 수양대군.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
8 | 예종(睿宗) | 1468~1469 19세~20세 | 1년 2개월 | 휘는 광.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 1469~1494 12세~38세 | 25년 1개월 | 휘는 혈. 세조의 손자.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 1494~1506 19세~31세 | 11년 9개월 | 휘는 융. 성종의 아들.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 1506~1544 19세~57세 | 38년 2개월 | 휘는 역. 연산군의 이복동생.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 1544~1545 30세~31세 | 9개월 (윤정월 포함) | 휘는 호. 중종의 아들.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 1545~1567 12세~44세 | 22년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
14 | 선조(宣祖) | 1567~1608 16세~59세 | 40년 7개월 | 휘는 균. 명종의 이복동생.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 1608~1623 34세~67세 |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 휘는 혼. 선조의 아들.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 1623~1649 29세~55세 | 25년 2개월 | 휘는 종. 광해군의 조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17 | 효종(孝宗) | 1649~1659 31세~41세 | 10년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 1659~1674 19세~34세 | 15년 3개월 | 휘는 연. 효종의 아들.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 1674~1720 14세~60세 | 45년 10개월 | 휘는 순. 현종의 아들.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 1720~1724 32세~37세 | 4년 2개월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 1724~1776 31세~83세 | 52년 7개월 | 휘는 금. 격종의 이복동생.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
22 | 정조(正祖) | 1776~1800 25세~49세 | 24년 3개월 | 휘는 산. 영조의 손자.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 1800~1834 12세~45세 | 34년 4개월 | 휘는 홍. 정조의 아들.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
24 | 헌종(憲宗) | 1834~1849 8세~23세 | 14년 7개월 | 휘는 환. 순조의 손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 1849~1863 19세~33세 | 14년 6개월 | 휘는 변. 정조의 이복동생의 손자.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
26 | 고종(高宗) | 1863~1907 12세~56세 | 43년 7개월 | 휘는 형. 정조의 이복동생의 손자(흥선대원군)의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27 | 순종(純宗) | 1907~1910 33세~53세 | 3년 1개월 | 휘는 척.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멸망) |
총 27대 519년
삼국지 한전의 변진조는 12소국이 있는데 그 소국의 통치자를 왕이라 하지 않고, "큰 자의 이름은 '신지'이고, 다음은 '험측'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라 하고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라 한다"하여 보는 사람에게 이상한 느낌을 준다. 즉, 삼한전에 나오는 소국들은 일반적인 국가와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면 왜 소국의 통치가가 왕이 아닐까?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이 기록은 삼국사기를 보아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신라가 4세기 전반에 한의 진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는 기림이사금과 흘해이사금이라는 왕이 있으나 이들은 제사를 지내거나 빈민을 구휼하는 등 정신적 또는 종교적 지도자일 뿐이고, 정치는 장흔이나 급리 같은 실세 관료가 하기 때문이다. 臣은 엄이라 읽는데 대장 혹은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智는 인명존칭어로 臣智는 대장님이란 뜻이다. 우리말에 남아있는 엄지손가락이 그 흔적이다. 엄지가 고유명사가 아니고 우두머리라는 보통명사이듯이 험측이나 번예 등도 보통명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엄들 중에 큰 엄은 말 그대로 ‘큰엄’이고 한자로 쓰면 大臣이 된다. 일본서기를 보면 중앙관료인 숙녜를 큰엄(大臣)이라 부른다.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영락 6년에 고구려군이 잔국을 토벌하고 大臣 십인을 잡아왔다고 하여 역시 삼국지 동이전의 큰엄이 등장한다. 이 큰엄이란 용어는 한국에서는 사라졌으나 일본에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대신 중에서 책임자 대신은 총리대신이라 한다. 큰 엄보다 더 큰 엄들 중에 최고의 엄은 성엄(聖音)이 된다. 칠지도 명문의 百濟王世子奇生<聖音>에서 백제왕세자는 모든 엄들을 통치하는 그들의 최고 지배자이다. *聖音을 해석하지 못하여 音자를 억지로 德자로 바꾸어 읽는 경우가 있는데, 금석문은 항상 판독이 먼저이다. 해석이 안 된다고 하여 글자를 변경해서는 안 된다. 정 이해를 못하면 판독은 그대로 두고 나는 이 내용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쓰는 것이 옳다. 삼한의 진왕도 3세기에는 마한왕이나 진한왕 같은 실세에게 외교권을 비롯한 권력을 이양하고 기림이사금이나 흘해이사금 같은 종교적/정신적 지도자의 형태를 띠어가는데 이는 BC 1세기 이전 부여사의 흔적이다. 진왕은 영락없는 부여왕의 모습이다. 전쟁터에 나가서도 부여왕의 전통은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 지도자로서 승리를 위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고구려사에는 그런 전통이 거의 없다. 고구려 말기에 연개소문 같은 실권자가 등장하여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지만 고구려사 전체를 보면 잠깐이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모습에서 보듯이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최전선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다. 한성백제 역시 3루왕 시대를 제외하고는 왕이 최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고구려사의 전통을 따른다. 근구수왕을 보면 자신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왕이 직접 전투에 나가서 군사를 지휘한다. 당태종이 최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화살에 맞는 것은 중국식 천자와는 거리가 먼 행위로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서기 227년의 가야 7국 평정을 기록한 일본서기 신공 49년조는 백제왕와 왕세자를 등장시키는데 이들은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고 승리를 위한 맹약을 한다. 한성백제 왕과는 다른 제정일치시대의 종교적 지도자의 모습이다. 즉, 진왕의 모습이다. 『日本書紀』神功皇后 攝政 四九年 春三月 (신라 내해이사금 32년 3월) 荒田別。鹿我別爲將軍。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至卓淳國。將襲新羅。時或曰。兵衆少之。不可破新羅。更復奉上沙白。盖盧。請增軍士。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盖盧共遣之。俱集于卓淳。擊新羅而破之。因以平定 (1)比自■。(2)南加羅。(3)喙國。(4)安羅。(5)多羅。(6)卓淳。(7)加羅 七國。仍移兵西廻至古爰津。屠南蠻。 彌多禮。以賜百濟。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亦領軍來會。(a)時比利。(b)辟中。(c)布彌支。(4)半古 四邑 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共會意流村。(今云州流須祇。)相見欣感。厚禮送遣之。唯千熊長彦與百濟王。至于百濟國登辟支山<盟之>。復登古沙山。共居磐石上。時百濟王<盟之>曰。若敷草爲坐。恐見火燒。且取木爲坐。恐爲水流故居磐石而<盟者>。示長遠之不朽者也。是以自今以後。千秋萬歲。無絶無窮。常稱西蕃。春秋朝貢。則將千熊長彦。至都下厚加禮遇。亦副久■等。而送之。 이런 진왕의 전통은 본래 부여의 풍습이었는데, 본류보다 지류가 문화의 古形을 더 오래 간직한다는 문화계승의 일반원칙에 따라, 부여의 본류인 고구려에서는 이런 전통이 사라졌으나 지류인 삼한백제에는 오래 남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다시 본류인 한국사에서는 사라졌으나 지류인 일본사에서는 이런 전통이 남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천황은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아니고 승리를 위한 술을 보내는데, 이것이 신공 49년조에 보이는 백제 진왕 모습의 흔적이다. 후한서는 BC3-BC2 세기에 조선에 기비왕과 기준왕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40대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 1대를 25년 잡으면 천년이고 30년을 잡으면 천이백년이다. 즉, 후한서는 한국사를 3500년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이 계열의 왕은 부여왕이나 진왕 같은 제정일치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 같은 통치자가 아니고, 전국시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실권을 가지고 직접 통치를 하는 왕이다. 하지만 한국사에는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으로 이어지는 계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에는 또 다른 계열이 있었으니 [고조선-부여-고구려와 백제- ]로 이어지는 계열이다. 이는 진왕에서 부여왕으로 올라가는 계열로서, 종교적 지도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단군은 이 계열일 수 밖에 없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왕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초기의 부여왕은 단군이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단군을 연구하려는 사람은 첫번째 고조선 계보에 있는 준왕이나 위만을 연구해서는 소용이 없고, 두번째 고조선 계보에 있는 진왕과 그 위의 부여왕을 연구해야 한다. 윤내현(존칭 생략)은 두번째 계보만이 한국사라고 하였으나 우리에게는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둘 다 중요한 역사다. 일본의 천황제는 [BC 4세기 이전 단군 -> BC3-BC1 세기 부여왕 -> 1-4 세기 백제 진왕 -> 5~7세기 왜왕 -> 8세기 이후 천황]으로 이어온 것이라 본다. 그러면 고조선에 단군이 존재하였느냐는 질문은, 나무 끝을 보고는 저 나무에 뿌리가 있겠느냐는 질문으로서, 일본에 천황이 존재하였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