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8 전설적인 외톨이 (France's legendary loner)
프랑스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죠지 리도빅 긴메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프랑스를 휩쓴
비행기 열풍에 빠져들었다. 1914년 창공에 대한 동경을 품은 긴메는 항공대에 입대하고자 했으나 허약해 보이는 그는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군지휘관에에 탄원을 거듭한 끝에 항공기 정비병으로 입대할 수가 있었다.
기회를 옅보며 임무에 충실했던 긴메는 결국 비행교육과정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고, 1915년 3월 꿈에 그리던 단독 비행을 해낸 긴메는 3개월후 하사로 진급하여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방부대에 배치되자마나 모랑솔니에 파라솔기를 조종하던 긴메는 그의 관측수가 독일의 아비아틱기를 격추시킬 수 있도록 유리한 위치로 비행을 계속하여 결국 첫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긴메의 비행대에 뉴포트II기가 장비되게 되었다. BeBe라는 애칭의 뉴포트II는 긴메가 그토록 고대했던 전방발사식 기관총이 장비된 단좌 전투기였다. 1915년 12월 5일 미확인 적기 1대를 격추하는 것을 시작으로 3일후 LGV 기를 확인 격추시켰다. 당시 긴메는 '적기의 관측수는 기체에서 뛰어 내렸으며, 조종사는 불붙은 기체와 함께 추락했다.'라고 냉정하게 기록했다. 계속 공중전에서 승리하던 긴메는 21세 생일을 맞이하던 191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레종 도뇌르'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사람들은 마치 폐결핵을 앓고 있는 듯 허약해 보이는 긴메가 그토록 강인한 전사라는 것에 매우 놀라고 있었으며, 이점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버든 공세당시 공중전에서 왼팔에 총상을 입어 후방에서 요양을 해야 했으며, 이동안 공중전은 점점 가열되어 공중전에서 많은 에이스를 탄생시켰으며 긴메의 기록을 뛰어넘는 조종사들이 여럿 출현했다. 그러나 다시 전투에 복귀한 긴메는 새로 지급받은 스패드 VII와 함께 다시 그 전승가도를 달려갔다. 1916년 9월 23일은 긴메의 공중전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날로서 불과 5분사이에 독일 전투기 3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기록했다. 이후 대공포에 피탄된 긴메는 추락을 피하기 위하여 4000피트를 급강하 한후 기체를 당겨 비상착륙했다. 이때 그의 기체옆으로 긴메가 격추시킨 독일기가 추락하는 진기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는 그가 피탄시킨 적기보다도 먼저 비상착륙을 해 버린 것이었다.
[긴메의 뉴포트 II 베베 - 르 뷔에 찰스 라는 문구가 보인다.]
1917년 2월 18일 22살의 나이로 대위에 진급한 긴메는 이때까지 총 30대의 적기를 격추시켜 연합군 에이스중 알버트 볼에 이어 2위의 위치에 있었다. 점점 신들린 듯한 격추행진은 계속 되었으며 5월 25일에는 하루에 4대의 적기를 잡아내는 신기를 과시했다. 그의 군복은 프랑스군의 모든 훈장이 달리게 되었으며 7월 5일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도뇌르 최고훈장을 수여받았다. 1917년 서부전선에서의 공중전이 극도로 가열되어 감에 따라서 많은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우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본 긴메는 자신도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 전사하기 얼마전에 촬영된 사진으로 긴메의 얼굴에 드리운 운명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하다. ]
프랑스 국내에서는 영웅으로서 우상화 되어가고 있었으나 1917년 7월 훈장포상식에서 촬영된 사진을 보면 얼굴의 핏기가 가시고 큰 눈은 창백한 얼굴속으로 가라앉아있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이러한 기미를 눈치챈 그의 부모가 전선에 복귀하는 것을 만류하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댓가는 없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다시 전선에 복귀하였다. 이무렵 독일군은 최신의 알바트로스 DIII, V등이 전선을 누비고 있었고, 프랑스 공군의 전투기들은 계속된 전투로 노후화된 전투기들로 인해서 전투력이 저하되고 있었다. 낡은 엔진과 계속되는 고장, 불발이 잦아지는 기관총들이 긴메를 괴롭혔다. 그는 하루에 3회나 전투기의 결함으로 불시착해야 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무렵 전투에 지친 긴메는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적기와 싸웠다. 그의 눈은 몽롱하게 적에게 고정되었으며 그의 뛰어난 기량은 날이 갈수록 둔해지고 있었다.
[스패드 7 - 기동성은 뉴포트기보다 떨어졌으나 상승률과 최대 상승고도, 최대 속도가 뛰어난 기체였다. 140마력의 히스파노 수이자 엔진과 싱크로나이즈 기어가 장비된 비커기관총이 특징이었다.]
1917년 9월 11일 스패트 XIII기를 몰고 동료인 보종 버드라스 소위와 함께 초계비행을 위해 이륙한 긴메는 독일의 2인승기를 발견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긴메는 이들의 상공에 엄호중은 알바트로스 D V 2기가 급강하 해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동료인 보종 소위는 이 위험에서 급강하 급선회를 시도하여 피할 수 있었으나 긴메는 돌아오지 못했다. 전선의 독일군 병사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긴메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이 날 전선에 행해진 양군의 맹포격은 이 위대한 조종사와 그의 항공기의 흔적을 완전히 흙더미속으로 묻어 버렸다.
[긴메의 스패드기에 그려진 검은 황새문양 - 엘리트 부대인 에스카드릴의 상징이었다.]
독일측은 커트 윗세만이라는 조종사가 긴메를 격추했다고 신문에 발표했으나, 그역시 프랑스의 또다른 위대한 에이스 르네 퐁크에 의해서 격추되어 사망해 버려 긴메의 죽음은 완전히 미궁에 빠져 버렸다. 프랑스 공군은 일주일동안 이 위대한 에이스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프랑스 전역은 큰 슬픔에 빠져 버렸다. 그는 짧은 생애동안 기록한 54기의 격추기록과 1차 대전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해결해 나간 상징적인 존재로서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에 기억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