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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군의 재건이 추진될 무렵의 주력 전투기였던 아라도 Ar 68F, 이미 독일은 1930년대 중반에 연합군이 가진 복엽 전투기와 맞먹는 수준의 항공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의 기체는 민간도색을 지우고 독일 공군의 마크를 새로 도색했다. 이런 항공기들을 제작하면서 쌓인 기술력은 훗날 전격전을 이끌 게 되는 많은 명기들을 제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사실 새로이 창설을 선언했다고는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독일은 어느정도의 공군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군은 전후 1차대전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새로운 전장 환경에서 항공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독일공군의 선구자겪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은 1차대전이 끝나자마자 훗날 독일군의 재건을 위하여 1차대전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하에서도 그는 전차부대를 위주로하는 강력한 육군과 미래전장의 주역이 될 공군의 역할에 대해서 인식하고 비밀리에 군사력 강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베르사이유 조약하에서도 새로운 독일공군을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연합군의 감시를 피해서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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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켈사가 설계한 He 51 전투기, 이 세련된 디자인의 기체는 30년대 중반 독일 공군이 부활했을 무렵의 주요 전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도 투입되었으며 복엽기자체의 한계에 이르게 되면서 이후 Bf 109가 주력기체로 떠오르자 일선에서 퇴역했다. 2차대전에서 용명을 떨친 많은 독일 조종사들이 거쳐간 기체이다. |
[ 1차대전의 저돌적인 에이스에서 독일 공군 재건을 이끈 영웅으로... 새로운 독일공군 재건을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독일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이 가장 신뢰하던 부하 베르너 묄더즈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예를 들자면 1차대전의 에이스 전기를 국가적인 베스트 셀러로 만드는 정책을 통해서 리히토펜과 같은 전설의 에이스를 흠모하는 젊은이들의 군대에 대한 친밀감을 높였다. 또한 미래의 독일 공군 조종사를 키우기 위하여 소년 비행 클럽등을 정부의 주도하에 많은 수를 결성하여 젊은 조종사 양성의 기틀을 세우고 있었으며 소련과 비밀리에 조약을 맺어 독일의 선진 항공기술을 넘겨주는 대가로 영불의 감시를 피해서 독일 조종사들이 훈련할 대지를 임대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의 항공기 제작사들은 연합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민간항공기 개발의 명목으로 언제든지 폭격기로 생산라인을 바꿀 수 있는 여객기 공장을 만들거나 해외지사를 통해 은밀하게 새로운 전투기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인 결과물은 하인켈 70 블리츠 여객기로서 이 기체는 약간의 개조를 통해서 훗날 용명을 날리게되는 하이켈 He 111 폭격기로 생산이 가능했다. 게다가 나찌당의 2인자이자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던 헤르만 괴링은 자신이 1차대전의 에이스 출신이라는 점등을 내세워 공군원수가 되었으며 독일공군의 강화에 많은 열정을 기울였다. 나찌당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괴링이 총사령관으로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공군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 1937년 최초로 인수된 신예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09B 2기가 편대 비행중이다. 전 유럽 하늘의 왕자로 독일군의 전격전을 주도하게될 운명을 가진 전투기이다. ]
이러한 여러 가지 노력이 결실을 맺어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하게 되는 1930년대 중반에는 이미 어느정도 수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후 우수한 항공기 제작자들과 항공사들의 노력으로 1930년대 후반에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기체들은 메서슈미트사의 Bf 109 전투기와 융커스의 Ju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하인켈의 He 111과 도르니어 Do 17 쾌속 폭격기등이었다. 특히 1차대전에서 62기의 격추를 기록하여 2위의 에이스로 존경을 받던 에른스트 우데트는 이런 새로운 기체들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의 신예기에 대한 선정과정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우데트에 의해서 2종의 우수한 항공기가 주력으로 선정되어 독일 공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다. 우선 그가 추진하던 급강하 폭격기 프로젝트의 산물 Ju 87 슈투카를 양산하도록 결정하였고, 주력 전투기 선정과정에서는 3가지의 경쟁기종 모두를 직접 탑승해본 후에 메서슈미트사가 제작한 Bf 109의 우수한 성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이 기종을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서 선택하였다.
[ 재군비가 가속되면서 속속 일선 전투기가 Bf 109B로 교체되고 있다. 이 사진에서는 복엽기인 He 51 전투기와 Bf 109B가 같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하지만 독일 공군의 관계자들은 공군전력은 지상군을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공군력만으로 전쟁을 주도한다는 전략 폭격의 개념에는 전혀 눈을 뜨고있지 못했다. 이러한 것은 공군 공격력의 중핵인 주력 폭격기들이 육군의 진격을 하늘에서 도와주는 공중 포대의 역할을 하게되어 있는 전술 폭격기들로 개발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사실 독일에도 장거리 폭격기를 개발하여 적국의 산업시설을 공격한다는 전략폭격의 개념을 잡고있던 베버 장군과 같은 선구적인 인물이 있었으나 그가 추진하던 4발 중폭격기 융커스 JU 89나 도르니어 Do 19와 같은 기체들은 베버장군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함께 잊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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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쉘사의 지상공격기 HS 123A, 지상부대에 대한 근접 지원을 목적으로 제작된 항공기로서 급강하 공격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복엽기임에도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슈투카가 등장한 후에도 계속 독일 지상군의 근접지원 항공기로서 활약 했다. |
한편, 1차대전이 끝날무렵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공군은 공군력 강화의 타이밍이 독일에 비해서 한발 늦고 있었다. 독일공군의 이러한 우수한 전투기, 폭격기에 비해서 영국은 시대에 뒤떨어진 기체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위기의식을 느끼고 허겁지겁 공군력 강화에 집중한 영국은 핸들리 페이지 헤이포드 폭격기나 글로스터 글라디에이더 전투기와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복엽기들을 신형 기체들로 교체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먼저 설계가 완성된 호커사의 허리케인 전투기였으며 더욱 우수한 슈퍼마린사의 스핏화이어가 발주되어 생산예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허리케인은 1937년이 되서야 일선 부대에 배치되기 했으며, 스핏화이어는 1938년 초까지도 생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폭격기 병단도 새로운 브리스톨 블렌힘, 빅커스 웰링턴, 핸들리 페이지 햄덴과 같은 신형 폭격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영국공군은 전투기보다는 폭격기를 중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의 폭격기 사령부는 지상부대를 지원한다기보다 전략적 가치가 있는 목표물에 대해서 장거리 원정 공격으로 타격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전략 폭격을 추구하는 부대였다. 따라서 적기의 침투로부터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기사령부와 적국 공격을 위한 폭격기사령부는 서로 대등한 지위를 가지면서 영국공군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고 항상 서로 경쟁하는 처지였다.
[ 브리스톨 블렌힘 폭격기 - 시속 450km의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당시 영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글로스터 글라디에이터보다 무려 시속 80km나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어서 폭격기병단의 큰 기대를 받았다. ]
1937년, 숙명의 적수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이 있었다. 영국 공군의 대부 휴 트렌처드가 신흥 독일 공군의 사령관 괴링의 초청으로 베를린을 방문한 것이다. 사실 초청이라고는 하지만 이 모임은 괴링이 독일 공군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트렌처드가 방문하자 괴링은 곧장 연회를 열었다. 호화로운 연회가 절정에 달해 있을무렵 괴링이 갑자기 연회장에 설치된 스피커로 스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싸이렌 소리를 크게 틀었다. 그리고는 이런 깜짝쇼에 당황한 트렌처드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바로 이것이 루프트바퍼의 실력입니다. 어떻습니까? 트렌처드 경... 몸서리를 치신 것 같군요."
괴링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휴 트렌처드는 서슴없이 맞받았다.
"미친 짓이군요. 괴링씨.. 아시겠습니까? 절대로 영국 공군을 얕보면 안되요."
사실 이 두사람은 양국의 공군을 근대화 시킨 장본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공군의 운용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괴링은 공군은 지상부대를 위한 하늘의 포대라는 개념의 전술공군을 추구하고 있었고, 트렌처드는 폭격기에 의한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던 것이다. 훗날 이 두나라의 공군은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장대한 하늘의 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 소련이 자랑하던 거인 폭격기 ANT-20이 군사 퍼레이드에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항공기는 사소한 사고로 추락하게 되어 소련의 자존심과 함께 사라졌다. ]
한편, 유럽의 동쪽 저편에서는 혁명의 소용돌이를 막 벗어난 거대국토를 가진 나라 소련이 스탈린의 독려하에 대대적으로 군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많은 장교급 지휘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당한 소련군은 자질있는 장교들의 부족으로 전체적인 군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독일과 영국의 기술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독일과의 교류를 통해 신기술을 배우는 한편 독자적인 항공기술의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그 결과 1933년 세계최초의 실용 저익 단엽전투기이자 강착장치가 완전히 인입되는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생산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항공기술은 서구 유럽에 비해서 질적으로는 뒤떨어진 상태였다. 그 좋은 예는 '막심 고리끼'라는 별명을 가졌던 ANT-20 폭격기로서 41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기체로 소련의 힘을 상징하고자 설계되었던 기체였지만 사실은 불안정성으로 인해서 비행시마다 항상 위태로운 상태였다. 1935년 어느날 호위 전투기가 살짝 충돌하는 가벼운 사고에 거꾸로 뒤집혀서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래의 일러스트는 1939년 전쟁이 막 발발하기전 유럽 각국의 항공전력을 보여주는 상황도로서 독일이 공군력의 건설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기울였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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