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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제 5 강: 이스라엘 문제와 복음 전파(9-11장)
할렐루야!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다시 로마서 강의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교회 성장, 전도 등의 문제와 다른 주제를 놓고 글을 올리다가 다시 로마서로 돌아와서 로마서 9장-11장을 공부하게 하시고 또 함께 은혜를 나누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로마서를 통해서 잘 이해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잘 이해를 해서 받들게 하소서!
샬롬! 다시 로마서 강의로 돌아왔습니다. 9장 11장의 내용을 읽고서 파워포인트로 몇 년 전에 작성한 내용을 보면서 다시 배움의 자세로 다른 분들의 로마서 9장에서 11장의 설명을 잘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당히 복잡하게 설명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 아래에 인용한 교수님과 같이 설명을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분들의 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되었으니 저보다도 많이 공부를 하신 분들의 글을 통해서 배움이 부족한 제가 많이 배웁니다.
장신대 교수님의 아래의 글은 정독을 두 번 했는데 성령의 역할의 강조와 루터의 로마서의 이해의 한계와 그리고 개신교회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치중한 행함이 없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바울과 같이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사랑을 중심으로 율법을 이해를 해서 올바른 사랑을 함으로써 율법을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교훈과 영감을 주시는 귀한 글을 읽고서 제가 할 일이 많이 정리가 됨을 보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좋은 글을 통해서 우리는 속히 배울 수가 있고 또 새로운 것을 홀로 찾아서 배우는 수고와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교수님의 글을 정독하시면 9장 10장 11장의 내용이 많이 정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긴 글이지만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 파워포인트 자료는 그냥 로마서를 읽고서 그 내용을 그대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우선 오늘은 여기까지 올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좀 더 자세하게 이 내용들을 다뤄보겠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정리가 되고 또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정말로 큰 노력이 없이 제가 여태까지 주장한 내용들을 요약해서 설명할 근거를 얻었습니다. 에스라 성경 연구원에 실린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 :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I. 서론
본 소고를 통해서 제2의 종교개혁이 주는 도전과 의지가 봉화처럼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시간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적인 관점과 이해를 바르게 함으로써 성서 전체를 해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올바른 성서해석의 결과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2017년 10월에 500주년을 맞이하게 되지만, 여전히 개혁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수년 전부터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운동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근거로 의인사상(Justification)에 기초하여 개혁교회의 기치를 높게 든 것과는 달리, 본 소고는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거론하면서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달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의 부흥과 회복을 새롭게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는 것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듯이 유네스코의 “성전산과 통곡의 벽은 유대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라는 결의(찬성24표/기권26/반대6표)는 너무나도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2017년 7월 28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요르단인 수 백 명이 이스라엘 규탄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약 200m 구간 거리 행진까지 하며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암만에서 벌어진 이번 대규모 반이스라엘 시위는 양국 간 긴장 관계가 고조된 것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더구나 요한복음마저도 유대인을 적대시한다고 간주한 나치 독일에 의해 600백만 유대인이 학살된 직후에 언제나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1948년에 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아직까지 마음의 문을 닫고 제3의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희망하면서 아랍권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과연 개혁교회가 지금 여기서 할 일은 무엇인가? 돈 자랑만 하는 성지여행에다 단순한 평화행진과 같은 가나안 땅 밟기와 아무런 감동 없는 단기선교를 빙자한 여행만을 일상적으로 다니는 한국교회는 과연 유대인에게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하고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지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혁교회-유독 한국교회와 독일교회-만이 대대적으로 벌이는 종교개혁 500주년은 로마 천주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울이 깨달은 선교원리가 무엇인지 새롭게 들여다보려고 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슬림과 같은 열방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열방의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유대인들을 시기하게 하였지만, 종말의 때에 이방인들의 도움으로 결국 유대인들도 마지막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을 중심으로 본 소고는 이런 바울의 선교원리를 로마서 9-11장에서 찾아서 보다 구체적인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한 밑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본 소고는 이미 바울 자신이 27년 동안 지중해 전 지역을 다니면서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상황에서 여전히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거론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될 것이라는 새로운 비전과 기대를 가진 로마서 9-11장을 통하여 오늘날 지구촌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거를 찾아서 제2의 종교개혁을 모색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예수의 복음에 굳건하게 서지 못할 때, 로마 천주교가 악한 사탄의 권좌에 앉아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뜻과 제도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보다 중시하는 상황을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인간의 의보다는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이신칭의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 500년 동안 개혁교회가 교단과 교파로 난립하며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필두로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하고 있는 로마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권세와 명예만을 앞세우는 현실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 초림하신 것을 믿고 나아가는 개혁교회의 모습에서 아무런 도전이나 감동을 받지 못하게 한 잘못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율법과 복음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이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 갈 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두 팔을 벌려 회개하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하시려는 뜻을 돌리시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회복시키려는 놀라운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것을 기억함으로써 모든 교회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 예산과 인력을 확충하여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위한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II. 성령과 긍휼(χάρις)
바울은 로마서 9-11장을 부록이나 그냥 건너 뛸 수 있는 징검다리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1-8장의 기독교 교리를 12-16장의 기독교 실천에 꼭 필요한 중심부로 삼기 위하여 성령과 긍휼이란 두 개의 기둥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이 미친 이후에 유대인의 구원이 임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1.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제2의 종교개혁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로마서 9-11장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스라엘에 관련된 장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은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해 이스라엘의 버려짐을 강조할 것이고, 이스라엘주의를 찬성하는 이들은 필요한 부분들을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신구약성서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로마서 9-11장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하는 학자나 주석가나 목회자를 만나거나 보지 못하였다.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오로지 ‘성령’에 이끌려 드로아 환상을 보고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새로운 세계선교의 기초를 만들어 나간 것에 견주어 볼 때, 제2의 종교개혁은 루터와 같은 어떤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주도하셔야 교회가 본질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우리말 번역이 “성령 안에서(έν πνεματι αγιω)”라는 문구를 2절에 배치하는 것과는 달리, 사실상 바울은 9장을 시작하면서 1절부터 ‘성령’을 천명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바울이 9-11장을 시작하면서 성령을 강조한 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 그 어떤 인간적 방편이 아니라, 오직 성령(Solus Spiritus)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의 비전은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라는 구절로 복음이 다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에게 전해져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권들인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롬 9:4)이 있기에, 현재 이스라엘이 복음에 불순종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취소될 수 있는가?”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인하여 바울은 고민한다. 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가진 특권 중에서 유대인의 혈통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나신 것(롬 9:5)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은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로 된 것이다. 약속의 자녀라고 할 때는 인간에게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는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 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 진다.
이러한 유형론적 비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원이란 인간의 최대의 불행, 저주 받을 죄, 죄의 결과로 생기는 죽음 등에서 구한다는 뜻이 있다. 인간의 죄와 그 현실은 원인류의 타락 이래로 불가항력적인 세력으로 인간 실존에 드리워져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는 네 방면에서 불행을 빚어내게 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이다. 그런데 인간 자신에게는 이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도우실 수 있고, 죄의 현실에서 건져내실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이 의미를 가지도록 변화시키실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성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려 인간을 구원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셨다.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구원이다.
이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 가운데 강력한 은사와 선물을 주심으로써 제2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본질을 되찾고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다시금 복음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권이 분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취소될 수 없다고 분명히 하면서도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하여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라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하게 비판한다.
1948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신 은혜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고 주권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여, 이스라엘은 아직도 주변을 둘러싼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와의 갈등을 이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국은 1994년에 맺은 평화 협정에 따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2017년 7월 14일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3명이 성전산 북쪽 출입구를 지키던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사살하자 이스라엘 쪽은 이슬람 사원이 있는 황금 돔 경내까지 추격해 총격 범들을 사살했다. 이스라엘 쪽이 사후 조처로 성전산 출입구에 금속탐지기와 회전문을 설치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충돌이 커졌다.
이런 혼란한 시점에서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제2의 종교개혁이 오늘날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고,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온 세계를 떠돌며 방황하던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주권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권을 맡은 명실상부한 복음의 장자로서의 지위까지도 회복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를 긍휼로 바꾸는 일이 실현될 수 있다. 이런 일은 오직 성령께서 주도하셔서 진노를 긍휼로 바꾸는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룰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긍휼로 바꾸는 일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2. 하나님의 진노를 긍휼(אבר)로 바꾸는 제2의 종교개혁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롬 9:5)과 “약속의 말씀”(롬 9:9)과 “하나님의 뜻”(9:11)과 “성경”(롬 9:17; 10:11)과 “그 말씀”(롬 8:28)을 연거푸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롬 9:14) 혹은 “하나님이 허물하시느냐”(롬 9:19)라고 반문하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롬 9:18)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의와 능력’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 전체에게 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온다.
바울은 토기장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긍휼의 그릇“(롬 9:22-23)을 준비하셨다는 말씀을 통하여 과거 이스라엘에 임했던 ‘하나님의 진노’가 이제는 ‘긍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유명한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각각 두 구절씩을 인용한다.(호 2:23; 1:10; 사 10:22이하; 사 1:9)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사상에 대해서 바울은 폭넓게 구약성서의 전승에 의존하고 있다. 이사야 64:8과 예레미야 18:6의 토기장이의 비유는 개작되지 않은 채 바울에 의해 전승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들어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 암시하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방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호세아 전승은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사상을 담고 있다. 이사야 전승은 남은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최후의 선택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바울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야말로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위에 언제나 변함없이 임하신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호 2:23)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써 죄악을 회개하게 하여 돌이키시려는 의도이지, 진노 그 자체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긍휼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라함(אבר)은 우리말이든 헬라어든 영어이든 사실 어느 언어로도 제대로 변역을 할 수 없는 단어이다. 사실 이 라함만이라도 지금 제대로 이해한다면, 더구나 지난 2천 년간 교회가 제대로 이해를 했더라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종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친밀하게 지속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든다. 그리고 이 라함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버려지심(κένωσις)도 더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며(빌 2:7),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이방인을 위해 버려지고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신구약성서 전체는 ‘창조주(Creator)-중보자(Surrogate/mediator)-피조물(humanity)’의 3중 구조로 진행되어 왔다. 중보자의 첫 역할을 한 사람은 태초에 아담이었고, 그다음 아브라함, 야곱, 이스라엘 등 일시적 중보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내려오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워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이 최후의 계시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이런 역사를 이루어 오셨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 답은 바로 하나님의 라함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답을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라함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야 설명이 되는 것이기에 이해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라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라함은 인류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었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함이 지닌 결정적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도 라함이요, 죄로 물든 인류의 구원에 대한 계획도 라함이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죗값대로 갚게 하지 않는 것도 라함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지만 다시 회복을 시키시는 것도 라함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버리고 주신 자기 비하의 사랑(Kenotic love) 곧 자기 포기(self-giving)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주권과 인류에 대한 사랑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한 역할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고 축복을 통하여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단지 이스라엘은 수동적으로 밀고 당기는(passive centrifugal/centripetal) 역할만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모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바로 하나님의 라함을 동기로 한다. 곧 하나님의 라함이 바로 이해될 때, 우리 성도들도 서로를 위해 자기 포기(self-giving)의 사랑을 나눌 수가 있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순종을 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진정한 라함은 온 세상에 다시 물결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이스라엘은 회복이 되어 진정으로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온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라함을 근간으로 하는 자기 비하의 사랑(Kenotic love)이 회복되고 실천될 때 저절로 새로운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 날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완악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라함을 근간으로 우리 모두 이스라엘의 복음화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III. 하나님의 의 ․ 사랑과 그리스도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강조하며 율법의 본뜻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룬다. 이로써 제2의 종교개혁은 그 어떤 인간이 인위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1.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로 이루는 제2의 종교개혁
바울은 9장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10장을 시작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바를 숨기지 않고 다시금 하나님께 구하는데,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문제’이다.(롬 10:1)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는 열심이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롬 10:2) 이러한 이스라엘의 열심은 “자기 의만을 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 것”(롬 10:3)과 같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핵심을 천명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확실히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가 요구하는 명령과 실천에 열성적이었다.(2a) 하나님께 대한 열심, 그것은 히브리 종교의 특성으로 일종의 광신(fanaticism, 행 9:1-2, 갈 1:13-14, 빌 3:4-6)과 같다. 그러나 정작에 그들은 자신들의 의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깨닫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위의 4절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인 것은 율법을 파괴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최상의 계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한계를 아시고서 인간의 의가 아니요,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의 의로운 행위만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제시한 후에, 바울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만을 대대로 관심 가진 것을 비판하면서 이미 모세 때부터 율법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이셨다고 덧붙인다.
구약성서에서 ‘의’는 상위개념인 츠다카(tzedakah:צדקה)와 하위개념인 미쉬파트(משפט)라는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된다. 츠다카는 나그네와 고아와 같은 약자를 돌보는 의미의 의이고, 미쉬파트는 뇌물을 멀리하여 공정한 재판을 이루는 의미의 의이다.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란 법적인 정의(justice)라는 뜻을 가진 미쉬파트는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공의(righteousness)라는 뜻을 가진 츠다카에 포함되는 일부 특정한 상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의는 미쉬파트보다는 츠다카에 더 가까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를 실현하는 것이 결코 인간의 의로움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점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의인이면서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단순한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과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 죄에 계속 머물며, 혹은 그 죄를 회개하였다고 교만할 수 있을까?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언제나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중심에 모시고 살아간다. 말씀이 그 속에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유에 관해서 우리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곧 이방인들은 행위로 의를 얻은 것이 아니요 다만 “믿음에서 난 의”(롬 9:30, 참고 롬 1:17)로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논리에서 보면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한 것”(롬 9:31)이라는 결론이 분명해진다. 결국 이스라엘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 “부딪칠 돌”에 부딪친 것이다(롬 9:32)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신 것”(롬 9:33)과 같다.
이에 더하여 바울은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음의 말씀에 대해서 설명한다. 10장 5절은 레위기 18:5에서, 6-7절은 신 30:12-13에서 온 인용인데, 율법과 반대되는 믿음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참고, 갈 3:11-12) 8절은 신명기 30:14의 인용인데, 율법대신에 복음의 메시지가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하여 9-11절에서 바울은 주의 깊게 초기 기독교의 신앙 고백을 사용하면서 (1) 예수는 주님이시다 (2)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러한 진리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 물론 구원을 얻는데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갈 3:28)
이런 논리가 루터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는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행하려고만 하고 그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본뜻인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이 스스로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원리를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시내 산의 사건 때부터 헤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생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과 행복을 지켜 주시려는 의도가 있다. 이것이 율법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이다. 마침내 바울은 이 율법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의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길(롬 13:8)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행하려고만 했다고 오해하였지만, 이는 이스라엘이 율법의 속뜻인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바울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제2의 종교개혁
누가 과연 악한 사단을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가? 야고보서 4장 7절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 5장 9절에 “그에게 맞서라”는 의미는 “그를 대적하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9절에 “그에게 맞서라(ἀντίστητε)”는 표현을 흉내 내서 기도할 때마다 대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중에 정원의 ‘대적기도’ 1-4권이 돌아다니는데, 문제가 많은 책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인간이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가? 연약한 인간은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베드로전서 5장 9절을 사역하면,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맞서라(ἀντίστητε)”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곧 우리가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장되신 예수께 믿음으로 맡기라는 표현이다. 특히 안티스테테(ἀντίστητε)란 단어는 대적하다는 단어가 아니라 마귀의 반대편인 예수의 편에 서라는 문자적인 뜻이 있다. 문자적으로 마귀의 편에 서면 지고, 예수의 편에 서면 이긴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편에 선 사람들을 위해서 대장 예수께서 대신 싸워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고백한다.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신 30:13)
하나님과 올바른 의의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께서 “무저갱”인 음부(롬 10:7)에까지 내려가신 이유는 끝이 없는 바닥인 무저갱(헬라어로는 jApolluvwn 롬 10:7)에까지 떨어진 인생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도 언급된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지가 19~20절의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베드로가 ‘영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기에, ‘옥에 있는 영들’이란 사람이 아니다. ‘영들에게’란 단어에서 ‘영들’은 본문을 포함하여 신약성서에 5번(고전 12:10; 엡 6:12; 히 12:23; 요일 4:1) 사용된다. 신약성서에서 ‘영’은 사람의 육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의 생명 속에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신 옥에 있는 ‘영들’이란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로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으므로 타락하여 옥에 갇히게 된 타락한 천사들이다(에녹 1서 6-10장 참조).
예수께서는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着念)함으로 자신의 심령을 강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시편(31:5)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몰아쉰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이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한다. 영혼을 맡겼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주님께서 영혼을 맡기셨듯이 우리도 똑같은 믿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며 숨졌다. 86세에 순교한 폴리캅,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그의 친구 필립 멜란히톤, 이들보다 무려 100년 전에 종교개혁의 믿음을 지키려다 화형을 당한 존 후스 등은 모두 예수와 같은 말을 하며 죽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은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그 본래의 고향인 천국으로 가는 일반적인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전제하고 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예수께서는 ‘옥에 있는 영들’, 곧 사람이 아니라,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으므로 타락하여 옥에 갇히게 된 타락한 천사들에게 가신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에녹서의 전승을 이해하면 더 잘 알 수 있다. 에녹서 6장에는 ‘천사들의 탐욕’이, 7장에는 ‘천사들의 타락’이, 12-13장과 16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선포가, 18장과 21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형벌을 받는 옥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로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이 아니다. 루터는 면제부가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천국으로 되돌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교를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사실상 에녹서의 내용으로 보아 ‘옥에 있는 영들’이란 타락한 천사로 보아야 한다. 타락한 천사는 악한 세력이다. 루터가 로마 천주교를 악한 세력으로 규정하였지만, 사실상 신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로마 천주교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타락한 천사들인 곧 사탄이요 마귀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악하고 타락한 천사들에게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기에 나오는 ‘복음’이란 단어 또한 ‘복음의 전파’란 의미가 아니라, ‘그가 전파하셨다’는 표현이기에, 그리스도께서 회개하여 영생을 주려는 구원의 목적을 가진 복음을 전파하였다기보다는 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의 세력을 멸하셔서 얻게 될 영원한 승리를 전파하였다는 의미이다(벧전 4:6).
악한 영들과 권세들이 주는 고난과 90년에 얌니야에서 발흥한 랍비 유대교에 대항하면서 박해의 어려움에 처해 있던 당시의 성도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승리의 복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상당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악한 사탄에게 억눌린 성도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도 복종하기 때문이다’(벧전 3:22). 그렇다면 제2의 종교개혁이 지닌 성격도 분명해진다. 오직 음부의 권세 잡은 악한 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개혁이다.
종종 유대인 랍비들이 개혁교회와 대화를 하기 위한 단골 메뉴로 메시아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면서,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거부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라고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바울이 경계하던 대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이미 신약성서를 통하여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불순종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제2의 종교개혁은 초림하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서 멀지 않아 재림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신앙을 오늘의 유대인들도 고백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IV. 복음전도자와 남은 자
바울은 유대인들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복음전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혼미한 영에 이끌려 다시 완악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1. 복음전도자들이 이루는 제2의 종교개혁
바울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강력하게 복음전도의 과정을 선언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28:16)는 이사야 예언을 인용한다.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으신“(롬 10:12) 유일하신 참 하나님, 곧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롬 10:12)는 사실을 노래하면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인용함으로써 믿음을 통한 의를 다시금 강조한다.(욜 2:32)
이미 구약성서에 나타난 여러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15)라고 반문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의 수고가 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사야의 노래를 인용한다.(사 52:7)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한 예언자들과 수많은 주의 종들의 수고를 기억하면서, 또 계속해서 믿음과 들음의 관계를 중시하고, 복음이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순종한 것은 아니라고 안타까워하면서(롬 10:16)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는가”(사 53:1)라고 안타까워한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도 이 예언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롬 10:18)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른”(시 19:4) 이 분명한 말씀을 알고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마치 듣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세를 하였다.(롬 10:19)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금 모세오경(신 32:21)과 이사야(사 65:1)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이야말로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라고 강하게 지적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듣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체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일이다. 10장 14-18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가 비록 그 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피할 수 없이 들려졌다는 사실을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입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죄가 나타나며, 바울은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 경고한다. 21절의 ‘복종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일 손을 내밀고 있었다.’라는 말은 바울이 유대인 선교에서 겪은 철저한 체험적 고백이다. 이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러한 말씀들은 이미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온전히 전해졌음에도 불구하여, 이스라엘이 여전히 깨닫지 못해서 불순종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오늘날 이스라엘에게는 성경 속의 이야기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 두 가지 외에는 공통된 과거의 기억이 없으며 다른 공동체와 서로 공유할 만한 미래지향적 비전도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여 복음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
2. 남은 자를 다시 찾는 제2의 종교개혁
9장과 10장을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11장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1)고 확신하면서,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고 강조한다. 1세기에는 복음을 듣고도 거부함으로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운명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면, 21세기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해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희망이 전혀 없는가?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엘리야 때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바울은 11장 2-4절에서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갈멜 산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보인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이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이 두려워 광야로 피신하였을 때 절망 가운데 부르짖은 탄식이 무엇인가?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왕상 19:10) 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인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왕상 19: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롬 11:5)을 바울은 지금도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어리석고 목이 곧은 이스라엘 안에 남은 자가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신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두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사랑의 의지를 가지시고 여전히 구원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5-6).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한 결과로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구원을 받았게 되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 것으로 인식하여 모두 신앙의 길에서 떠난 것으로 간주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 가운데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인 “남은 자”(롬 11:6-7)를 예비하여 두셨다고 위로하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마저도 마지막 때에 한 결 같이 우둔하여졌다는 사실이 바울의 마음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이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사 29:10, 참고 신 29:4) 이 구절에서 “심령”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성령’이 아니라 ‘혼미한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지적은 바울이 9장을 시작하면서 성령을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율법의 행위에만 매달려서 복음의 의에는 무관심한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 바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혼미한 영을 따라간 잘못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혼미한 영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롬 11:9. 참고 시 69:22이하)과 흡사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눈을 흐리게 하사 보지 못하게 하신 것과 같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등을 항상 굽게 하셔서 펴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롬 11:10)
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엘리야의 때부터 분명함에도 불구하여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여전히 불순종한 가운데 지내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혼미한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충청도 면적에 인구도 770만 명에 불과한 이스라엘 안에 그것도 모자라서 점차 세속적인 이스라엘 시민이 대부분의 예루살렘에 거주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아랍인들과 뒤섞인 예루살렘 도성이 너무나도 하나님의 뜻과는 먼 죄악의 장망성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한 해 3만 8천명이라는 어마 어마한 한국 관광객이 성지순례를 예루살렘에 가지만, 그들도 대부분은 신앙적 이유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관광만을 하고 “여호와의 눈이 항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건성으로 성지를 다녀온다. 이스라엘이건 순례 객이건 모두 바울이 안타까워하는 대로 혼미한 영에 인도함을 받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이제 제2 종교개혁은 우리 모두가 회개를 함으로써 온전한 심령이 되어 참 마음으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위하여 놀라운 구원의 길을 예비하고 계신 것을 성령의 탄식을 통하여 깨닫고 이스라엘 복음전도에 다 같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새로운 마음과 온전한 영으로 헌신해야 한다.
V.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있는 이방인의 구원과 유대인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사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구원을 받는 것으로 완성되지만, 그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바울은 이 같은 구원의 비밀에 관하여 종말론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다룬다. 1. 이방인의 구원으로 확장되는 제2의 종교개혁 11장에 들어서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마저도 다시 완악하여 졌다(7)고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저들(남은 자)이 완악하여 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이 뼈아프다.(8-10) 그렇다고 저들이 멸망하기까지 넘어졌는가?(11)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데 있었다.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가 날 정도로 이방인에게 구원이 허락되었던 사실이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비밀은 곧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한 것”(롬 11:11)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에게 나타나게 된 것을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된다.”(롬 11:12)고 말한다. 강경한 어조로 유대인 혈통을 자랑한 바울(롬 11:1, 참고, 빌 3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구원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롬 11:13)고 고백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미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내 골육을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4)고 말한다. 이렇게 이방인에게 복음이 미친 것이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구원의 길이 없다고 단정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특권을 맡았던 이스라엘이 시기함으로 다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 있다고 바울은 다시금 강조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비밀이다.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이 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길이 되는 것처럼, 다시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롬 11:15) 바울은 이방인에게 자기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밝힌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유대인을 돌이키려는 간절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에게 붙인 ‘이방인의 사도’란 이름을 과장하는 것도 아무쪼록 자기 동족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케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를 구원하고자 함이다. 유대인을 다시 찾는 일은 죽은 자들로부터 사는 것처럼 굉장한 일이다.(참고 눅 15:32) 이런 연유로 16절에서 바울은 그 심중에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가르친다. 이제 바울은 예수의 비유를 흉내라도 내려는 듯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롬 11:16-24)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제안한다. 이런 비유를 통하여 바울은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과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의 관계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원가지인 참감람나무가 꺾이지 않고 넘어지지 않을 때 온전히 설 수 있는 것처럼,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도 온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을 때 찍히지 않는다고 언급함으로써, 바울은 참감람나무이든 돌감람나무이든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 높은데 마음을 품는 교만을 버리고 두려워함으로 항상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어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을 일깨우고 있다. 바울은 비유적인 설명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원가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상징하는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아 살게 된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통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곧 (1)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의 계속적인 근신(20b, 21-22)과 (2) 이스라엘의 구원 가능성(23-24)이다. 이렇게 이방인은 용납(admission)하고 유대인은 배척(exclusion)하는 일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활동과 관계된 섭리이다. 제2의 종교개혁은 참감람나무이든 돌감람나무이든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항상 두려움으로 머물기를 원하는 진실한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교만한 마음으로 인생의 뿌리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인생은 아낌없이 찍힌 바가 되어 버려지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과연 얼마나 그 중심에 새기고 살아가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은 마지막 재림주와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맞이할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과 같은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도록 온 교회가 다시 이방인 선교와 유대인 선교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매진해 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 전도의 사명을 우리에게 새롭게 일깨워준다. 2.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완성되는 제2의 종교개혁 이방인에게 구원이 미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을 시기 나게 함으로 다시 구원이 이스라엘에 미치게 된다면, 그 방식은 어떤 식으로 일어날 것인가?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단지 하나님의 신비요 “비밀”이라고만 설명한다.(롬 11:25)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로 인하여 다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면,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이 마지막 때에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비전을 깨달은 바울은 마침내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노래한다.(사 59:20 이하; 사 27:9 이하)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시에 관해서 감히 언급한다. 그것은 이방인의 구원에 더하여서 마침내 이스라엘의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이다.(25b-26) 비록 복음에 있어서는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과거에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었던 자였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취소할 수 없다. 30-32에서 바울은 9-11장 전체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결정적인 필치로 요약한다. (1) 과거에 이방인이 불순종한 가운데 있었으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30). 그러나 (2)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른 지금 아직도 불순종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하나님의 자비가 이르게 된다.(31) 이러한 바울의 논리에 있어서 주요한 사실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두 불순종 가운데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32) 다시 이스라엘이 복음의 자리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원수의 자리에 있었지만, 원래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다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히 회복하게 된다(롬 11: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이로써 바울은 로마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온 인류에게 미치는 복된 소식을 찬양한다(롬 10:30-36). 바울 이전에 이스라엘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종말론의 도식은 ‘유대인->종말->이방인’의 순서로 구원이 전개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고 이를 시기한 이스라엘이 다시 복음의 자리로 나아오는 과정을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도식으로 이해한 바울로 인하여, 이제는 ‘유대인->이방인->종말’의 순서로 하나님의 구원이 전개되는 시대가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에게 주어진 선교의 시대인 21세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다메섹 체험 이후에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였다.(갈 1:16, 행 9:15)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정책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잘 드러나 있다.(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땅 끝, 즉 유대인→이방인의 도식이다) 그러나 바울의 편에서 볼 때, 이미 유대인은 결정적인 실격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새로운 도식, 즉 ‘이방인→유대인’이란 구원사를 제시한다. 이 점에서 제2의 종교개혁은 여전히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유대인의 구원이 실현되고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오늘날 온 이방인 교회가 다시금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에 빚진 자들인 온 세상의 이방인 교회가 이스라엘에 복음의 꽃이 다시 피어 날 수 있도록 모든 재정과 노력을 기울여서 예루살렘에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점점 가득하여 아직도 구약성서가 예언한 메시아가 초림하시기만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이 이미 2천 년 전에 오신 메시아께서 머지않아 재림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구원사의 과정 가운데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믿고 더 늦기 전에 속히 구원의 길로 나아 올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VI. 결론 2017년 8월 21일(현지시간)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이란 최고지도자)에 의해 정규군 총사령관으로 새로 임명된 압돌라힘 무사비는 임명 뒤 첫 공개석상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강한 적대를 표했다. 무사비는 24일 밤 이란 중북부 종교도시 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모흐센 호자지와 같은 순교자의 헌신으로 시오니즘 정권(이스라엘)은 25년 안에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모흐센 호자지란 인물은 시리아에 이슬람테러단체(ISIL)를 격퇴하기 위한 전쟁에 군사 고문단으로 파견됐다가 8월 7일에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지대에서 이슬람테러단체에 사로잡혀 9일에 참수된 이란 장교다. 왜 자기 나라 무슬림 장교가 형제 무슬림에 의해 무참히 참수된 비극적인 일을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포화를 퍼 붇는가? 이보다 한 달 앞서서 7월 18일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7월 9일에 극적으로 이루어진 시리아 남서부 지역의 휴전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시리아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공군 및 해군기지를 설치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중동세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반이란과 반이스라엘의 정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음부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에게까지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처럼, 모든 교회는 악한 권세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포기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시 찾아가서 끝까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지구촌이 하나로 급속하게 연결되는 상황에서 아직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 땅 끝이라고 인식함으로써 교회가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한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을 찾아 나서야한다. 제2의 종교개혁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강권적으로 행하셔야 가능하다. 루터의 마음에 성령이 활짝 열리지 못한 채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와 대립각만을 세우고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정문에 내다 걸고,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천주교회를 비판하고자 그의 마음속에 이신칭의의 교리만으로 가득 채우게 될 때, 정작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오래 참으시는 긍휼(χάρις')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행위구원을 비판하고 믿음구원만을 부르짖을 때 ‘탄식하시는 성령’(롬 8:26)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공생애를 사셨다. 이제 개혁교회는 제2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바울처럼 성령을 환영하고, 성령께서 이방인 선교의 문을 활짝 여셔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신 복음이 다시 유대인들에게 전해져서 그들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복음의 비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더 지체하지 말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한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5가지의 과제들을 통하여 제2의 종교개혁을 추진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이 땅의 모든 교회는 교만을 버리고 다시 본질로 돌아가서 겸손하게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구원은 율법의 실천이나 행위로 인한 자랑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긍휼로 바뀜으로 인해 오는 은혜인 줄로 깨닫고 다시금 믿음을 통한 의가 변화된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룩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모든 형식적인 위선을 버려야 한다. 둘째, 루터는 종교개혁을 믿음을 통한 구원인 이신칭의로 이루었는데, 이제 모든 교회는 행동으로 믿음을 보이는 신행일치를 통해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그동안 말만 앞세우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이웃과 멍에를 같이 하는 긍휼사역에 힘써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이다. 그러므로 대형교회의 우상을 버리고 진심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의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루터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행하려고만 하고 그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본뜻인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처럼 실감나게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는 원리를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때부터 헤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무거운 짐을 지게해서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과 행복을 지켜 주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이다. 바로 바울은 이 율법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길(롬 13:8)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게 된다. 루터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행하려고만 했다고 비판하였지만, 이는 이스라엘이 율법의 속뜻인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바울처럼 확신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에서 믿음을 생활 속에 실천하는 일로 구체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넷째,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제2의 종교개혁을 새롭게 이루기 위해서 교회는 율법의 특권을 맡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 행위구원만을 받으려하였다는 오해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인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희생하시고 헌신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참 믿음을 속히 재발견하고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교만한 자리에서 돌이켜 겸손하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계에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선교에 힘을 모아야 한다. 다섯째, 유대인은 복음의 특권을 먼저 맡았던 자들이다. 그들이 다시 복음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처럼 개혁교회는 먼저 회개함으로써 로마서 9-11장을 통한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유대인의 교만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들에게 미칠 때 종말이 임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방인의 교만은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더 이상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개혁교회의 교만은 이신칭의만을 강조하여 신행일치를 소홀히 하였다. 한국교회의 교만은 단시일 내에 교회성장을 이루다보니 다시금 자기의 의만을 자랑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개혁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모두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 복음의 원리로 되돌아가서 겸손하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이 마지막 때에 성취되도록 위해서 성서가 가르치는 교회의 본질인 하나님의 선교에 겸손히 동참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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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서신학, 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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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여기까지 교수님의 글입니다. 아래는 제 파워포인트 자료입니다. 2년 전의 자료입니다.
맨 처음 도표의 동족구원이라는 부분은 수정이 필요하고 이스라엘 문제(9장) 부딛치는 부분도 수정이 필요합니다. 다시 파워포인트 자료를 수정을 해서 올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개신교의 과제요, 천주교의 과제 일 것입니다.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할 민족도 또 중요합니다. 먼저 구약의 율법과 성경을 가진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모든 면에서 앞서고 잘나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약한 나라가 이를 변하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적어도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 보다 더 잘나가야 이스라엘이 왜 저 민족은 우리 보다 잘나가고 있지 하고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어떤 민족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저는 단호히 한국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구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과 구약의 완벽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길 가장 첫 근거입니다. 그런데 모든 개신교나 천주교 국가가 신 구약의 완벽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왜 유독 한국이 가능한가 입니다. 먼저 어떤 예수님을 믿는 교회의 나라도 반드시 구약을 이스라엘과 같이 잘 배우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외면하고 등한시 하면서 절대로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은 모든 교회가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예수님의 복음서 위에 두고선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없는데 이 부분이 언제나 바뀔지 모르나 조금씩 사도 바울에 빠져서 정신이 없던 신학자와 교회가 정신을 차려서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에 더 비중을 두는 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해석의 기준과도 관련이 있는데 법의 해석이 헌법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듯이 서신서의 해설도 반드시 사복음서의 내용을 위반해서 해석을 절대로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종된 인간 바울의 서신이 비록 모두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쓰여서 흠이 없지만 이를 잘못 해석해서 예수님의 사복음서의 말씀을 무시하게 하면 절대로 아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개신교 국가에서 대부분 잘못을 하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서 미국의 3개대학(하버드, 예일,프린스턴)과 영국의 옥스퍼드에 자료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작은 나라로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오직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을 잘 믿는 방법외엔 절대로 어떤 방법도 없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가장 잘 믿어야 하는 지정학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도 운명적인 공간에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정말로 올바로 공부하고 실천을 통해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믿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능가하는 일들을 모든 분야에서 할 때 콧대 높은 유대인이 비로소 한국을 주목하고 이것이 예수님을 잘 믿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임을 확신할 때 비로소 이스라엘도 복음에 주목하게 되리라 믿는데 우리는 신구약 성경과 그리고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운명, 그리고 작은 나라, 공부에의 열정과 온 세상에서 가장 열심인 기도와 선교에의 열정으로 반드시 이를 가능하게 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70년의 평화와 물질의 축복을 성경의 연구에 쏟아붓고 의사를 지망하고 고시를 지망하고자 하는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크리스천이 세상의 연락을 쫓아서 그 귀한 재능을 허비하지 말고 영원히 축복을 받고 민족을 살리는 성경의 연구에 모든 젊음과 노력을 다 바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신 부자는 물질을 이렇게 뛰어난 인재가 성경을 마음놓고 수십년 연구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부탁을 드립니다.
교수님의 귀한 글을 통해서 많은 문제의 해결이 보입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좀더 자세하게 같이 9-11장의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승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