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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리노를 관광하고 환상 적인 모자이크도시 “라벤나”로 이동하고 있다..
산 마리노에서 “라벤나” 까지 85.7km 다.
규정 속도로 이동 한다면 1시간 20분이 소요될 것 같다.
SS72번 국도로 진입하고 있다.
산 마리노로 남하 했던 A14번 국도로 전환 해 북상하고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체세나 현 근처에서 SS3bis 국도로 360도 회전해 다시 북상하고 있다.
단테무덤
SS3bis 국도에서 SS309번 국도로 전환해 북상하면 “베네치아”다.
이웃이 “베네치아”라는 의미다.
“라벤나시”는 라벤나현의 중심 도시다.
해안가에서 조금 벗어나 내륙 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동하면 아드리아 해다.
7번국도를 따라 포항에서 북상하면 동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것과 유사한 도로가 이탈리아 SS309번 국도이다.
단테가묘
“라벤나”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복구된 정치적 안정이 율리아누스 황제사후 급격히 무너지기시작했다.
이유는 동방과 북방에서 빈번해지기 시작한 이민족의 침입 때문이다.
레오니아노
세례당
중국 한나라 무제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중국의 북방민족인 흉노 족을 공격했다.
흉노 족은 그 여파로 북부 유럽지방으로 이동했다.
이때 흉노 족은 북부유럽쪽지방에서 살고있었던 고트족을 위협했다.
고트(Goth)족이 남쪽으로 이동한 이유다.
이것이 게르만민족 이동의 발단이다.
모자이크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 앞에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로마 제국은 동·서 국가로 분열되어가고 있었다.
게르만민족은 로마제국의 영토로 깊숙이 이동하기시작했다.
차려진 밥상을 해치우기위해서다.
그 여파로 서로마제국의 정치.경제는 파국으로 치닫고있었다.
레오니아오 세례당
내부
서로마제국이 수도를 “라벤나”로 옮긴 이유다.
수준 높은 로마 문화가 “라벤나”로 이전되기시작했다.
오늘날 “라벤나”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돌 조각으로 꾸며진 모자이크 벽화이다.
“라벤나”에 도착해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가이드가 앞장서 일행을 인솔하고 있다.
그러나 가이드는 식당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있지 못했다.
때문에 스마트폰 길찾기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가끔씩 다른 곳으로 안내했기때문이다.
피로가 누적돼 점점 지쳐가고 있다.
발걸음도 무거워지고 있다.
라벤나 가리발디
동상
이때 조상의 영혼을 모신 영 묘가 도로 가에서 발견되었다.
“갈라플라치디아” 영 묘다.
“갈라플라치디아” 영 묘는 황제의 누이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조성했다.
전통적인 회화양식과 다른 모자이크양식으로 돼있다.
모자이크는 여러 가지 빛깔의 돌이나 유리, 금속, 조개껍데기, 타일 등을 조각내 건축의 벽이나 바닥에 붙여서 완성시키는 기법이다.
라벤나시 거리
“갈라플라치디아” 영 묘가 전통적인 회화기법과 달라서 충격을 주고있다.
모자이크양식은 시대적 부산물이다.
그리스시대 모자이크는 주로 백색과 흑색을 띄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시대 모자이크는 채색된 재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모자이크 양식은 세 단계로 변천했다.
첫째는 돌을 사각형으로 조각내 규칙적으로 배열시키는 방식이다.
바닥 모자이크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두번째는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시대로 불규칙적인 돌 조각을 이용했다.
색상이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세번째는 대리석이나 그 밖의 재료를 모양에 따라 잘라 짜 맞추었다.
재료는 고대보다 중세의 것이 크며 색감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2세기가 되면서 다시 작아지고 색상도 다양해졌다.
산 비탈레성당
라벤나 영 묘 모자이크가 화려해서 보면볼수록 매료되어갔다.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모자이크 수업이 생각나고 있다.
색종이를 조각내 그림에 붙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나고있었기때문이다.
성당내부 모자이크
무굴제국은 인도북부에서 바베르가 건국한 이슬람왕국이다.
수도는 인도 북부에 있는 아그라성이다.
이곳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서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성을 방문해보고 싶었다.
주인공은 샤자 한과 뭄타즈 마할이다.
이들의 사랑은 현실을 넘어 영혼으로 까지 맺어지고 있다.
인도를 여행할 때 타지 마할을 관람한 적이 있다.
타지 마할은 무굴 제국의 제5대 왕인 샤 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서 만든 무덤이다.
타지는 궁전 이라는 의미이고, 마할은 무덤이라는 뜻이다.
무굴제국 제4대황제 자한 기르는 인도 귀족 출신 부인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가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인 샤자 한이다.
샤자 한은 영토를 확장해 포용정책을 펼쳤다.
권력의 정도만큼 왕비도 여러 명을 거느렸다.
그 중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왕비가 뭄타즈 마할이다.
그녀는 14세때 왕자 꾸람과 결혼해 19년동안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혹자는 그녀를 밤하늘에 떠있는 별로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미인이라는 뜻이다.
성당 내부
그러나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뭄타즈 마할이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은 드라비다족 출신 여인이라는 이유때문이다.
그녀는 미모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내적인 온유 함을 소유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맑은 목소리, 넘치는 애교, 밝은 성격은 그녀가 소유한 장점이었다.
거드름을 피우거나 남을 험담 하지도 않았다.
사치를 멀리하고, 왕비의 품위도 잃지 않았다.
남편이 행정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시달리고 있을 때 항상 곁에서 지켜보고 고민을 함께했다.
전쟁터 마다 황제와 함께해 고통을 분담했다.
샤자 한이 다른 왕비 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하며 뭄타즈 마할 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있었기때문이다.
데칸(Deccan)고원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녀는 열네번째 자녀를 해산하고 있었다.
38세 라는 나이때문에 고통이 수반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얼굴이 밝았다.
해산 후 후유증은 지속되었다.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것이다.
노국대장 공주의 죽음을 맞이하고 울부짖었던 고려말 공민왕처럼 샤 자한도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샤자 한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눈도 침침 했다.
인생이 허망하고 권력도 싫었다.
지금까지 전력 투구해 얻은 권력은 허상에 지나지않았다.
성당 천장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녀를 붙잡을 것도 같았지만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허우적 거리며 밤을 지새는 날이 늘어갔다.
어느날 부인과 약속이 뇌리를 스쳤다.
왕비가 죽으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은 왕비에게 늘 썼던 상투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왕비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무덤은 영원한 사랑을 상징해야 했다.
그래서 세계 방방곳곳에서 2만여 명의 장인들을 초청했다.
상인들 에게는 보석과 건축에 필요한 각종 재료를 공급하게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청금석, 중국에서 수정, 티베트에서 터키석, 예멘에서 산호를 공수시켰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를 만들기위해서다.
몬테카티니테르메
호텔에서
건축은 23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여성 미를 갖춘 수려한 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묘라면 왕비도 만족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국가재정이 바닥나고 있었다.
묘 하나 건축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있었기때문이다.
40세된 태자가 공사를 반대하고 나섰다.
대신 들도 반대의 목청을 높였다.
샤 자한은 꼼짝하지않았다.
누구의 조언도 듣지않았다.
아그라성에서 내려보는 타지 마할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먼테카티니테르메 호텔
샤자 한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시작했다.
왕비와 약속을 지켰다는 기쁨때문이었다.
호수 위에 왕비의 얼굴이 투영되고있다.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샤자 한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왕자 아우랑제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때문이다.
샤자 한은 권좌에서 쫓겨나 아그라성에 유폐되었다.
식사는 물론 식수 까지도 차단되었다.
아그라성 거실 창 앞에서 왕비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실신 했을 때도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왕비가 그곳에서 미소를 짓고있었기때문이다.
타지 마할은 모자이크 양식 과는 다른 이슬람양식 타일기법이다.
타일기법과 모자이크양식은 각기 특색이 있다.
내적인 화려함을 강조한 타지 마할 묘가 엄숙한 면이 있다면 라벤나 지방의 모자이크장식은 화려함이 특색이다.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소문난 맛집 이기때문일 것이다.
몬테카티니테르메
호텔
동양인과 서양인도 있고, 인도와 아프리카 인도 있다.
사람들은 왜소한 동양인들을 보고 일본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
말춤을 흉내내자 금새 알아차리고 강남스타일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유럽의 식사는 대부분 세 코스(course)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 식당도 마찬 가지다.
식사를 마치고 산 비탈레 성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산 비탈레 성당은 비잔틴 예술의 걸작이다.
동고트족의 여왕 아말라순타 치하 때 주교 에클레시우스에 의해서 착공된 성당으로 비잔틴제국 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있는 곳이다.
5~6세기 기간동안에 걸쳐 건축된 이 성당은 1700년~1800년 대 프레스코 화를 소장하고 있다.
옆에 있는 국립박물관도 초기 로마 시대의 유물 부터 18세기 유물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천년 동안 축적된 비잔틴제국의 찬란한 역사가 모자이크양식으로 환생되고 있었다.
천정과 벽, 기둥이 모두 금색 모자이크로 치장돼 있다.
화려하고 찬란해 천국같다.
모자이크 벽화가 기둥의 하얀 대리석에 투영되고 있다.
천정과 벽의 금색 모자이크도 기둥에 투영되고 있다.
시청을 경유해 다시 단테 무덤으로 이동하고 있다.
단테의 이름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다.
이것을 줄여서 “단테 알리기에”로 표기 하기도 한다.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시인이다.
피렌체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 당과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는 기벨린 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두 당 간의 정쟁은 치열하고 맹렬 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 만큼이나 치열했다.
“단테”는 교황 파인 구엘프 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교황의 야심적인 영토확장정책에는 반대했다.
1290년대 집권당인 구엘프 당은 다시 흑 당과 백당으로 분열되었다.
“단테”는 후자에 속했다.
정쟁에서 패배한 흑 당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그러자 교황을 지지한 프랑스의 샤를 백작이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를 공격했다.
교황을 지지한 흑 당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흑 당은 “단테”를 뇌물 수수와 횡령죄로 추방했다.
사절단으로 파견 되었던 “단테”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오는 도중에 추방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이때 “단테”를 후원하고 나선 사람은 “라벤나” 영주다.
“단테”는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고 “라벤나”에 머물렀다.
그리고 대작인 “신곡”을 완성하였다.
그는 여생동안 고향을 그리워 했다.
그러나 끝내 돌아갈 수 없었다.
단테의 무덤으로 이동하고 있다.
무덤은 1780년에 조성되었다.
무덤 앞에 작은 촛불이 켜져있다.
1780년대 이래 지금까지 촛불이 꺼진 적이 없다.
속죄의 의미로 피렌체가 촛불을 계속 켜놓고 있었기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운명을 가톨릭교 적 시각에서 바라본 저서다.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대의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네오니아노 세례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건물은 검소하게 보였다.
그러나 내부는 화려했다.
“라벤나”에서 “몬테카티니테르메”로 이동하고 있다.
몬테카티니테르메 까지 208km 다.
규정속도로 이동한다면 2시간 10분이 소요될 것 같다.
오래전에 “몬테카티니테르메”에서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목과 사냥을 하며 살았다.
14세기 초, “몬테카티니테르메”는 신흥 피렌체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피렌체는 시에나와 아레초 등지까지 세력을 펼치려 했으나 북 서부에서 세력을 확장한 기벨린 세력때문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기벨린 세력의 지도자는 피사지방과 루카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우구초네 델라 파주올라다.
우구초네 델라 파주올라는 전략적 요충지 “몬테카티니테르메”를 포위했다.
성벽아래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었다.
수천명의 사상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전투가 역전되고 있었다.
우구초네 델라 파주올라가 도망자 신세로 전락 되었기때문이다.
이때 카스트로초 카스트라카니가 우구초네 델라 파주올라를 자신의 거점으로 데리고 갔다.
피사지방도 토스카나지방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카스트로초 카스트라카니는 피렌체의 요새 중 하나인 푸체키오에서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피해만 입은체 퇴각했다.
피렌체가 강국으로 부상한 이유다.
“몬테카티니테르메”에 도착 하고있다.
호텔에 여장을 푼 후 곧바로 “몬테카티니테르메” 시내로 이동하고 있다.
관광을 위해서다.
볼거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메고있었지만 눈에 띄지않았다.
이곳은 단지 숙박업소로 성장했기때문이다.
다행히도 광장에서 가톨릭교 촛불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성당에서 개최한 촛불행사와 비슷하다.
성모 마리아 상이 앞서고 신부와 신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
잠깐 약국에 들렸다가 광장으로 이동했지만 촛불행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밤 9시가 넘어가고 있다.
도로가 가로등이 하나 둘 꺼지면서 거리는 정적이 감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