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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만트라 공력 탁월한 大院寺서 주문 공부
원불교신문 [978호] 1998년 08월 21일 (금)
박용덕〈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회상 창립인연 확보에 공이 큰 송적벽
증산계열의 새 회상 창립 인연은 정산종사를 통해 파급되는데 30여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거의 원평 송찬오가 중심이 되어 확보하게 된다.
어찌 된 판인지 송찬오는 그의 이름 그대로(찬오의 贊자가 도울 찬자다)
정산종사를 도와 주려고 작정하고 나왔는지
새 회상 창립 인연을 확보하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후일의 송적벽이라는 사람이다.
대종사는 한때 그 뜨거운 열정을 기려 송적벽에게 夏山(하산)이라는 법호를 내린다.
송도군이 전라도에 와서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원평 송적벽(宋贊五)의 엿방이요,
그를 반연하여 대흥리의 차경석, 손바래기 증산생가를 찾게 되고
선돌댁, 강순임, 고부인 등을 만나지만 회상 창립의 인연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정산종사는 원기2년 음력 동지섣달 두달간 이곳에 머물며 주문 수련을 하였다.
창립 인연의 확보에는 송적벽의 역할이 크다.
그는 도군에게 여러 도 인연들을 소개해주는가 하면
각처 왕래시에 중간 거점으로 숙식을 제공하였다.
송도군이 그의 엿방에 의탁해 있을 때
적벽은 웃구봉의 부자집 이만갑의 큰아들 김원형을 이곳에 데려다 글공부를 하도록 주선하였다.
이를 기연으로 뒷날 김원형은 원평교당 창립주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송적벽은 우물터의 남색치마 아주머니 구남수로 하여금 도군을 손바래기로 안내하도록 하고,
기미년에는 도군의 소개로 찾아온 대종사를 금산사 송대에 휴양토록 주선한다.
이때 도군을 존경하여 따르던 구남수와 이만갑이 송대에 찾아와서 대종사를 극진 공양하였다.
송적벽은 여러 증산교도를 대종사 문하로 이끌었으니
김남천, 박호장, 송월수, 구남수, 장정수, 문정규, 전일, 차봉천, 김정각,
그리고 유일하게 기독교 장로 조송광이 있다.
적벽의 친구인 김남천과 문정규는 대종사의 봉래정사 시봉과 익산총부 건설에,
구남수는 화해리 인연 확보에,
박호장 송월수 전일 차봉천 김정각은 전주 인연 찾기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였다.
송적벽의 이웃에 사는 한의원 조송광은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며
정녀 무녀리 조전권을 비롯하여 3자매가 전무출신한다.
이를 계기로 원평의 많은 청소년들이 출가 입문하였다.
正覺의 요체는 마음을 죽여 없애는 것
정사년 동지달(1917), 송도군은 품속에 『정심요결』을 간직하고 모악산 대원사로 들어갔다.
대원사에는 노승 둘과 동자승이 있었는데 어떻게나 가난하였던지
매일 죽을 먹고 지내기에도 어려웠다.
객이 오면 죽 솥에 물을 더 부어 대접할 정도로 빈찰이었다.
절집이 왜 이다지도 썰렁하냐는 물음에 동자승은
「진묵대사가 절 가난을 3백년이나 묶어놓아 이제 5년만 남았다」고 하였다.
진묵이 대원사에 머물 때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아 그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이런 가난 체험을 뒷날 대종사의 명을 받아
진안 만덕산 미륵암에 가서도 당하게 되는데
비단장수 화주 최도화를 만나고 생불로 받들어지게 되면서
갑자기 설날 불공이 북적대어 절 살림이 여간 풍족스러워 진 게 아니었다.
역시 이곳에도 주석한 바 있는 진묵은
미륵사에서 갓 쓴 불상을 조성하기도 하고
생남 불공하러 온 아낙네를 위하여
불자로 불상을 탁탁 두드리며 『어이, 아들 하나 태워줘』라고 한 일화로 유명하다.
또 그가 한 말 미륵 세상을 예시하는
「참 중은 하산하고 엉터리 중은 입산한다」는 금언이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진묵의 일화가 어려 있고 증산이 도통을 한 대원사에서
송도군은 『정심요결』을 읽고 수련하며 동지 섣달 두어 달 동안 있으면서
정정의 힘(一心공력)은 어느 정도 얻은 듯하다.
그가 뒤에 수정 보완한 『수심정경』의 날을 한정한 극절한 수련법에서
「7일 정진하면 眞마저 잊고 더 극절히 수련하면 30분 아니
찰나간에도 마음을 없애면 정각을 이룬다」
(剋日之期 大限七日 ―亦有五日或三日之限皆言禪期也
― 七日精進可入眞忘 小限半時 ―亦曰刹那― 半時燃心能成正覺)
라고 한 구절에서 당시 체험의 일단이 미루어 짐작된다.
필자가 볼 때 정각의 요체는 한마디로 몰아 「마음을 불태워 없애는데」(燃心) 있다.
이 점에 대해 정산종사는 『수심정경』에서 이렇게 보설을 한다.
「도통을 하는데 더디고 빠름은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성 여하에 달린 것」
(定靜之有遲速 不在於人 在乎誠與不誠)이라 하였다.
도통하기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정산종사의 대원사 체험 일화는 의외로 적게 전해진다.
이때 그는 인도 대의의 도덕 공부보다 신통 묘술에 더 관심이 많았던 모양으로,
불교의 육도사생에 대한 이해가 되어 있지 않아 이곳에 와 처음 접하게 되며,
오로지 주문 공부에 주력하여 금빛 은빛 기운을 보는 등등
이 무렵의 도군의 공부 경향은 신통 이적의 말변에 흐르고 있었다.
「육도사생에 대한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인데,
대원사에 있을 때 우연히 육도사생의 변화하는 이치…」
「내가 대원사에 머물 때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어느날 밤 앞산에서 무슨 빛이 뜨는 것을 보았다(『정산종사 법문과 일화』 9-2, 3).
도군의 대원사의 주문 공력은 화해리에서 여러 이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도군은 대종사를 만나면서 잘못된 공부에 대해 호되게 경책을 당하게 되고
옥녀봉 아래 토굴에 6개월간이나 연금 조치를 당하게 된다.
「모악의 呪錫院」 대원사 주문 공력 탁월해
모악산은 김제군과 완주군의 군 경계로 김제쪽에는 금산사,
완주쪽으로는 大院寺(대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금산사에는 미륵대불을 봉안한 미륵전이 유명하고,
대원사에는 속설에 「부처님의 후신」이라는 진묵대사가 한때 주석하였는가 하면
스스로 「미륵」이라고 한 강증산이 도통을 한 유서 깊은 절이다.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 997번지 모악산 동쪽 산중턱에 위치한 대원사는
전주쪽으로 향하여 있는 절이다. 대원사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 밀교의 풍도가 크게 떨쳤다는 개성의 천마산 총지사와 더불어 모악의 呪錫院(주석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삼국유사』 5권 神呪6, 〈惠通降龍〉;「今和尙傳無外之髓 遍歷塵? 救人化物 兼以宿命之明 創寺雪怨 密敎之風 於是乎大振 天磨之總持솜 母岳之呪錫院等 皆其流裔也」)
이는 대원사가 神印宗(신인종)의 本山이라는 구전,
여의주를 입에 문 강증산이 소 울음 소리 같은 「옴」 주문을 「훔치훔치…」로 변용하여
호남 일대를 풍미하였던 태을주문의 유래처일 것이라는 것,
또 이곳에서 수련하는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오가는 아주 강력한 파워의 만트라 계시를 받는다는 영험담 등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산종사, 대원사서 주문 적공하여 화해리서 각종 이적 나타내
『수심정경』에 `마음을 죽여 없애면 찰나간에도 正覺을 이룬다'고 밝혀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 이름이 「大院寺」라 한 것이다. 보통 절을 寺院이라 한다.
院이란 글자가 지금은 병원이나 학원 등에 흔히 쓰이지만
諸橋轍次(제교철차)가 편성한 『대한화자전』을 찾아보면
원래는 중국에서 승려들이 기거하는 절이거나 도사들이 사는 道觀(도관)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院」은 큰절의 보조 사찰이다. 대개 큰절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위치하며
산사가 속세와 접촉할 수 있는 의술, 휴식처, 교역소 등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院자는 오대산 眞如院(진여원)이나 여주의 高達院(고달원),
청평의 文殊院(문수원), 모악산의 呪錫院(주석원) 등에 보이다가,
대략 조선조 때 들어오면서 거의 寺자로 바뀐다.
진여원이 上院寺(상원사)로, 주석원이 大院寺로 바뀐 것이 그 예이다.
어떤 이는 대원사 연혁에 대해서
근방의 구이면 평촌리 보광재의 景福寺址(경복사지)의 연혁에 관련지어 열반종의 한 사찰로 보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경복사는 백제 때 열반종의 개조인 보덕화상이 창건한 절로
여기서 교학을 배운 일승·심정·大原(대원) 세 스님이 대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단지 대원 스님과 발음상의 이름만 유사할 뿐 설득력이 약하다.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던 시절 절 아래 들이 거의 寺田畓(사전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금산사 아래 원들(院坪)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라든지,
또 강증산이 죽을 때 『내가 금산사에 가서 佛糧畓(불량답)이나 차지하리라』라 한 말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현존하고 있는 대원사 건물은 대웅전·명부전·산신각과 기타 부속건물이 있다.
승려들이 거처하고 있는 요사채에는 진묵대사의 영정과 제왕 탱화가 걸려 있다.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불상 뒤에 후불 탱화와 나한 탱화 2폭이 있고,
불상 앞에는 목조 사자상이 놓여져 있다.
대웅전의 목조 사자상은 높이 90㎝, 길이 135㎝로 힘이 센 장정 두세 명이 겨우 들 수 있는 괴목이다. 이 목조 사자상은 현재 전북지방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각자와 조각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묵대사가 이 목조 사자 위에 북을 올려놓고 가축을 하늘로 인도할 때 쓰여진 것이라 한다.
우리 모두 주세불이 되며 미륵이 되고
고려 때 총지종과 더불어 밀교의 2대 종파중의 하나인 신인종의 본산이었을 것이라는 대원사.
소 울음 소리(죻웎) 같은 「옴」 주문의 진언밀교가 융창하였던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지내고,
오백년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마지막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쇠잔할 때
증산이 나와 다시 훔치 주문으로 회생의 기운을 불어일으키고자 하였다.
증산이 31세되던 해(1901) 음력 6월에 대원사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음7월5일 큰비바람 몰아칠 때 대도를 깨달았다 하며,
뒷날 그는, 김경흔의 태을주에 「훔치훔치」 두 자를 더 붙여
「수운의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으니 태을주를 쓰라」 하였다.
수양연구요론의 〈정정요론〉은 6·25동란 직후 정산종사에 의해 『수심정경』으로 수정 보완되었다. 수심정경은 원기39년 동선 교재로 보급되었다.
김경흔은 조선조 선조 때 충청도 비인 출신 도인으로
50년간 도통 공부를 하는 방편으로 여러 주문을 사용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병마를 몰아내는 주문 「훔리함리 사바하」를 송하다가 비로소 공부가 열렸다.
신명의 계시를 받아 그는 주문 머리에 「太乙天 上元君」(하늘의 으뜸 가는 임금님)을 붙여 염하였으나, 이 주문으로 완전한 도통을 얻지 못하고 다만 『태을경』이라는 책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옴」이란 완전 음이다.
완전을 의미하는 母性에 대해 서양에서는 어머니를 「맘마」라 한 것이라든지,
우리들이 「엄마」라 하는 것도 결국은 옴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것은 송아지가 어미소를 부르는 「음매애」하는 소리와 닮았으며
증산이 소 울음을 뜻하는 표의 글자 「소울음 훔, 소울음 치」와 다름이 아니다.
증산은 「훔치」에 대해 「천지 부모를 부르는 소리니라.
송아지가 어미를 부르듯이 창생이 한울님을 부르는 소리」(증산도전 7편 58‥3~6)라 하였다.
〈목우십도송〉에서 오도과정을 소로 상징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 한민족의 대예언서인 『격암유록』에는
깨달음을 「牛鳴地」(우명지‥소 울음 우는 곳)로 표현하였다.
〈태을주〉 주문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기저기 너도 나도 道를 깨치네.
하늘의 으뜸 가는 임금님이시여,
도시에 와 큰소리로 우리 중생들을 꾸짖어
어서어서 깨우쳐 주소서」
(죻웎죻웎 太乙天 上元君 죻빇웎耶都來 죻빇喊빇 娑婆訶)이니,
이는 세상 사람들의 깨우침을 열망하는 염원송이다.
도를 깨달음은 꼭 심심 산중의 토굴이나 선방만 아니요
시중에서도 도인이 나온다는 말이요,
그때야말로 우리 모두가 주세불이 되며 미륵불이 되며 신이 되며 하늘이 되는 신나는 세상이다.
미상불, 대종사께서 전망하신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
콩 튀듯이 도인이 쏟아지는 천여래 만보살의 大明世界 전반세계 미륵세상 용화회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