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군 이첨 선생은
중종의 증손자이자
덕양군 이기의 손자이며,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獜)의 장남이다.
또한
덕양군 (이기 李岐) 선생은
1524년(중종 19년) 음력 9월 조선의 제11대 중종과 후궁 숙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2대 인종은 덕양군의 이복 형이며,
13대명종과 덕흥대원군(14대 선조의 친아버지) 등은 이복 동생이다.
덕양군 (이기 李岐) 선생은
풍산군, 풍성군, 풍천도정, 풍해수를 두었으며,
장남이신 풍산군 이종린(李宗麟)[1538~1611]선생은
1581년 덕양군 이기선생이 돌아가자 관례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었다.
소덕대부로서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고 사옹원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임하였었다.
궁내동 묘역의 풍산군 묘는 군부인(郡夫人) 박씨의 합장묘이다.
장남 풍산군 이종린(李宗麟)[1538~1611]은
장남 귀성군[이첨(李瞻)], 차남 귀천군[이수(李晬)], 삼남 귀원군, 귀봉군, 귀산군, 귀흥군을 두었다,
귀천군 이수선생은
봉래군 이형윤(李炯胤),
봉원수 이형준(李炯儁),
봉산군 이형신(李炯信),
봉주정 이형길(李炯佶),
봉창수 이형엄(李炯儼),
하계군 이형륜(李炯倫),
봉성령 이형중(李炯仲),
봉풍령 이형임(李炯任),
봉흥도정 이형좌(李炯佐),
봉천령 이형우(李炯佑),
봉계도정 이형건(李炯健),
봉강도정 이형급(李炯伋)의12 아들을 두어
명문지족으로 후손이 번족하고 현달하였다.
구천군 (龜川君) 이수(李睟, 1569년 ~ 1645년)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원(明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에 임명되었었고.
1592년 임진왜란때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한 뒤 선전관이 되었었다.
1604년 선록(璿錄)을 정리하는 데 참여하고, 당상관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올랐었다.
1613년(광해군 5년) 정의대부(正義大夫)가 되면서 구천군(龜川君)에 봉해지고,
1614년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올라 이듬해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겸하였다.
1617년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고 윤선도(尹善道)를 옹호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621년 풀려났다.
1623년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라 다시 사옹원제조와 종친부(宗親府)를 겸하여 관장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여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올랐으며, 정묘호란때에는 임금을 강화도로 호종하였다.
그 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 자리에 올랐다.
사후
사후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이수선생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에 위치하고 있다.
1980년 6월 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이수선생의 형인 귀성군 이첨은
궁내동에 모셔저있는 이수선생 묘역에 있으며
맨아래 중종왕자 덕양군 이기(李岐)의 묘이고 뒤로 손자 귀성군, 귀천군 묘와 증손 봉래군의 묘가 차례로 역장으로 모셔져 있다.
원래는 덕양군 묘와 손자 귀성군 이첨(龜城君 李瞻)의 묘 사이에 아들 풍산군의 묘가 있었으나 그 자리가 왕이 나올 묘 자리라 하여 특히 왕실에서는 모시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 사실을 밀고 받고 조정에서 조사를 나왔었으나 사전에 묘를 다른 곳으로 옮겨 위기를 묘면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만회공 권 득기 선생은
별호:중지(重之), 만회(晩悔)
출생일1570년(선조 3)
사망일1622년(광해군 14)
저서: 만회집, 연송잡기
경력:예조좌랑, 공조참판(추서)
조선시대 예조좌랑,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도산서원
만회집
연송잡기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 권박(權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령 권덕유(權德裕)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권극례(權克禮)이며, 어머니는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공 권극관(權克寬)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1618년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죽은 뒤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회집』·『연송잡기(然松雜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송자대전(宋子大全)
만회집(晩悔集)
포저집(浦渚集)
잠치집(潛冶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