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사람들은 역사를 조망하면서 훗날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될, 또는 초래할 수도 있었을 지도자나 조언자의 판단을 보게 될 때마다 왜 저런 결단을 내렸을까하고 의아해 하곤 합니다.
예루살렘 왕 기 드 루지냥은 펄펄 끓는 사막지대로 중무장한 군대를 행군시켰다가 자신의 왕국을 거의 파멸까지 몰고 갔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결의했다가 자신의 몰락을 앞당겼습니다. 나치 독일군은 해안가에서 연합군을 포위하고도 진격을 미루었다가 다 잡았던 적군을 놓쳐버렸습니다.
<하틴 – 알모그 촬영>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후세의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역사 속의 인물의 행위의 적합함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만, 정작 그 역사 속의 인물들은 앞날이 컴컴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확실성에 놓인 함정을 모두 피해가고 극복할 수 있는 사나이가 있다면, 그는 역량과 재능이 굉장히 뛰어나거나, 아니면 운이 어마어마하게 좋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발트 십자군의 시대로 돌아와서 마조프세 공(公)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폴란드 영지에 대한 프루스 족의 대대적인 침입은 콘라드 1세가 프러시아라는 벌집을 건드린 것에 대한 업보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발등에 떨어진 불이고 보면 이 것을 해결하는 것은 당면 과제였습니다.
<마조프세 공 콘라드 1세>
그런데 크리스티안 주교가 이끄는 프러시아 교회는 이교도에 대한 개종의 성과가 별로 없이 순교자 명부에 올라가는 성직자의 숫자만 늘리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숫자도 적은 도브진의 형제기사단은 프루스 인에 대한 군사적 성과가 별로 없이, 질척하고 컴컴한 숲 속에 중무장을 하고 들어갔다가 참패하는 전술적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도브진 기사단의 문장>
폴란드의 다른 대공들은 이교도 개종이라는 콘라드 1세의 “성스러운” 십자군 정신에 동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관심사에 더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스페인의 칼라트라바 기사단(Order of Calatrava)에도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수많은 시도 중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성모마리아가 소유하셨다는 독일인들의 기사단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독일인들은 프루스 인들을 막아주었고 마조프세의 북쪽 국경을 안정시켜 주게 됩니다.
<튜턴 기사단의 문장>
그러나 그 당시에도 마조프세 공이 이 기사단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이유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1) 증대되는 독일인의 영향력
발트 지역에서 상인이나 장인, 성직자, 또는 용병으로서 활동하는 독일인의 수는 계속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폴란드의 성직자들은 거의 독일인이 아니면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온 폴란드 인들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가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이에 있었고, 종종 폴란드나 그 주변지역의 정세에 관여하곤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2세기에 폴란드의 정세에 군사적 간섭을 시도한 바가 몇 차례 있었고, 1224년에 발트해 동부지역의 리보니아와 프러시아를 제국직할령(=라이히스-프라이하이트Reichsfreiheit)로 선언한 것 등이 그것입니다.
<독일상인들 – 이 일러스트는 15~16세기 경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이 시점에서 비 독일계 통치자들에게 독일화의 추세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인종주의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잡혀있는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 튜턴 기사단의 규모
팔레스타인의 몽포르(Monfort, = 쉬타르켄베르크Starkenberg)의 성채에 본부를 둔 이 기사단은 소 아르메니아, 슬로베니아, 튀링엔, 헤쎈, 프랑켄, 바이에른, 그리고 티롤 등 다양한 지역에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헝가리와 루마니아 지역에 전초기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당시의 기사단장이었던 헤르만 폰 살차(Herman von Salza)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밀접한 조언자로서 제국제후(=라이히스퓌어스트, Reichsfürst)의 신분으로 대접 받고 있었으며 황제와 교황 사이의 분쟁을 중재해 준 뒤에는 교황의 신임까지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기사님들은 돈도 많은데다가 이른바 “빽”까지 든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개 소국의 대공이 움직이기엔 벅찬 상대인 것입니다.
<비범한 튜턴 기사단의 4대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 그의 영도 하에 기사단은 교황의 신뢰를 얻었고 유럽 각지에 재산을 산더미처럼 불렸으며, 발트 지역에서 미래의 기사단 국가의 기틀을 닦게 된다.>
3) 트란실바니아에서 헝가리 왕과의 분쟁
1211년 튜턴 기사단은 동유럽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그들의 전초기지를 세웠는데, 이는 헝가리 왕 안드라시 2세(András II)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 호전적인 투르크 계 유목민족인 쿠만(Cumans) 족의 침입을 막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승리의 유목민 – 이반 빌리빈의 일러스트>
그러나 그들은 쿠만 족과 싸우는 한편으로 자신들이 확보한 지역에 독일인들을 데려와 정착시키는가 하면, 헝가리의 지역 사제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교황청으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고자 시도 했습니다.
자신의 국경선에 독일인들로 구성된 종교적인 자치구가 생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헝가리 왕은, 이미 정착해 버린 독일인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나 튜턴 기사단은 무력으로 쫓아버렸는데,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마조프세의 콘라드 1세가 기사단을 불러들인 1225년 이었습니다.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의 성채>
이러한 불안요소들은 수면 아래에서 잠들고 있다가, 14세기 초가 되어서야 기사단의 그단스크(Gdansk) 대학살이라는 모습으로 화려하게(=잔혹하게) 스타트를 끊게 됩니다. 그러나 콘라드 1세가 80년 뒤에 벌어질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에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좀 무리일 지도 모릅니다. 당시 그의 결정은 불가피한 면도 있었고, 그가 위험요소들을 모두 고려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교도 보다는 같은 기독교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콘라드 1세나 튜턴 기사단이 아니더라도, 당시 드랑 나흐 오스텐 (Drang nach Osten, 독일인의 동방으로의 분출)이라는 역사적 흐름은 다른 대리인을 찾아내서 저 멀리 나치 도이칠란트 시대까지 이어지게 되는 폴란드-독일 간 분란의 씨앗을 대신 뿌렸을지도 모릅니다.
<"단치히는 독일이다! (DANZIG IST DEUTSCH)" 나치 도이칠란트의 단치히(Danzig, = 그단스크) 합병 기념 우표>
아무튼 튜턴 기사단은 마조프세 공의 제안을 받은 후에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들로서는 별로 아쉬운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13세기 초반 기사단의 주요 관심사는 북방의 컴컴하고 축축한 숲 속에 사는 폭풍의 신을 섬기는 야만족들이 아니라, 머나먼 동방의 황량한 사막지대에 자리잡은 성지와 유일신을 믿는 무슬림들에게 있었습니다. 원래 헤르만 폰 살차가 마조프세 공의 제안에 반응한 것은 기사단의 궁극적인 목표, 즉 성지 탈환을 위한 중동 지역에서의 더 크고 더 중요한 전쟁을 대비하여 자신의 기사들을 훈련시킬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 성지를 두고 벌어진 유일신을 믿는 두 문명 간의 전쟁>
이 시점에서 다른 군주의 간섭을 받지 않는 그들만의 자치권을 은밀히 원한 것은,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을 들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험 정도라 할지라도 기사단장은 이 점은 철저히 하고 넘어가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중동지역에서 힘의 균형은 무슬림들 쪽으로 기울고 있는 추세였습니다. 더군다나 성전을 위해 창설된 기사단들의 존립은 교황과 군주의 호의와 기부에 상당히 의존하는 감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것들을 잃는다면, 기사단은 크나 큰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견지명? – 100년 후 모 종교 기사단의 최후>
그러므로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는 법, 기사단 단장인 헤르만 폰 살차와 그의 형제기사들은 독일인스럽게 치밀하고 계획적인 행보를 걷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프러시아에서의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군사적으로 도브진의 형제 기사단이 범한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따분하기 짝이 없지만 지극히 효과적인 대 프루스 인 전술을 고안해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후원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움직여 기사단이 마조프세 공으로부터 받은 헤우민스키 지역과, 앞으로 자신들이 정복하게 될 프러시아에 대한 소유권을 황제의 이름으로 확실하게 인정 받고 반 독자적인 지위를 손에 넣고자 하였습니다. 이 것이 성공하면 이번엔 교황의 이름으로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하고, 그것을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금인칙서>
첫댓글 간지의 튜튼기사단 이제 멋진 학살을 보여주겠군요(......)
느려요... 빨리 펜대(?키보드)를 놀리시라고요. ㅎㅇㅎㅇ~
좀더 신속한 연재~!!! 너무 재미있어요 ㅜㅜ;;;
하앍~ 다음 얘기가 기대되는군요~.~
다음 글 기대할께요. ^^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__) 앞으로 튜턴기사단의 프러시아 캠패인(1~2개 게시글) - 첫 프러시아 봉기와 크리스트부르크 조약 - 프러시아 대 봉기 - 프러시아 3차봉기와 종말, 대략 이런 식으로 가면서 중간중간에 그 당시 살았던 실존 인물 두명 (골린의 기사 마르틴과 프루스 민족의 영웅 헤르쿠스 만타스)에 대한 이야기를 쓴 다음 리투아니아 이야기로 13세기 편을 끝낼까 생각 중입니다. (잘될지는..)
몽골에게 밀린 쿠만족이 밀려 온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