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긴 어게인(2014)
나는 모태에서 음악을 만났다. 할머니가 기독교에 귀의한 뒤부터 우리가족은 타의로 교회에 나갔다. 고향교회에는 풍금이 한 대 있었지만 연주자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가는 그레고리안 성가풍의 아카펠라였다.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보다 음악이라는 것을 일찍 접해서인지 초등학교 시절에는 음악시간이 좋았고 아이들 앞에서 노래도 불렀다.
찬송가를 접한 뒤 음악은 짝사랑이 되었다. 50년 넘게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성가대를 하고,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강박은 더욱 심해졌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학문의 깊이가 더해가면서 독서하는 선비같은 삶을 꿈꿨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교양필수인 시․서․화와 음률도 즐기고 싶었다.
1970년대만 해도 대중음악은 천시 받는 풍조가 남아 있었다. 젊은이들의 잘못된 행실을 비판할 때 ‘유행가요나 찍찍 불러대며 다니고... ’라는 문장이 들어갔다. 교회의 테두리에서만 자란 나는 대중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이전까지는 라디오도 없었다. 다만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새마을지도자님이 동네 스피커로 틀어주는 라디오가 세상과 대중음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당시 동네스피커로 배운 대중음악은 송창식의 ‘왜불러’와 ‘피리부는 사나이’, 신중현의 ‘미인’, 남진과 하춘화의 ‘잘했군 잘했어’, ‘님과 함께’ 등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도 라디오가 생기면서 음악은 일상이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동네 몇몇 집에서 텔레비전을 구입하면서 가수의 얼굴과 공연장면까지 보게 되었다.
이런 저런 기회로 대중음악을 접했지만 실상 나는 부르고 즐기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것은 아마 대중음악을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교회교육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중학교 때 학교에서 배운 가곡을 즐겨 불렀다. 등교하며 동네 산등성이 위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 겨울철 김양식 일을 하면서도 가곡을 흥얼거렸다. 초등학교시절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 나가 불렀던 포스터의 ‘기러기’, 중학교에 진학해서 배운 ‘산타루치아’, ‘그네’, ‘그집앞’, ‘비목’, ‘가고파’, 중3 때 교내합창대회에서 지휘를 하며 불렀던 ‘꿈속의 고향’ 등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팝송을 즐겨 들었다. 학교에는 팝송대가들이 몇 명 있어서 외국 팝 가수들의 근황과 아이들의 음악에 대한 욕구를 해소해주었다. ‘팝송백과’는 영어를 배운다는 핑계로 집어든 바이블이었다. 실제로 팝송 덕분에 영어와 친근해지고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진학하여 교사가 된 친구도 있었다. 그 때까지도 교회주변만 어슬렁거리던 나에게 성환이라는 친구가 ‘비지스’를 소개해줬다. 다른 친구는 친절하게도 ‘펑키타운’이라는 팝송을 한글로 써서 주었다. 그것이 나의 팝송 입문이었다. 그 뒤로 비지스 외에도 ‘비틀스’나 ‘이글스’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고등학생들이 감성을 파고들었던 ‘사이먼과 가펑클’, 리버 오브 바빌론으로 흥을 돋웠던 보니엠도 즐겨 듣게 되었다. 개중에는 청년층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른 산울림의 ‘아니벌써’나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를 흥얼거렸고, 또 일부는 1978년에 시작된 대학가요제 앨범을 구하여 흡사 보물처럼 아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의 가슴을 훔치기에는 미흡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공장에 다니다가 재수를 시작했을 무렵 충남 당진에서 상경한 재수 동기는 나를 숙대 입구의 음악다방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비엔나커피와 스모키, 스콜피언스를 알게 되었다. 지루했던 재수생활을 끝내고 입학한 대학은 보수적인 기독교대학이었다. 학생들 거의 전부는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이었고 그 중 상당수는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숙사 각 방에서는 찬송가소리와 기도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부르고, 전영록이 ‘불티’와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불러재꼈지만 우리학교 담벼락을 쉬 넘지 못했다. 서양사를 강의했던 교수가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젊은 연인들’이라는 곡을 듣고 와서는 ‘참 좋더라’라고 한마디 한 것을 놓고 ‘과연 옳은가’로 토론을 했을 정도로 꽉 막혔던 집단들.
내가 열린 마음으로 대중음악을 듣게 된 것은 아마 군대를 다녀오면서라고 생각된다. 회식자리에서 불렀던 대중가요도 의식을 흔들었지만 상병 무렵 하교대(하사관교육대)에 입소하여 훈련받던 중 들었던 이선희의 ‘J에게’라는 노래는 찬송가와 가곡, 팝송에만 머물렀던 나의 의식을 송두리째 바뀌 놓았다.
사회변혁과 진보적인 것에 꽂혀 있던 20대 후반에는 의무감과 허위의식에 경도되어 운동가요와 로큰롤만 들었다. 이문세의 발라드나 박남정, 양수경, 김완선의 노래는 한 수 아래로 치부했다. 핑크플로이드나 레드 제플린까지는 못 갔어도 당시에 떠오른 한국최고의 락그룹 시나위와 들국화정도는 들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젊은 시절의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찾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30대 후반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까지도 전인권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나 ‘사랑한 후에’는 절창으로 여겨졌지만 내 귀에는 거슬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음악들에서 벋어나니 찾아갈 곳은 클레식과 포크, 발라드였다. 그렇다고 젊은층이 열광하는 힙합으로 가기에는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요즘엔 1970년대 뽕짝도 귀에 꽂힌다. 방주연의 ‘내곁에 있어주’,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가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비긴어게인(2014)은 히트한 음악영화다. 예전에도 음악영화는 있었지만 좋은 음악영화는 대체로 2000년대 전후 많이 나왔다. 나의 수집목록에도 음악영화가 많다. 감상 우선순위에서도 역사영화 다음이 음악영화다. 비긴 어게인은 근래 두세 번씩 반복해서 본 거의 유일한 영화다. 원스나 어거스트 러쉬도 감명 깊게 봤고 클래식음악을 주제로 한 코러스도 즐겨봤지만 두 세 번씩 보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음악으로 요란 떨지 않는 것이 강점이다. 지나친 감정이입이나 억지 감동도 이끌어내지 않는다.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밑밥삼아 좋은 음악이 무엇이고 음악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말한다. 음악에 대한 공통의 가치관을 매개로 만난 그레타와 댄에게서 러브라인이 형성될 만도 하건만 영화는 그런 유혹을 과감히 뿌리친다. 그래서 매력 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영국에서 활동했던 싱어송라이터 그레타가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맺은 남자친구 데이브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둘은 자신들의 음악을 펼칠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뉴욕에 정착했지만 그들에게 미국은 꿈의 나라가 아니었다. 데이브는 금세 대중적 인기에 영합해버렸고 나중에는 딴 여자에게로 돌아서면서 그레타까지 버렸다. 남자친구에게서 버림받고 거리로 나온 그레타,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음악만 남은 절망의 바닥에서 댄을 만난다.
명문대를 졸업했고 그레미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했던 음반제작자 댄. 당시 댄도 예기치 않았던 아내의 외도로 방황하며 오랜 슬럼프에 빠져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동업자에게서 해고까지 당한 처지. 음악이 삶의 모든 것이었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허벌판에서 두 사람은 음악으로 만나 음악으로 희망을 찾고 음악으로 일어선다. 음악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음악이 꿈인 사람에게는 돈이 없어도 음식이 없어도 충분히 배부르고 행복할 수 있다. 그레타의 꿈이 그랬고 댄이 그런 사람이었다. 재밌는 것은 두 사람이 음악으로 일어서는 장소가 메이저 음반사나 대형공연장이 아니라 거리와 낡은 건물의 옥상이라는 사실이다. 헐리우드의 통속적 셈법이라면 그럴 수 없다. 댄이 메이저 음반사로 복귀하고 그레타가 신데렐라가 되어야 맞다. 그들은 거친 광야같은 녹음실에서 그레타의 음악을 멋지게 살려내고 댄의 천재적인 연출력을 회복시키며 댄과 딸, 댄 부부의 소통과 극적화해를 이끌어낸다. 할렐루야!
나는 재결합의 희망을 안고 찾아간 남자친구의 공연장에서 가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화해를 포기하는 그레타의 모습과, 그레타가 되돌려준 이어폰으로 별거했던 아내와 벤치에 앉아 하나의 이어폰으로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이 감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진실한 삶과 진실한 음악이 결국에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20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