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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은 공묘(孔廟)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패방(牌坊) 중의 하나이다. 맹자가 공자를 백이, 이윤, 유하혜와 비교하면서 공자는 이세 賢人을 모두 합한 것과 같다고 평가한 말에서 따왔다. 『맹자』만장편에 “孔子는 聖條理也오 玉振之也者는 終條 之時者也시니라 孔子之謂集大成이시니 集大成也者는 金聲而玉振之也라 金聲也者는 始理也니 始條理者는 智之事也오 終條理者는 聖之事也니라” (공자는 聖人으로서 때를 맞춘 사람이시라. 공자가 모아서 크게 이루심을 이르니 모아서 크게 이루었다는 것은 쇠로 소리내고 옥으로 거둠이라. 쇠로 소리낸다는 것은 조리를 시작함이오, 옥으로 거둔다는 것은 조리를 마침이니, 조리를 시작하는 것은 智의 일이오, 조리를 마치는 것은 聖의 일이니라). 聖時門과 大成殿 모두 이 글귀에서 따왔다. > |
『맹자』에는 공자에 대해 중국 역사에서 성인과 현인으로 추앙받는 그들 모두를 ‘집대성’한 성인으로 ‘조리 (條理)의 시작과 끝’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집대성,시(始)조리, 종(終)조리’란 말이 나왔다 .
『논어 (論語)』에는 공자의 인격과 학식을 나타내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수제자인 자공은 공자의 학식에 대해서 “선생님의 담장은 여러 길의 높이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들의 풍요로움을 보지 못하는데 그 문으로 들어간 자가 적은지라”고 하였다.
공자의 학문이 지고함을 나타내는 만인궁장 (萬仞宮牆)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
이후 한 (漢)나라(BC 202∼AD 220) 가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공자는 동아시아유교문화권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 만세사표로 존숭되었다.
사당인 공묘는 당나라 때 왕의 반열인 문선왕 묘로 추존되었으며, 원나라 이후로는 문묘로 불렸다. 중국의 역대 황제는 공묘를 방문하여 비석 세우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며 청의 강희제가 세운 비석은 6.5M 높이에 무게는 35톤에 달한다.
유학을 부흥시킨 남송의 주자 (朱子 : 1130~ 1200) 는 공자에 대해 ‘앞서 가신 성인을 잇고 후학들을 위해 학문의 길을 열어주신 (繼往聖開來學) 성인이라’며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 ·순임금보다 낫다고 평가하였다.
6藝 : 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 예절 ·음악 ·활쏘기·말타기·글 ·셈)
공자는 군자가 지향해야할 바를 『논어』술이편에서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 道에 뜻을 두며, 德에 웅거하며, 仁에 의지하며, 藝에 노니라’고 하였다.
<사진 : 역대 황제들이 공자를 추모하는 비석을 모아 놓은 비각>
『주례 (周禮)』 地官司徒(지관사도)편에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벼리로서 六德과 六行과 六藝를 거론하고 있는데 六藝는 예 (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예 (藝)를 예·악·사·어·서·수라고 하였다.
이렇게 공자가 동양 정치사상과 철학의 종주로서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저작물과 그 속에 담긴 사상때문이다.
사마천은『사기』에서 공자의 저작물에 관통하는 ‘육예 (六藝)’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함에 제후들이 방자히 행동하였다. 공자는 예 (禮)가 폐하고 악 (樂)이 무너짐을 슬퍼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를 찾아서 왕도를 이르게 하여 난세를 바로잡아 바른 데로 돌려 놓으려 하였고, 글로 나타내어 천하를 위하여 의법을 짓고, 육예 (六藝)의 기강을 후세에 드리웠기에 공자세가 제17을 지었다.”고 하였다.
사마천이 말하는 육예란 공자가 편찬하거나 지은 글인 六書(시·서·예·악·역 ·춘추)속에 담긴 벼리 곧 기강을 말한다.
그러므로 육서를 익힌다면 “역(易)은 천지 ·음양·사시 ·오행을 밝혔기에 변화를 아는데 장점이 있고, 예(禮)는 인륜을 세우는 벼리이기에 실천하는 데에 장점이 있고, 서(書)는 선왕의 일을 기록했기에 정사를 펴는 데에 장점이 있고, 시(詩)는 산천 ·계곡 ·금수 ·초목 ·동물의 암수와 새의 암수를 기록했기에 풍속을 살피는데 장점이 있고, 악(樂)은 사람이 서야 할 바를 음악으로 담았기에 화합하는 장점이 있고, 춘추(春秋)는 시비를 분별하였기에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장점이 있다.”고 하였다.
한나라는 유교를 국교로 세운 이후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焚書坑儒)로 인해 유실되거나 남은 전적들을 재정리하였는데 이때 공자의 저작이 세상을 다스리는 벼리가 되는 글이라는 뜻에서 경 (經)을 붙여『시경』『서경』『역경』『악경』이라 하였다.
이 가운데 『예』는 글이 많이 유실되어 별도의 해설을 붙여 『예기』라 하였으며, 공자가 일일이 악보를 채집하여 기록하였다는 『악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사상 ·철학서 시경 ·서경 ·역경
『시경』은 공자가 당시 유행하던 노래 3천여 편을 모아 산시 (刪詩)라는 편찬 과정을 통해 305편으로 정리하였는데 국풍 ·소아 ·대아 ·송의 네 편으로 분류되어 있다. 공자는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덮을 수 있으니,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 : 논어)”고 하였다.
공자는 시를 매우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시 삼백 편을 외우면서 정사에 임해서 통하지 못하며, 외국의 사신으로 나가 상대방을 대할 줄 모른다면 무엇에 쓰겠는가(논어)”라 하였고, 아들에게는 “시의 주남,소남 편을 공부하지 않으면 담장을 앞에 두고 서있는 것과 같다(논어)”고 하였다.
『서경』은 요 ·순임금으로부터 하 ·은·주 삼대의 역사를 다룬 글이다 .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유실되었다가 복원되다보니 위서 (僞書) 논란이 분분한 책이다. 공자의 사당 벽에서 나왔다 하여 벽경 (壁經)이라 부르고, 또는 상서 (尙書)라고도 불렸다.
위서 논란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정치사상 ·철학이 잘 반영되어 있는 유학경전으로 유교문화권 위정자의 필독서였다.
『역경』은 일반적으로 주역 (周易)이라 부르는 책이다. 복희씨가 그린 64괘에 주 (周)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글을 달아 완성시켰다는 의미에서 『주역 (周易)』이라고 한다. 공자가 죽간을 맨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역경』을 탐독했다 하여 위편삼절 (韋編三絶)이라는 말이 나왔다 .
공자는 64괘와 문왕과 주공의 글에 대해 ‘찬술만 하지 창작은 아니한다(述而不作)’며 해설서를 달았는데 이것이 십익전 (十翼傳)이다. 『주역』은 공자의 십익전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십익전에는 공 자의 정치사상과 철학의 핵심이자 천도 (天道)라는 유학의 근본이치가 담겨 있다.
공자의 십익전으로 인해 『주역』은 유학을 포함하여 동양 정치사상 내지 철학에서 최고 학문, 首經의 지위를 차지하여 왔다. 이에『주역』 해설서만 3,000여종에 달한다고 한다 .
공자의 마지막 저술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여 천하의 의표로 삼도록 하였다는 『춘추』이다. 공자가 “나를 아는 자도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자도 춘추이리라 (知我者도 其惟春秋乎여 罪我者도 其惟春秋乎인저)”고 할 만큼 공자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경전이다.
사마천 또한 “춘추는 의로움을 말하게 하는데, 난세를 다스려 바름을 회복시키는 것은 춘추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춘추』에서 나온 춘추필법 (春秋筆法)이란 말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준엄하게 기록하는 논법’을 상징하게 되었다.
한편 주자는 『예기』 속에 들어있던 『대학』과 『중용』을, 『맹자』『논어』와함께 사서 (四書)로 묶고,『시경』『서경』『역경』을 삼경으로 묶고는 『서경』을 제외한 6서에 주석을 달았다.
이후 사서삼경은 유학을 공부하는 선 비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경전이 되었다. 주자가 유학경전을 사서삼경 체계로 정리하면서, 육예는 선비가 두루 갖추어야 할 과목인 예 ·악· 사·어·서 ·수(禮樂射御書數)를 일컫는 말로 바뀌었다.
<출처 : 「왜 주역이고 공자인가」 2010년 발간>
첫댓글 감사합니다
태산홍모를 알려고 하다가 사마천을 알게 되었고 그 때 사마천이 쓴 보임소경서에서 자신의 심정을 쓴 것을 읽고 너무도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