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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의 물길 따라 신륵사의 종소리를 찾아
여주지역 유적답사(신륵사. 폐사지 고달사터)
예로부터 여주는 남한강의 물길이 빚어놓은 퇴적평야가 잘 발달해 있어 질 좋은 쌀의 생산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는 사옹원 분원이 있어 도자기로 이름난 곳이다.
여기서 생산된 물품들은 주로 배편을 이용했다. 옛 영화는 사라진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조포나루와 이포나루는 한때 서울의 마포나루와 광나루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로 꼽힐 만큼 물동량이 많았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강가에 있는 계신리 마애불과 신륵사 전탑이다. 이들은 남한강을 굽어보며 물길을 오르내리던 뱃사공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다.
땅 좋고 물 맑은 곳이라 그런지 여주는 명성황후를 비롯해 9명의 왕비를 낸 곳이기도 하고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땅(영릉)이기도 하다.
게다가 현대 불교미술조각의 으뜸을 달린다고 할 수 있는 목아박물관이 있고,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의 활기찬 영화를 엿볼 수 있는 고달사터의 돌조각 작품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
조상들이 남긴 전통문화유산을 제대로 보고 맛을 즐기려면 지식과 함께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에는 문서기록물도 있지만 우리가 답사하면서 주로 접하게 되는 것은 건축물과 조각품, 도자기, 금속공예품과 그림들이기 때문이다.
전통건축물이라면 기와집을 연상할 것이고, 조각품들이라면 불상이나 무덤 앞의 석물들을 떠올릴 것이며,
도자기라면 흔히 청자와 백자를 먼저 꼽아볼 것이고, 금속공예품이라면 사리함과 장신용 귀금속 등을 생각할 것이고, 그림이라면 붓과 먹의 유연함과 농담(濃淡)을 살려낸 산수화와 인물화, 풍속화 등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문화와 서구문화에 익숙해진 요즈음 사람들에게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은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옛날 집들을 보면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단청을 보면 지나치게 화려한 것 같기도 하면서 영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답사를 다니다보면 그 속에 담긴 친근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맛보게 된다. 우리 내면 깊숙이에 잠겨 있던 전통과 문화의식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가장 쉽게 접하는 우리문화유산인 전통건축물을 예로 들어보자
① 서양건축물과 우리나라 전통건축물은 우선 외관상으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주재료 / 지붕모양 / 대문형태 / 집안구조 / 마당과 정원의 형태 / 침실구조 / 마루 / 난방방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기거하는 집인데 이렇듯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동서양이 이렇게 다른 집의 모양이 나왔을까?
첫째는 환경이다.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자기들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다보니 주변 환경에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구의 북반부에 위치하면서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다. 하지만 여름과 겨울이 길어 난방과 함께 냉방 문제도 함께 고민해야 했기에 집을 정남향집으로 짓고, 방바닥은 온돌을 깔면서 마루라는 것을 만들었다.
방문을 남쪽과 북쪽에 동시에 설치하였고, 산이 많은 지형이라 주로 목재를 이용해 집을 지으면서, 지붕을 두껍게 만들고 처마를 길게 뺐으며, 여름에 비가 많다보니 마당은 그대로 텅 비게 놔두거나 작은 꽃들을 심는 정도였다.
이렇게 해야만 습기가 많은 여름철을 시원하면서도 보송보송하게 지낼 수 있고, 겨울에는 따끈따끈하면서도 햇빛을 집안 가득 받아들여 이중 난방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도시에서의 현대건축물인 아파트는 어떤가? 어디에 초점을 맞춰 지어졌을까? 실용성과 경제적 편익이다.
땅값이 비싸 적은 면적에 많은 공간을 확보하려다보니 자꾸만 위로 높아진다. 아파트는 현대 건축물이자 서구식 건축물로 입식 생활자 중심의 거주지이다. 난방도 입식생활자 방식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온돌난방을 해온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서양집에 없는 온돌구조로 설계되었다. 또한 전통 건축물처럼 정남향의 아파트를 가장 선호한다.
요즈음에는 한지의 공기투과성과 보온효과가 뛰어나다는 점을 재발견하여 이중 창문을 설치하고는 안쪽에 한지를 바른 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날까? 서양의 생활방식이 세련된 듯하고 편리한 것 같아 도입했는데 살다보니 불편한 점이 많고 여러 단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아파트가 우리 환경에 꼭 들어맞을 정도로 적합한 생활주거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한편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높은 건물을 유지하려면 유지.보수비용이 만만치 않다. 고비용을 물어가면서 살려고 하다보니 생활은 풍족해진 듯한데 현대 도시인은 늘 바쁘고 쫓기는 듯 산다.
이것이 요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건축물 하나를 보면서 바로 우리들이 사는 모습까지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적답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살아온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② 전통건축물이라고 하여 다 같은 모습은 아니다. 사람의 모습이 각각 다르듯이 집도 각각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와집이라고 하여도 다 같은 형태의 기와집이 아니다.
불교 건축물인 절집과 유교 건축물인 사당과 조선시대의 궁궐,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가옥(살림집)이 다 다르다.
• 절집 → 사람들의 소망, 믿음을 들어주는 곳이다 →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워 다 품어줄 것 같이 지어야 한다 → 오는 사람 막지 않고(來者不拒),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去者不追). 아무나 오고갈 수 있어야 한다. → 대도무문(大道無門), 곧 일주문이라고 하는 문틀은 있지만 문짝이 없다.
• 궁궐 → 왕의 살림집이기도 하지만 정치공간의 의미가 훨씬 더 크다 → 강한 권력을 상징하는 권위와 위엄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권력은 아무나 함부로 넘볼 수 없게 한다. → 육중한 삼문(예: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통과해야만 조정에 닿을 수 있다.
• 살림집(민가) → 가족들의 단란한 휴식처이다 → 함께 어울려 사는 동네 속의 한 집이다. → 밖에서 부르면 쉽게 들릴 수 있는 구조이다 → 민가의 대문, 삽짝문, 제주도의 통나무문
③ 건축물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알려면 우선 주변 환경을 살펴야 한다. 그러려면 풍수지리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명당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찾아가는 신륵사나 계신리 마애불은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남한강은 조선시대에 배편을 이용한 중요한 물류 이동로였다.
하지만 배에 짐을 잔뜩 싣고 가다가 도적들에게 강탈당할 수도 있고, 급류에 휩싸여 재난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막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오가는 길 아무 탈이 없도록 잘 보살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 기원의 표상이 바로 계신리 마애불과 신륵사 다층전탑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 속에 이러한 깊은 뜻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유적답사는 바로 이러한 의식을 일깨우면서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은 물론 자연친화적 순리성과 과학성, 생활철학을 발견하여 오늘에 접목시키는 지혜를 키우는 데에 있다.
계신리 마애불(磨崖佛)
산이 많고 바위가 많은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큰 바위나 절벽에 선각이나 돋을새김의 기법으로 부처나 보살상들이 많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애불이라고 부른다.
계신리 마애불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8호인 계신리 마애불은 높이 223cm의 크기로, 남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편편한 벼랑바위에 도드라지게 새긴 것으로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원만한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고 양 볼이 살진 모습으로 친근감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도 큼직하게 표현한 육계와 3중의 원형 두광과 그 둘레에 새겨진 화염문은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연꽃대좌위에 당당히 서 있는 불상은 얇게 드리워진 옷자락이 두 다리에 살짝 붙어 있어 생생하고 탄력감이 넘치게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불의(佛衣)가 양쪽 팔에 걸쳐져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U자형을 이룬 점이나 허리에 두른 띠매듭과 왼쪽 어깨를 감싼 가사의 표현 또한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리고 왼손은 옆으로 펼친 특이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영릉(英陵, 세종대왕릉, 사적 제195호)
옆의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과 함께 흔히 영녕릉이라고 부른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합장릉이다.
효심이 깊었던 세종의 무덤은 본래 아버지인 태종의 능침이 있는 지금의 서초구 개포동 뒷산인 대모산에 있었으나 자리가 좋지 않아 예종 1년에 옮기게 된다.
천하의 명당이라고 알려진 영릉의 지세는 정남향으로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봉황이 날개를 펴서 알을 품듯 영릉을 품고 있다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라고도 하고, 용이 돌아와서 정남향으로 영릉을 쳐다보기에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도 한다.
혹은 모란꽃이 반쯤 피어 있는 듯한 모습의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의 명당으로 ‘가히 만년 동안이나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조선 왕조가 1백년은 더 유지가 되었다는 풍수학자들의 얘기가 있다.
이곳은 본래 이계전이라는 사람의 묘자리였다. 훗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명당자리를 빼앗길 것을 내다본 이계전은 자기 묘 근처에 재실이나 다리를 놓지 말라고 유언했음에도 후손들이 재실과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훗날 영릉을 이장하기 위해 길지를 찾아다니던 지관들이 소나기를 만나 이 재실로 피해들었다가 주변을 돌아보니 천하의 길지였다.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장명등석, 망주석, 신도비 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능 앞의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영릉정화사업으로 인해 영릉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이다. 본래 왕릉의 참도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의 2도인데 반해, 황제릉의 참도는 3도이다. 성역화 사업의 오류이다.
영월루
영월루는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당시 군수가 파손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위쪽에는 1958년에 옮겨진 창리 삼층석탑과 하리 삼층석탑이 있다.
영월루 누마루에 올라보면 남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지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신륵사의 대가람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옛날에는 마암어등(馬巖漁燈:마암 앞 강가의 어선들의 등불), 학동모연(鶴洞暮煙:강 건너 학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연탄귀범(燕灘歸帆:제비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양도낙안(洋島落雁:양섬에 기러기 떼 내리는 모습) 등을 여주팔경으로 꼽았지만 세월의 변함에 따라 이러한 모습은 찾기가 힘들다.
누각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바위 위에는 힘있는 필치로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황마(黃馬, 누런 말)와 여마(驪馬, 검은 말)가 승천하였다고 하여 여주군의 이름을 황려(黃驪)라 칭했다. 이 황려가 후에 여흥이 되었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여주(驪州)로 바뀐 것이다.
영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2층 누각 형식인데 정면길이에 비하여 측면 길이가 짧으므로 평면은 긴 장방형이다. 건물의 가구(架構) 형태로 미루어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한다.
창리⋅하리 삼층석탑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은 당초 여주읍 창리 절터에 있던 것을 옮긴 것으로 네모난 2층의 기단석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높이 2.46m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이 탑의 1층 탑신석 상면에서 16.7cm x 3cm의 얕은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완전히 없어졌고 하대석 밑에서 높이 4.4cm의 동제여래입상(銅製如來立像) 1구가 발견된 바 있다.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92호)은 네모난 2층 기단석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높이 3.7m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창리 삼층석탑과 함께 신라 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1958년 석탑을 하리의 옛 절터에서 옮길 때 1층 탑신에서 특이한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된 바 있다. 내용물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이 원공(圓孔)이 무슨 용도였는지 알 수 없다.
신륵사(神勒寺)
구전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얘기다. 이는 강가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 영월루 아래 바위)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때 마을에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자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의 신(神)과 굴레(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과 관련하여 변화의 신으로 여겼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피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에 따른 비보(裨補:땅 기운의 모자람을 보태서 채우는 일로 신라말기 도선국사 이래로 비보사찰이 많이 생겨났다) 사찰의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나옹화상 부도),
*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나옹화상 부도비),
*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 보물 제231호인 석등(나옹화상 부도 앞의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그 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 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선사의 영정을 봉안 해두고 있으며, 또 목조(木造)의 나옹화상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측면이 정면에 비해 칸 수가 더 많은 2칸 구조이지만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 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 보물 제 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이 탑은 극락보전 바로 앞에 아담하게 서있는 대리석 석탑으로 그 재료에서뿐 아니라 세부조각 수법에서도 매우 아름다운 비룡문을 위시하여 연화문을 남기고 있어 조선 초기 공예의 면모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으며,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한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 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 능인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각광을 받다가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여기서 잠깐 탑의 층수에 대해 알아봅시다.
탑을 세는 데는 기단을 빼놓고 �돌과 지붕돌을 하나로 하여 1층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재료가 나무인가 돌인가 벽돌인가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 등의 이름을 붙인다. 예를 들어 3층 석탑이라고 하면 돌로 만들되 몸돌과 지붕돌을 세 층으로 쌓아올린 탑이란 뜻이다.
그런데 층수를 보면 3층, 5층, 7층, 9층, 10층, 11층이라 하여 10을 제외하고는 모두 홀수입니다. 옛사람들은 홀수를 하늘을 뜻하는 수라고 보았기에 하늘로 올라가는 층수는 반드시 홀수로 만들니다.
다만 10(十)이라고 하는 숫자는 우리는 손가락이 열 개이듯이 하나부터 세어서 열까지 하면 ‘다했다’ ‘완성되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몸돌과 지붕돌은 보통 4각이나 8각으로 만드는데 하늘과 짝한다는 땅이란 의미에서 짝수로 씁니다. 그렇다면 5각 6층탑이라는 것은 세울 수가 없다.
다층탑이라고 하는 것은 탑이 처음 세워진 뒤 중간에 훼손되었다가 흩어진 돌들을 다시 주워모아 쌓아올려 정확한 층수를 헤아릴 수 없을 때에 붙이는 이름이다.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아래로 남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전망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2단의 기단위에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상륜부)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 보기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나옹화상 부도, 보물 제228호)
신륵사 조사당을 지나 양지바른 구릉을 오르면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있다.
멀리 탁트인 전방은 남한강의 강물이 굽이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향했고, 조용한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한 이곳은 당대 백성들의 추앙을 받던 조사(祖師)의 묘역답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 영원사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부도를 세운 것이다.
넓은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부도를 세웠는데 부도의 몸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매우 안정적이면서도 품격있는 모습이다.
생김새가 종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석종형 부도라고 하는데 보통은 그냥 ‘석종’이라 부른다. 기단 네 면에는 모두 계단을 내었다.
대체적으로 인도의 불탑이 넓은 기단을 이용해 그 위에 복발형의 부도를 안치하는 것에 비해 이 부도는 돌종(石鐘)을 기단위에 놓은 형태이다.
신라 이래 유행하던 팔각원당형의 부도 형식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다소 새로운 양식을 가미하여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하게 조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 나옹화상의 부도는 신라 이래 유행하던 팔각원당형의 부도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조형 의지를 나타낸 특수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옹화상의 석종형 부도는 조선 시대에 계속 전수되어 기단이 더욱 약화됨으로써 소위 ‘석종부도’를 탄생케 하였다. 이에 오늘날 절집 근처 숲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도양식이다.
참고로 나옹선사의 부도와 부도비는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도 있는데 신륵사의 것보다 3년 앞선다. 신륵사의 부도는 석종형으로 고려 말기에 새롭게 등장한 모습이지만 회암사의 부도는 화려한 고려 양식으로 몸돌에 쌍룡을 조각했으며 비문은 예서체로 쓰여 있다.
구려의 광개토왕릉비나 중원고구려비 이후 처음으로 발견된 예서체 비문이라 우리나라 서예사 연구에도 귀중한 몫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것을 탑(塔)이라 하고,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것을 부도(浮屠)라고 하는데, 부도 가운데 탑의 형식을 딴 것을 부도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등 (보물 제231호)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하였는데 비천상(飛天像)이 매우 섬세하면서도 아름답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나옹화상 부도비, 보물 제229호)
마치 액자에 담겨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색적인 비석이다.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비석으로 3단의 받침 위에 비신(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을 적고 있는데 이는 드문 예이다. 이 비는 총높이 212cm로서 비신은 121cm에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신의 폭은 61cm, 기단과 비받침대 및 지붕돌은 모두 화강석이며, 약 200여명의 문도 및 관계 도속(道俗)의 명단이 보여 주목되고 있다.
비신의 보호를 위해 돌기둥을 비신 주위에 돌리고 있음도 독특하다. 부도와 함께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학자인 목은(穆隱)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3cm, 폭은 88cm이다. 비를 세운 연대를 나타낸 글자가 탈락해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보제존자석종비 제작 4년 후인 홍무16년(138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經), 율(律), 논(論)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 있다.
[참고]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에 관하여
지공(? ~ 1363) 화상(和尙)은 인도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라 하며 선현(禪賢:선수행을 하는 현자)이라 칭해지며 지공은 호이다.
인도왕족으로 태어나 여덟 살 때 출가, 나알란사의 강사 계현(戒賢)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열아홉 살 때 남인도의 랑타아국 길상산(吉祥山) 정음암(頂音庵)에 가서 보명(普明)스님께 사사하고 그의 인가를 얻어 지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원나라에서 블법을 펼치는 동안 고려의 유학승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지공은 고려에 있는 금강산법기도량(金剛山法起道場)을 참배하고자 하는 염원과 고려에 대한 관심 등으로 충숙왕3년(1326년) 마침내 고려를 방문하여 1년을 머무리기까지 했다.
지공은 고려말 승려들의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나옹에게 있어서는 사상적인 원류로 평가된다.
나옹(1320-1376) 화상은 서천 지공스님과 절강 평산(平山)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승풍(僧風)을 크게 떨쳤던 고려말의 고승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출가한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1344년(충혜왕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岩寺)에서 크게 깨달았다.
1347년 (충목왕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하고 정진하여 그의 법을 전수받은 후 1358년(공민왕7)에 귀국하였다.
나옹은 보우(普愚)와 함께 중국에서 새로운 선풍(禪風)을 도입하여 한국불교의 초석을 세운 장본인이다. 유학하는 20여년 동안 강남지방의 간화선(看話禪:화두(話頭)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을 깊이 공부하고 귀국하여 간화선을 널리 선양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 이후 신광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홍건족의 침입을 법력으로 막아 신광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에서 수도 정진한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의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王師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낙성식 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지고 유학자들이 탄핵함에 따라 밀양 영원사(瑩遠寺)로 가던 중 1376년 5월 15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니 나이 57세 법랍 38세였다.
무학(1327-1405) 대사는 고려말 조선 초, 불교가 위축된 상황 속에서 사회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낡은 체제의 개혁과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한 조선 초기의 고승이다.
1353년(공민왕2) 원나라 연도(燕都)로 가서 인도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은 후 나옹(懶翁)을 찾아가 그의 전법제자(傳法弟子)가 되었다.
나옹이 입적한 후, 다시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무학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었고, 그 건국사업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불사(佛事)를 광명사(廣明寺)에서 베풀었다. 1402년(태종2) 왕명을 받아 회암사로 옮겼다가, 금강산 진불암으로, 다시 1405년 금장암金藏庵으로 옮겨 이곳에서 나이 79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후에 조선 태종太宗이 사리를 회암사 부도에 모시게 하였다.
목아박물관
목아 불교 박물관은 무형문화재 제108호(목조각장)인 목아박찬수 선생이 수집한 6,000여점의 불교 관계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불교 용품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지하 1층, 지상3층으로 된 전시관에는 불화, 불상 등의 유물과 함께 동자상을 비록한 불교관계 목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 조각공원에는 미륵삼존대불, 비로자나불, 삼층 석탑, 백의관음, 자모관음상 등이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다.
소장품 중에는 보물 3점이 있으며 그 밖에도 불교 사찰에서 전해 오던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어 매년 기획전과 특별전을 통해 유물들을 공개하여 불교문화와 미술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 역할에 힘쓰고 있고, 특정종교와 관계없이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고달사터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폐사지인 텅빈 사찰터를 가보면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예상치 못한 품격높은 문화재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감상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데 고달사터도 그중 하나이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세워진 이래 고려 광종 등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다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득도하여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와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와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8호인 석불대좌가 있다.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신륵사에서 보았던 나옹화상의 부도와 함께 고달사터의 부도를 비교해 보면 고려시대의 화려한 부도양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寺域)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던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195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널찍한 텅빈 절터 한켠에 세워진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의 부분 파손 외에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으로, 각 추녀선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랐으면서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다.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으며, 비몸(碑身)은 깨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했으며,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975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7호)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 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 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이 부도는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건립연대는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보물 제8호)
이 석불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