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산문 이론 연구
실 수
나희덕
옛날 중국의 곽휘원(廓暉遠)이란 사람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아내의 답시는 이러했다.
벽사창에 기대어 당신의 글월을 받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뿐이옵니다
아마도 당신께서 이 몸을 긔리워하심이
차라이 말 아니하려는 뜻임을 전하고자 하신 듯하여이다.
이 답시를 받고 어리중절해진 곽휘원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에게 쓴 의례적인 문안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옆에 있던 흰 종이를 편지인 줄 알고 잘못 넣어 보낸 것인 듯했다. 백지로 된 편지를 전해 받은 아내는 처음엔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말로 다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그 여백을 읽어 내었다. 남편의 실수가 오히려 아내에게 깊고 그윽한 기쁨을 안겨 준 것이다. 이렇게 실수는 때로 삶을 신선한 충격과 행복한 오해로 이끌곤 한다.
실수라면 나 역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비구니들이 사는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해진 머리를 정돈하려고 하는데, 빗이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다. 원래 여행할 때 빗이나 화장품을 찬찬히 챙겨 가지고 다니는 성격이 아닌데다 그날은 아예 가방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마침 노스님 한 분이 나오시기에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이렇게 여쭈었다.
“스님, 빗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스님은 갑자기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제서야 파르라니 깎은 스님의 머리가 유난히 빛을 내며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거기가 비구니들만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엉뚱한 주문을 한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노스님을 놀린 것처럼 되어 버려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나에게, 스님은 웃으시면서 저쪽 구석에 가방이 하나 있을 텐데 그 속에 빗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다.
방 한구석에 놓인 체크무늬 여행 가방을 찾아 막 열려고 하다 보니 그 가방 위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적어도 5, 6년은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 가방은 아마도 누군가 산으로 들어오면서 챙겨 들고 온 속세의 짐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가방 속에는 과연 허름한 옷가지들과 빗이 한 개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절에서 빗을 찾은 나의 엉뚱함도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려니와, 빗이라는 말 한마디에 그토록 당황하고 어리둥절해 하던 노스님의 표정이 자꾸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검은 머리칼이 있던, 빗을 썼던 그 까마득한 시절을 더듬고 있는 그분의 눈빛을. 20년 또는 30년, 마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처럼 참으로 오랜 시간이 그 눈빛 위로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 순식간에 이루어진 회상의 끄트머리에는 그리움인지 무상함인지 모를 묘한 미소가 반짝하고 빛났다. 나의 실수 한마디가 산사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그분의 잠든 시간을 흔들어 깨운 셈이다. 그걸로 작은 보시는 한 셈이라고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까지 했다.
이처럼 악의가 섞이지 않은 실수는 봐줄 만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번번이 저지르는 실수는 나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어떤 관계를 불화로 이끌기보다는 의외의 수확이나 즐거움을 가져다줄 때가 많았다. 겉으로는 비교적 차분하고 꼼꼼해 보이는 인상이어서 나에게 긴장을 하던 상대방도 이내 나의 모자란 구석을 발견하고는 긴장을 푸는 때가 많았다.
또 실수로 인해 웃음을 터뜨리다 보면 어색한 분위기가 가시고 초면에 쉽게 마음을 트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런 효과 때문에 상습적으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어디에 정신을 집중하면 나머지 일에 대해서 거의 백지상태가 되는 버릇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특히 풀리지 않는 글을 붙잡고 있거나 어떤 생각거리에 매달려 있는 동안 내가 생활에서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들은 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면 실수의 ‘어처구니없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원래 어처구니란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큰 물건을 가리키는 뜻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이 부정어와 함께 굳어지면서 어이없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크다는 뜻 자체는 약화되고 그것이 크든 작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상이나 상식을 벗어난 경우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상상에 빠지기 좋아하고 상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사람에게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실수는 삶과 정신의 여백에 해당한다. 그 여백마저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돌리며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어떻게 휩쓸려 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사람을 키우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실수의 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실수가 용납되는 땅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사소한 실수조차 짜증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가 십상이다. 남의 실수를 웃으면서 눈감아 주거나 그 실수가 나오는 내면의 풍경을 헤아려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워져 간다. 나 역시 스스로는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조급하게 굴거나 너그럽게 받아 주지 못한 때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는 말을 들을 때면 그 말에 무안해져 눈물이 핑 돌기도 하지만, 내 속의 어처구니는 머리를 디밀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다. 정신과 마음은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고.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뛰어가는 자신을 하루에도 몇 번씩 세워 두고 ‘우두커니’ 있는 시간, 그 ‘우두커니’ 속에 사는 ‘어처구니’를 많이 만들어 내면서 살아야 한다고. 바로 그 실수가 곽휘원의 아내로 하여금 백지의 편지를 꽉 찬 그리움으로 읽어 내도록 했으며, 산사의 노스님으로 하여금 기억의 어둠 속에서 빗 하나를 건져 내도록 해 주었다고 말이다.
(나희덕 외 산문집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작법공부|
이 작품은 ‘실수도 시이다. 아니, 실수야 말로 시이다. 실수라는 여백마저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 돌리며 살 수 있겠는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 산문> 작품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필자는 1천여 편의 <수필산문> 작품 공부를 통해서 <산문의 창작적 변화>가 <산문의 시> 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하여왔다. 그 결과로 이끌어낸 <산문의 시> 개념이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이다.
이 작품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산문의 창작적 변화 현상>이 ‘시적 변화’로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시인이 쓴 글이다. 시인이 쓴 글이지만 아무도 이 작품을 운문이라고 보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틀림없는 일반산문 형식의 글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산문’이란 ‘보통의 글’이라고 되어있다. 보통의 글이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배우기 시작하는 보통의 말글, 혹을 줄글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글도 산문이니 ‘보통의 글’에 지나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이 글의 형식은 보통의 글, 즉 일반산문이지만, 그러나 내용은 전혀 보통의 글이 아니다.
작가가 그렇게 알고 있든 아니든, 작품 집필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든, 설사 보통의 일반산문을 쓴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썼다 할지라도 <산문의 창작적 변화 현상>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의 눈에는 이 글은 보통의 산문이 아니다. 필자에게는 한 편의 시 작품으로 보인다. 운문시가 아닌 산문의 시! 이 같은 장문, 시의 길이는 짧다는 관습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산문의 시 작품을 필자는 <시산문>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하여 문학 관습에 대한 예의를 지키도록 한다.
필자가 이 작품에서 읽은 시는 작가가 붙인 제목 그대로 ‘실수’라는 시이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실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곽휘원의 편지 실수이고, 다른 실수는 작가 자신의 실수다. 그러면 이 작품은 그 같은 실수 소재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에 관한 산문만 쓰다 말았는가? 실수가 다른 아무것으로도 창작적인 변화를 하지 않고 있는가?
만약에 이 작품 속의 실수가 다른 아무 창작적인 변화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필자는 다시 한번 ‘시란 무엇인가?’ 묻고 싶다. 시란 누가 뭐라 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백번 ‘오류의 역사’라 해도 필자에게 시는 삶의 감춰졌던 의미가 드러나는 그것이 시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의 다음 문장이 시로 발견되지 않는가?
바로 그 실수가 곽휘원의 아내로 하여금 백지의 편지를 꽉 찬 그리움으로 읽어 내도록 했으며, 산사의 노스님으로 하여금 기억의 어둠 속에서 빗 하나를 건져 내도록 해 주었다고 말이다.
곽휘원의 아내가 ‘꽉 찬 그리움으로 읽어낸’ 그것이 시가 아니면 무엇이 시란 말인가?
산사의 노스님이 기억의 어둠 속에서 건져 낸 빗 하나가 시가 아니면 무엇이 시란 말인가?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노스님에게 빗을 빌려달라고 한 ‘실수’가 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 산으로 들어오면서 챙겨 들고 온 가방 위에 앉은 하얀 먼지가 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여백마저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돌리며 살 수 있겠는가’의 그 ‘실수의 여백’이야 말로 현대인이 목마른 시가 아닌가?
시란 삶의 감추어졌던 의미가 들어나는 것이다. 삶의 감추어졌던 의미를 드러내는 일이 창조행위인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서술형식이 에세이 형식인 것은 맞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에세이)의 창작적 변화 현상>을 공부하는 필자에게는 참으로 반갑기 그지 없는 작품이다. “보라! 이 작품이 그냥 보통의 일반 에세이 작품으로만 보이느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예술의 발생은 분별력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우거진 숲이 한 덩어리의 숲으로만 보이는 사람에게는 문학예술이 발생할 수 없다. 참나무와 소나무와 단풍나무, 각 가지 크고, 작고, 여리고, 튼튼한 각종의 나무들이 구별되게 보이는 눈을 가져야 소나무 그림 따로 그릴 수 있고, 단풍나무 그림 따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산문(에세이) 형식이라고 다 같은 산문으로만 보이는 눈에는 영원히 <산문의 창작적 변화(진화)>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문학 100년에 묻고 싶다. 100년 동안 그대들 눈에는 산문(에세이)의 창작적 변화(진화)가 보였느냐? 100년 동안이나 산문의 창작적 변화가 안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법공부 :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