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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극소설-'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5>
4장. 음모론 국제신문2012-04-24
조선의 기둥뿌리는 누가 붙들고 있는가?-
조선 초기, 국가 권력은 명을 등에 업은 사대부 세력과 농업 과학 천문기술 광대 등
천민 중인들의 힘을 기반으로 한 세종의 주체적 부국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사진제공=국립극단(촬영 심철민)
- 조선의 기둥뿌리를 붙들고 있는 공신들이 임금 뒤통수를 친 것 아니오。
"이건 음모요."
옥사 구석진 모서리에 쪼그려 앉은 최효남(崔孝男)의 말이 강파르게 날아 온다.
그는 한나절 반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무슨 생각엔가 빠져 있었다.
워낙 두뇌 회전이 빠른 작자라 그 사이 엄청난 가설과 추리 사이를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모종의 결론에 당도한 듯 하다.
"멀쩡한 안여(安輿)가 왜 부서지냐구."
그의 눈빛이 희번덕 돌아 내게로 향한다.
"왜 하필 여기로 왔소? 당신 때문에 우리까지 다 죽게 생겼소."
"거 무슨 소리요?"
"나는 안다구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최효남의 입장은 더욱 분명해진다.
"도대체 뭘 안다고 그러는 건가?"
임효돈(任孝敦)이 슬그머니 관심을 보인다.
"일어나 보시오 정의 어른, 지금 팔자 편하게 드러누워 있을 입장이 아니잖소."
최효남의 어투는 이제 아래 위가 없다.
벽을 향해 모로 누워 있던 조순생(趙順生)이 언짢은 기색으로 슬그머니 일어난다.
"안여(安輿)가 출고되기 전에 정의 어른이 감리를 했지 않소.
손바닥으로 쇠바퀴 하나 하나 두드려 가면서
이 정도면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잖소. 그런데 왜 부러졌소?"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건 또 무슨 오리발이오.
본인이 한 말을 모른단 말이오?"
"이 사람아, 나야 감리 책임자로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만,
쇠바퀴가 빠져 나가고 수레가 부서지고 하는 것은 전문가인 자네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어, 미꾸라지 고기를 잡수셨나, 잘 빠져 나가시네."
"어른 앞에서 무슨 말 버릇이 그래?"
임효돈이 보다 못해 끼어들고
"어른이 어른다와야지."
최효남의 악발은 점점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래, 내가 선공직장(繕工直長)이니까 내가 책임지면 될 거 아니야 그만하라구."
"왜 당신이 책임져?
어차피 여기서 골로 갈 사람은 바로 저 장영실(蔣英實) 대호군(大護軍) 아닌가!
아니라면, 애시당초 사주를 받아 이 일을 진행시킨
조순생 대호군의 음모가 백일하에 밝혀지던지."
"자네 지금 소설 쓰는가?"
조순생이 어이없다는 느낌으로 손사래를 쳤고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 이렇잖소."
장영실은 세종의 마이더스 손- 장영실은 세종의 부국론을 현실화 시키는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게다가 장영실은 세종의 침소를 관리하는 내시 역할을 자청했고,
세종의 질병을 관리하는 주치의이기도 했다. 앞은 장영실(곽은태), 뒤는 세종(이원희).
여기서부터 최효남의 음모론이 장광설로 펼쳐진다.
"임금이 장영실 대호군을 외지 경상도 채방별감으로 내려 보낸 것은
명에서 온 사신 오양의 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소.
저 천재가 명에서 천문 역법을 익혀 가지고 돌아와 다 베껴서 만들어 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오…."
"나는 베끼지 않았소."
"그렇지,
어떤 물건이라도 한번 척 보면 그 물건이 만들어진 원리를 바로 꿰뚫어 버리니까
더 잘 만들었지. 거기까지는 그래도 명에서 참을 만 했어.
그러나 천문 역법에 손을 댄 게 문제였어.
저 천재는 중국과 다른 조선의 시간을 만들고
조선을 중심으로 북극성의 위치를 바꿔 버렸지."
"다 임금이 생각을 내고 시킨 일일세.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의외로 조순생이 최효남의 소설도 사실도 아닌,
관가에서 떠도는 유언비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관여 안 할 수 없었지.
전설 속에나 나오던 원나라의 물시계를 조선에서 만들고,
이제 비를 다스리는 측우기까지 만든다 하니까 명(明)에서 난리가 났지.
명에서 사신을 보내어 그 명나라 천문 역법을 베껴간 녀석을 잡아서 데리고 오라 해서
오양이 왔고, 임금은 그 사이 저 천재를 지방으로 내려 보낸거요.
그러고나서는 명나라에 가본 적도 없는 서운관 관리들이 측우기를 만드는 척 한거요.
그러나 저 사람 없이는 측우기를 완성 할 수 없거든.
그래서 다시 불러 들이는데, 오양의 감시망에 놓인 서운관에 데려다 놓을 수는 없고 해서
엉뚱하게 선공감에서 임금 수레를 만들고 있으라 그랬거든.
오양이 온갖 패악질을 일삼다가 지난 달 말에 돌아가고,
이제 저 천재를 불러다가 측우기를 완성하려는 참인데, 딱 걸리고 말았단 말이오…."
"누가 누구에게 걸렸단 말인가?"
"그걸 몰라서 묻소?
당신네들 태조 이성계부터 3대에 걸쳐 이 조선의 기둥뿌리를 붙들고 있는 공신들이
임금 뒤통수를 친 것 아니오!"
"이 무도한 놈이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
여봐라 여기 누구 없느냐, 이 역적을 당장 잡아 들여라-"
조순생이 화가 나서 고함을 쳐 대고
"꼴갑하고 자빠졌네. 이미 잡혀 들어와 있잖소.
여기 누구 있으면 임금을 엿 먹이려 드는 이 간신을 족치시오-"
최효남이 발악을 하는데,
"좀 조용히들 못하겠소!"
의금부 당직 사령이 쇳소리를 내지른다. 그 순간 모두 무기력해진다.
"하여튼 여기 붙들려 들어온 작자들 치고 의연하게 제 죄를 인정하는 위인이 없어.
그저 의심하고 원망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니
도대체 이 조선 천지에 죄 지은 자 누구란 말인가?"
"나요, 내가 죄인 인 것 같소.
저 녹사 말을 반이라도 믿을 구석이 있다면 응당 내가 죄를 덮어쓸 것 같소.
그러니 어서 주군께 직소를 올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게 해 주시오."
나는 재빨리 당직사령에게 주군께 연락이 닿기를 부탁한다.
"임금은 지금 병을 고치러 강원도 이천 행궁에 가셨소.
안여는 부서졌지만 말 타고 가셨답니다."
"그럼, 이천 장군은 어디 계시오?
장군께 연락이라도 드릴 수 없소?
이 장영실이가 의금부에 갇혀 있다고…."
"그렇잖아도 서울로 오고 있답니다.
당신들을 직접 취조할거요."
조말생(趙末生)과 황희(黃喜)의 서로 다른 입장-
태종조의 실권자 조말생과 세종조의 영의정 황희는 장영실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다.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조말생은 장영실 같은 천민 기술자를 등용할수 있다는 입장이고,
전형적인 사대부 권력인 황희는 양반과 천민의 경계가 분명했다.
왼쪽부터 조말생(전형재), 황희(이종구).
그 말을 듣는 순간 일단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천은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그는 지금 나를 구하러 오고 있다.
최효남의 말에 일리가 있다면 누가 나를 모함에 빠뜨리고 죽이려 드는가?
나는 문득 새로운 의혹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를 의금부에 송치시킨 사람이 누구요? 임금이오?"
"아니오, 임금이 온천 행궁에 있을 동안에는
부득이하여 교지를 받는 일외 통상 업무는 모두 의정부에서 시행하고 있소."
"아니, 임금이 붙들어 넣어라 교지를 내리지도 않으셨는데
누가 우리를 붙들어 넣었단 말이오?"
이젠 임효돈까지 의혹에 휩싸인다.
"임금이 타고 가시던 안여가 부서지고 임금 팔꿈치에 피가 배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그 시각에
바로 투옥하라는 의정부 명이 떨어졌소.
당신들은 지금 사헌부에서 형량을 재고 있고,
어쩌면 임금이 돌아 오시기 전에 형을 받을 지도 모르오.
임금은 원래 단오절까지 이천행궁에 머물기로 되어 있소."
"그것 보시오, 내가 뭐랬소!
임금이 안 계시는 동안 누군가가 우리를 해치려 들 거요."
최효남은 다시 까마귀 울음을 울기 시작한다.
"누가 우리를 심판 합니까?"
"지금 서울 도성은 황희 정승 휘하에 있소."
나는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명치 밑에 숨이 딱 멈추어 선 느낌이다.
"황희 정승을 의심하시오?"
조순생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네 살 먹은 어린애까지 우러러 보는 청백리를 의심한다면, 의심하는 그 자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려."
"그분이 저를 탐탁치 않게 여길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오?"
"제가 십 수년 전 서운관 행사직에 있을 때
주군께서 제게 상의원 별좌 관직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때 이조판서 허조 대감은 지방 관노비의 자식에게 상의원 벼슬을 줄 수 없다 하시고,
병조판서 조말생 대감은 병조나 호조같은 곳에서는 전문인이 상의원 별좌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때 영의정이셨던 황희 대감은 아무 말도 없으셔서 제가 탈락했습니다.
황희 정승은 양반과 천민의 경계가 분명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대호군께서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었을 때,
그때도 영의정이셨던 황희 대감께서는 태종조 호군 관직을 얻었던 평양 관노 김인의
사례까지 드시면서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셨지 않소."
"어떻게 저의 일을 그렇게 소상히 아십니까?"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지오.
내가 바둑이나 두면서 백수 한량으로 지내다가
특채로 첫 관직을 얻은 것이 사초를 기록하는 일이었소.
당신에 대한 그 기록은 내 글씨체요."
"그렇게 저를 소상히 아시면서 같은 직장에 있는데
바둑 한번 같이 두자는 말도 안하셨소?"
"아하, 그게 그렇게 되었소?
나는 당신처럼 자기 일에 미친 사람에게는 바둑 두자는 말을 하지 않소.
바둑은 일 없는 자들이 하는 소일거리요."
"녹사 최효남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문득 음모론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발동하여 날카롭게 찔렀다.
"흥미로웠소.
내가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음모를 꾸미고 실행할 능력이 있는 인간인 줄 몰랐소.
최녹사 말대로라면, 나 뿐만 아니라 황희 대감도 임금까지도
당신을 없애려고 드는 인간이 되어 버리지오.
아마 최녹사 자체가 그런 음모꾼의 기질이 있으니까
모두 그렇게 추리를 하는가 보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 선인도 악인도 구별할 수 없지오."
조순생과 나지막하게 주고 받는 대화인데
짐짓 무관심을 유지하던 의금부 당직사령이 대화에 끼어든다.
조순생이 되묻는다.
"그럼 당신은 황희 대감도 임금까지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이오?"
"그럴 수 있소.
인품 보다 더 큰 목적이 있고 정의 보다 더 높은 뜻이 있다면 못할 게 어디 있겠소?
나는 이 의금부에서만 이십년을 보내고 있는데,
여기 있다 보면 인간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오….
자 밤이 깊었으니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시고 잠자리에 드시지오.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정도의 처벌을 받기를 바라오."
"어느 정도 맞아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소?"
임효돈이 당직사령에게 구차스런 질문을 던졌고,
"곤장 백도 맞으면 골로 갑니다."
당직사령은 눈 하나 꿈쩍 안고 대답한다.
"매 이기는 장사 없다고 곤장 백도면 어지간히 건장한 장정도 목숨을 부지 하기 어렵지오.
보통 60도에 앉은뱅이 되고 80도 부터는 매맞는 도중에 사망에 이르지오."
"어이구, 우리는 죽은 목숨이구나."
임효돈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당신은 맷집도 어지간해서 곤장 80도까지는 견디겠소."
"그렇지 않소 이게 다 물살이오, 부은 거란 말이오."
"물살이 오히려 충격이 덜하지오.
부은 살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쓸모없는 살이 두꺼울수록 충격이 완화되는 법이니까."
"체, 겁먹지 마시오, 예전에 두서너 번 곤장 맞아 봤는데
한두달 드러누워서 탕약 다려 먹으면 일어나요.
백도 맞아도 안 죽는 사람은 안 죽소."
최효남이 잇발을 악물며 소리를 쳐 댔고,
"그렇지 독한 놈은 백도 맞아도 명이 안 끊어집디다.
그런데 당신 왜 자꾸 나를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어?
그렇게 이 악물고 매맞으면 50도도 못 버티고 숨이 멎는 수가 있어."
당직사령이 농담조로 비웃는다.
"왜 그렇소?"
임효돈이 다시 물었고,
"용을 쓰면 근육이 경직되니까….
그러니까 매맞을 때는 가능한 숨을 내뱉으며 입을 이렇게 하- 벌리시오.
훨씬 견디기 쉬울꺼요."
"사령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요?"
임효돈이 다시 물었고,
"내가 주로 때리니까요."
모두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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