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ebqzvNugmH0?si=sCADSKlCF8xwYpZ8
子曰巧言令色 鮮矣仁
공자 가라사대, 공교로운(남 듣기 좋은) 말과
좋은 색(얼굴빛)을 띤 자가 仁을 함은 드무니라.
'교언(巧言)’은 말을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말재주를 뜻하고, ‘영색(令色)’은 얼굴빛을 착한 체하며 웃는 얼굴을 띠는 것을 말한다. 文飾의 뜻을 지닌 巧言令色은 2~3천년 전의 경전에 나오는 말 중에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어온 용어 중 하나이다.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익숙한 단어이다. 자본주의 소비가 극성을 이루는 요즘 사회 풍조에 적용하자면 허황되고 과장된 사치풍조의 뜻을 함축하고 있기도하다.
겉으로만 듣기좋고 보기좋으나 ‘실제로는 가짜’ 라는 뜻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만 인간사회에서 보편화된 처세술의 일종이다. 그런 만큼 인간사회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는 巧言令色해서는 안된다고들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많이 써먹는 유용한 처신술인 것이다.
공자의 핵심사상은 ‘仁’이다. ‘仁’을 실천하는 덕목에는 孝·悌·忠·恕·信·恭·敬 등이 있는데 이 모든 덕목에 흐르고 있는 기본정신은 眞心과 誠意이다. 그런데 巧言令色은 이 덕목들을 가짜로 포장하여(文飾) 진짜같이 보이게 하는 행태이다.
이에 공자는 논어 공야장편 24장에서 ‘巧言令色足恭 丘亦恥之(교언영색으로 지나치게 공손함을 나 또한 부끄러워 하니라)’고 하였다. 巧言令色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하고 잘못 판단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행을 드러내는 ‘不仁’한 행태보다 오히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위의 ‘鮮仁矣’에서 ‘鮮’은 주자가 ‘絶無可知(절대로 <仁이> 아님을 알 수 있다)’라 했듯이 공자의 완곡한 표현(聖人 辭不迫切 : 성인이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으심)을 나타내는 글자이나 실제로는 단정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矣(집어 의)’는 꼭 집어 단정지을 때 쓰이는 글자이다. 따라서 ‘鮮仁矣’는 공자가 巧言令色에 대해 ‘仁’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賊)로 단정짓는 표현이 담겨 있다.
그 외 논어에는 공자가 巧言令色을 집약하여 나타내는 ‘佞(아첨할 영 : 말재주)’에 대해 경계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1)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焉用佞 : 어찌 말재주를 쓰겠는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데 말재주로써 하여 자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나니, 어찌 말재주를 쓰겠는가(공야장편 4장)’
2) 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 옛 적에 말을 (함부로) 내지 않는 것은 몸(행실)이 미치지 못할까 부끄러워함이니라(이인편 22장).
3) 欲訥於言而敏於行 : (군자는) 말재주는 어눌해도 행동은 민첩하게 하고자 함이라(이인편 24장) 등이다.
巧言令色도 문제지만 현대사회에 와서 더 심각한 문제는 男女老少없이 막말하는 사회이다. '말조심하라'는 즉 口是招禍之門의 경고이다. 이에 공자는 주역 계사전에서 최종적으로 言(말)과 관련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① 朱子
巧는 好요 令은 善也니 好其言이오 善其色은 致飾於外하여 務以悅人이니 則人欲肆而本心之德은 亡矣라 聖人이 辭不迫切하고 專言鮮이라하시니 則絶無를 可知니라 學者 所當深戒也라
교(巧)는 좋음이오, 영(令)은 착함이니 그 말을 좋게 하고, 그 색(얼굴 빛)을 좋게 하는 것은 겉으로 꾸밈을 이루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만 힘을 쓰는 것이니, 곧 사람의 욕심이 베풀어지면(앞서면) 본심의 덕은 없어지느니라. 성인이 말을 박절하게 아니하고 다만 ‘드물다’라고 말하시니, 곧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느니라. 배우는 자가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바이니라.
亡 ‘망할 망’ 여기서는 ‘없을 무’
② 程子
知巧言令色之非仁이면 則知仁矣니라 : 교언영색이 仁이 아님을 안다면 곧 仁을 아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