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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寶縣.靑杞縣.豊山縣.周村.殷豊縣.豊基郡.禮安縣.春陽縣.龍宮縣.甘泉縣.宜仁縣.聞慶縣.義城縣.一直縣.
靑松都護府>
1.진보현<眞寶縣>-------본관지(本貫地)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양군에 걸쳐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신라 초기에는 칠파화현(漆巴火縣)이라고 하다가, 경덕왕 때 이 이름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진안현(眞安縣:
고구려의 助攬縣)과 합쳐 보성부(甫城府:載岩城)로 개편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진보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을 폐하고 동면과 북면은 영양군에 병합되고 나머지는 청송군에 편입되었는데, 그 중심지역은 진보면으로
남아있다.
◆ 호구수(戶口數)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청송부(靑松府)가 144호 1589인,진보현(眞寶縣)이 78호 994인
이었다고 한다.
2.청기현<靑杞縣>
경북 영양군 청기면(靑杞面)지방의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고려 충렬왕30년(1304年) 청부현(靑鳧縣:靑松)에 속한 대청부곡(大靑部曲)과 영양현에 속한 소청부곡(小靑部曲)
을 합하여 청기현(靑溪라고도 함)이라 하고, 조선 숙종1년(1675年) 영양군에 편입하였다.
지명의 유래는 고려초기 영해신씨(寧海辛氏)의 한 선비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을때 주위에 푸른 구기자(靑杞)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낙동강의 지류인 청기천변에 자리잡고 있어 서쪽으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예안과 동쪽
으로는 영양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당시 이곳에는 청기창(靑杞倉)이 있었다.
3.<부서府西>풍산현(豊山縣)
▷ 연혁
본래 新羅 下枝縣으로 경덕왕 때 永安으로 고쳐 醴泉郡의 領縣으로 하였는데 高麗때 豊山縣으로 고쳤으며 明宗때 監務를 두었다가 安東府에 예속시켰다. 1914년 府郡面 폐합시 安東郡 豊山縣 內面 4개 동 및 西先面 일부 7개 동을 병합하여 豊山面으로 개칭하고 11개동으로 개편 관할하다가 1943년 豊北面의8 개 동 및 豊西面의 1개 동을 편입.
桂坪·槐亭·魯·丹湖·麻厓·幕谷·晩雲·梅谷·上里·西薇·素山·水·壽谷·新陽·安郊·五美·竹田·下里·玄厓·檜谷 20개 동이며 1973년 7월 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 단호(丹湖)가 남후면에 편입되어 현재 19개의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풍산읍은 신라시대에는 하지현(下枝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풍산현(豊山縣)이라 하였다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에 따라 풍산현의 내면(內面) 4개 동과 서선면(西先面) 7개 동을 병합하여 11개 동(막곡, 계평, 수곡, 회곡, 수, 노, 단호, 상리, 하리, 안교, 마애)을 관할하는 풍산면으로 바뀌었다. 그 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북면과 풍서면의 소산리를 편입하였으며 1973년 7월 1일 풍산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19개의 법정리를 두고 있다.
영가지 권1 강역(彊域)의 기록에 의하면‘풍산현(豊山縣)은 부(府)의 서쪽 35리에 있다. 현의 규모는 동·서가 30리이며 남·북은 45리이다. 동쪽으로는 본부(本府)의 경계인 권산정(權山亭)과는 5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일직현(一直縣)의 경계인 어가말(於加末)과 30리 떨어져 있다. 서남쪽으로는 비안(比安), 의성 등 현의 경계인 백동(栢洞)과 40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용궁현 경계인 구담과 25리 떨어져 있다. 서북쪽으로는 예천군의 경계인 백야현(白也峴)과 15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예천군의 경계인 오적(五赤)과 1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명은 풍성할 풍(豊)자에 뫼산(山)자를 쓴 것으로 이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산 모양이 굽을 곡(曲)자와 콩 두(豆)자를 합친 것과 같이 생겨 이 두 글자를 합하여 풍(豊)자가 되고 뫼 산 자를 붙여 풍산이라 이름지었다.
풍산읍의 지형적인 특성은 북쪽의 경우에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학가산과 보문산이 둘러쳐져 산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낮은 구릉지로 형성되었고 남쪽은 평탄한 평야지로 풍산들을 형성하고 있다. 보문산에서 발원하는 매곡천이 읍의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불노봉에서 발원하는 상리천은 읍의 동쪽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교통은 중앙고속도로의 서안동인터체인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34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외부와 안동을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한다. 이 지역은 중앙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 백 년간 지켜오던 삶의 보금자리였던 자연마을들이 도로용지에 편입됨으로 해서 자연마을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거주지 이전에 따른 새로운 정착과정과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뚫려있는 도로망은 주민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농산물도매시장과 유통센터의 건립은 안동지역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물류와 유통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부북府北>주촌(周村):북선면(北先面).와룡면(臥龍面)
이 지역은 안동부(安東府)의 동쪽과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부동(府東)과 부북(府北)이라 불렀으며 구한말 광무(光武) 10년(1906)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선면(東先面), 북선면(北先面)을 두었다가,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선면 14개리, 동후면, 부내면 일부를 병합하여 안동군 와룡면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에는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13개동으로 개편하였으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행정구역개편으로 월곡면과 예안면의 일부가 와룡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는 와룡면의 중가구동, 서지동, 산야동 일부가 안동시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에는 와룡면 서현동의 일부가 북후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행정구역통합으로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어 안동시 와룡면이 되었으며 현재 18개 법정리에 30개 행정리가 있다.
와룡면은 안동시의 한 가운데 자리하여 동쪽은 와룡산(臥龍山)을 경계로 월곡면(月谷)과 맞대어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없어지게 된 월곡면의 일부를 흡수하게 되어 호수에 면했고, 서쪽은 북후면에, 남쪽은 구 안동시에, 북쪽은 예안면과 녹전면에 지경했다.
5.은풍현<殷豊縣> 현,예천군 상리(上里).하리면(下里面) 지역
신라 때는 적아현(赤牙縣)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 은정현(殷正縣)으로 개명
940년(고려 태조 23) 은풍현(殷豊縣)으로 개칭
1018년(현종 9) 안동부에 속함
1390년(공양왕 2) 기주현(基州縣)에 통합
1413년(조선 태종 13) 기천현(基川縣)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풍기군(豊基郡)으로 개칭,승격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역.
기목진<基木鎭>
신라 때 경북 영주시와 예천군 일대의 지명.
고려 초기에 기주(基州)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길주(吉州:안동)에 예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다시 안동에 예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 다시 감무를 두고 안동부의 속현이 되고, 1413년(조선 태종 13) 기천(基川)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문종 때 은풍현(殷豊縣)을 병합하여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영풍군(영주시)에 병합되고, 일부는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6.풍기군<豊基郡>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지방의 조선시대 행정구역.
신라 때에는 기목진(基木鎭)이라 하다가 고려 초에 기주현(基州縣)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길주(吉州:安東)에 딸리게 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은풍현(殷豊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가 곧이어 풍기군(豊基郡)으로 개칭, 승격하였으나 1914년 영주군에 통합되었으며,1980년 영주읍이 영주시(榮州市)로 승격됨에 따라 영풍군(榮豊郡)에 속하였다가,1995년 개편에 따라 영주시에 속하게 되었다.
▷ 풍기군(豊基郡) 연혁
[신라]
기목진(基木鎭)
[고려초]
기주(基州)
현종 9년(1018년):길주(吉州(安東))에 속함
명종 2년(1172년):안동부(安東府)에 속함
공양왕2년(1390년):은풍현(殷豊縣)에 속함<은풍(殷豊)이 편입>
[조선]
태종13년(1413년):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
문종 임금의 태(胎)를 은풍(殷豊)에 간직하고 은풍(殷豊)과 기천(基川)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풍기군(豊基郡)으로 개칭
<영정(永定), 안정(安定)이라고도 함>
세조 3년(1457년):순흥부(順興府)가 폐지되면서 대부분 지역이 풍기군(豊基郡)에 속함
숙종 9년(1683년):순흥부(順興府)가 회복되면서 풍기군(豊基郡)에 속했던 지역이 순흥부에 귀속됨
고종32년(1895년):팔도(八道)를 23관찰부로 개편하면서 안동관찰부(安東觀察府)에 속함
고종33년(1896년):23관찰부를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도 풍기군으로됨
1914년:행정구역 개편(府·郡 통폐합)으로 풍기군이 영천군에 합쳐져 영주군(榮州郡)으로 됨
7.예안현<禮安縣>
경북 예안군 이전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고구려 때의 매곡현(買谷縣)을 통일신라 때 선곡현(善谷縣)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때 예안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895년에 다시 군(郡)이 되었으나 1913년 안동군에 편입되었고 그 일부 지방은 예안면으로 남아 있다.
삼국시대 買谷縣
통일신라시대 善谷縣
고려시대 吉州 禮安縣
조선시대 禮安縣에서 禮安郡으로 칭함.
1914년 예안군 폐지, 안동군에 속함.
1974년 7월 1일 월곡면 7개리, 예안면 9개리 합병 : 예안면
安東郡의 동북부이며 安東市에서 32.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지의 面이다. 본래 禮安面은 고구려 시대에는 買谷縣이었는데 신라 시대에는 善谷으로 명칭이 바뀌어 榮州郡이 중심이었던 奈靈郡의 領縣으로 불리어 오다가 신라 말기 고려 太祖 때 城主 李能宣이 귀순하였으므로 禮安이라 개칭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顯宗 9년(1018)에는 安東의 古名인 吉州에 속하였다가 고려 말기 禑王 때는 郡으로 독립하여 州로 되었으며 恭讓王 2년(1390)에는 縣으로 되어 후에 縣監으로 개칭된 監務를 주었다. 李朝에 들어와서 太宗 32년(1413)에 縣監을 두었고 조선 말기 高宗 32년(1895)에 승격하여 郡으로 되었으나 1094년에 郡을 폐지하고 安東에 합했다.
국토개발 계획이 일환인 安東댐 건설로 인하여 1974년 5월 25일 대통령령 제 7162호에 따른 행정 구역 명칭 변경으로 본 면 南東間에 위치한 月谷面(본시 月谷面은 臨北面과 東後面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그 소재지가 臨北은 沙月, 東後는 道谷으로 면소재지로 삼아오다가 1914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합병되었는바 그 명칭은 2개 소재지의 뒷자를 따서 月谷面이라 개칭되었다.)을 폐지하고 본 면 9개 동과 전 月谷面 7 개 동을 합병하여 禮安面이라 일컬어 오고 있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臥龍面과 접하고 있으며 남은 臨東面과 동은 英陽郡과 접하고 있다. 면의 중앙부를 낙동강 지류인 東溪川이 흐르며 南部는 九溪川이 흐르고 있다. 서족은 雲南産 등 산지를 이루며 경지 면적은 매우 협소하다. 주로 벼를 재배하며 그 외에 고추·지황·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문화재로는 고려말에 건립된 禮安 鄕校가 있으며 朝鮮 英祖 때 낙동강의 은어를 국왕에게 진상하기 전에 저장했던 곳인 安東石氷庫가 있었으나 수몰로 인해서 安東市로 이전되었다. 면의 중앙부로 국도가 통과하며 인접군과 연락된다.
8.춘양현<春陽縣>
경북 봉화군 춘양면(春陽面)일대의 고려 때 행정구역.
본래 구령(駒令) ·소라(召羅) 두 소국의 영토인데, 고구려 ·신라를 거치면서 가야향(加也鄕)이라 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에 이 곳 출신의 호군(護軍)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춘양현으로 승격되고, 1895년 봉화군에 편입시켰다.
9.용궁현<龍宮縣>
경북 예천군에 병합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신라 때 축산현(竺山縣:園山縣), 고려 초에 용주(龍州)라 하다가 1012년(현종 3) 용궁현으로 고쳤다.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에 군을 폐하고 신하면(申下面)은 의성군에, 나머지는 예천군에 편입하여 그 일부지역은 용궁면으로 남아 있다.
10.감천현(甘泉縣)
고려 현종 시대-안동군 감천현
1914. 4. 1- 부.군.면 폐합시 예천군 감천면 14개리
1927-27개 행정리 분동
1983. 2.15-보문면 마촌동이 편입 28개리
▷ 유래
본래 감천현(甘泉縣)이었으며, 고려시대 현종(顯宗) 때 안동부(安東府)에 붙어서 계속 내려오다가 조선시대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예천군에 편입되어 감천면이 되었음. 상관(上官), 덕율(德栗), 하포(下浦), 현내(縣內), 대산(大山), 이곡(李谷), 우곡(牛谷), 유동(酉洞), 석남(石南), 미흘(美屹), 홍현(紅峴), 천전(泉田), 오향(悟香), 진작(眞勺), 오평(鳥枰), 증거(增巨), 산동(山東), 돈답(敦畓), 벌방(閥方), 수한(水閑), 장산(獐山)의 22개동을 관할하였다.
1914. 4. 1. 행정구역 통폐합(統廢合)에 따라 보문면(普門面)의 진양동(眞陽洞), 평고리(平古里), 지과동(知過洞)의 각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덕율, 포동, 대맥, 미석, 현내, 관현, 천향, 진평, 증거, 유동, 돈산, 벌방, 수한, 장산의 14개동으로 개편 관할하다가 1983. 2. 15. 보문면의 마촌동을 편입하여 15개동이 되었다. 1988. 12. 12 대통령령 제 12557호로 감천면 미석리 1~1079번지 까지를 영주시 장수면으로 편입되어 갈려 감.
동쪽은 보문면과 영주시 장수면, 남쪽은 보문면과 예천읍, 서쪽은 용문면과 하리면 북쪽은 영주시 봉현면과 장수면이 접하고 있다.
감천(甘泉)의 명칭 유래는 고려시대부터 감천 현청이 있던 곳에 명천이란 샘물이 잘 솟고 수량이 많아 한해(旱害)가 들면 영농(營農)에 급수하였으며, 또한 그 샘 물맛이 좋아서 甘泉(단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우수한 온천수를 자랑하는 예천온천(醴泉溫泉)이 이 곳에 있어 지명유래와도 매우 밀접하다.
11.의인현<宜仁縣>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에 있었던 고려 말기의 행정구역.
그 이전에는 안덕현(安德縣)에 딸려 있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었던 것이고려 공민왕 때 승격해서 의인현이 되어 안동부에 속했으며, 이후 공양왕 때 예안현(禮安縣:禮安面)에 폐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예안군으로 존속하다가, 1914년 예안군이 안동군에 편입되면서, 옛 의인현 지방은 안동군 예안면과 안동군 도산면으로 나누어졌다.
지형상으로는 서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이며, 서쪽으로 예안, 남쪽으로 안동, 북쪽으로 봉화(奉化)와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연고지 이기도 한다.
12.문경현(聞慶縣) 연혁
신라중기까지 관문(冠文), 관산(冠山)이라 불림
고려말까지 문희현(聞喜縣)에 속함
1871년 : 신남면(身南面). 신동면(身東面)으로 분리
1914년 9월 : 마고성면(麻姑城面)으로 통합
1916년 4월 : 마성면(麻城面)으로 개칭
1958년10월3일 : 신현1리에서 현 소재지로 청사 이전
1989년12월28일 : 현 청사 신축
▷ 유래
신라중기까지 관문(冠文), 관산(冠山)이라 불리던 지역이며 고려때에는 문희현(聞喜縣),문경현(聞慶縣)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시에는 신남면(身南面), 신동면(身東面)등 2개면이 병합되어 마고산성의 이름을 따서 마고성면(麻姑城面)이라 호칭되다가 1916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현재의 마성면(麻城面)으로 개칭되어 8개의 법정리,동을 관할하고 있다.
처음 면사무소는 신현리에 있었는데 1958년 10월 모곡리 현 면사무소로 이전하게 되었고 8개 법정리,동이 있다.
13.의성현<義城縣>
義城郡 沿革(의성군 연혁)-history of uiseong
삼한시대의 소문국(召文國) 땅으로서 185년(벌휴왕 2)에는 신라에 병합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는 문소군이라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의성부로 승격되었고,조선시대에 현(縣)으로 강등되어 조선후기인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바뀌었다. 1907년 구 비안군과 구 의흥군의 6면을 이관 받았으며, 1914년 군의 행정구역 정비에 따라 18개 면이 되었다.
1934년에는 산운면(山雲面)과 조문면(召文面)을 통합하여 금성면(金城面)으로 개칭하여 17개 면이 되었고, 1940년에 의성읍으로 승격 되었다(1읍 16면). 1990년 안사출장소가 안사면으로 승격하여 1읍17면이 되었다.
1.조문국의 역사
조문국의 존립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 "는 한 조항뿐이다. 이 벌했다는 말을 지리지, 읍지 등에서 "멸(절)했다", "취했다", "진했다" 등으로 해석하여 마치 이때에 조문국이 멸망한 것으로 표현하여 오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벌"자를 어떤 뜻으로 사용했는지 그 쓰임새를 살펴보자
신라본기에,
나해왕 19년(214) 7월에 백제를 벌했고,
무렬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벌했고,
5월에도 백제를 벌했다 하였는데 백제는"문무왕 3년(663)에 멸망했다.
파사왕 29년(108) 5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벌하고 병합
했다.
또 고구려 본기에서,
대무신왕 27년(44)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파병하여 낙양을 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다 하여 벌을 멸망시켰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여암전서 강계고에서도 "조문국은 삼국사기 한곳에 벌했다는 글에 불과하므로 언제 신라에 종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 하였다.
조문국이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조문국의 도읍지 주변인 금성면과 봉양면 일대에 지석묘와 금성면 탑리, 대리, 학미리에 수 많은 고분군이 산재한다. 삼한시대 부족국가들의 형성시기를 서력 기원 전후로 본다면 지석묘는 선주민의 것으로 볼 수 있고, 196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리 고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많은 토기, 철제 등자 등 유물이 나왔는데, 신라토기 편년 전기(350∼450)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의성군문화유적지표 조사보고, p.79) 이 가운데 금동관은 조문국의 왕관으로 보인다.
6세기에 들어와서 신라 지증왕 15년(514) 1월에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였는데 이 아시촌을 지금의 안계지방으로 추정한다. 이곳이 당시 아시혜현이기 때문이다. 법흥왕 12년(525) 2월에는 지금의 상주시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였다. 이즈음 신라가 의성 주변의 통치권을 강화한 것을 보면 이때 조문국은 이미 멸망한 뒤가 된다.
고분의 출토유물의 제작연대와 주변 정세를 감안하면 조문국은 5세기 말경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조문국의 역사
신라는 부족국가를 정복하면 나라를 폐하고 주 ·부 ·군 ·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름은 그대로 두는 것이 통례였다. 삼국사기에 "조문왕 2년(231) 7월에 감문국을 토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하였고", "법흥왕 19년(532) 3월에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항복하므로 그 땅을 금관군으로 하였다. "는 예로 보아 조문국이 멸망하고는 조문군이 되었을 것이다.
문무왕 13년(673) 9월에 조문성을 쌓았는데 이 이름은 당시 조문군의 명칭에서 붙인 것으로 본다. 서기 700년경에 축조한 것으로 보는 탑리리의 5층 석탑도 처음에 조문탑이라 한것이 조문군이 폐하고는 산운탑으로 개칭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에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 "한 것도 위와 같은 견해일 것이다.
여헌 장현광이 쓴 백장령의 비봉설에 관한 기문에서 "조문이 800년간의 긴 복록을 누렸다. "함은 조문국이 기원 전후에 건국하여 조문군을 거쳐 경덕왕 16년(717)에 문소군이 된 때까지의 기간을 가르킨듯 하고, 경덕왕릉에 관한 전설에 오극겸이 꿈에서 얻은 시 "천년 지난 오늘에 경덕분만 남았도다. ", "조문의 거문고 가버린 지금"이란 구절 등에서 전설의 발상 시기가 현령 이우신이 묘를 증축하였다는 영조 원년(1725)과 맞물려 나가므로 이 1000년은 조문군이 폐한 때부터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조문국과 조문군의 역사를 같은 조문의 테두리에서 인식하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3.문소군의 개칭
삼국사절요 제12권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 ·현의 이름을 고치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이때 조문군은 문소군이 되어 상주에 영속되었다.
문소군은 진보, 비옥, 안현, 단밀의 4개 영현을 가졌다. 다인현은 상주의 직할현이 되고, 지금의 옥산 지방인 일계현과 단촌지방인 고구현은 안동인 고창군에 영속되었다.
4. 의성부 승격
고려사 지리지에 "의성현은 본래 조문국인데 신라가 취했다. 경덕왕이 문소군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의성부로 승격하여 현종 9년(1018) 안동부에 내속되었다. " 하였다. 문소군이 의성부로 승격한 연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의성부와 관계되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경순왕 3년(929) 7월에 견훤이 의성부 의성을 치니, 고려
장군 홍술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
(2) 삼국유사 기이 후백제 견훤조에 "천성 2년(929)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 경상부와 강주를 노략하고 부곡성을 공격했는데 의성부의 태수 홍술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
(3) 삼국사기 지리지에 "문소군은 본래 조문국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의
의성부로 영현이 넷이다. "
위 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삼국유사의 문맥을 보면 흥술장군이 전사하기 이전에 이미 의성부가 된 것 같으나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 의성부로 개명 ·승격될만한 사유를 찾을 수 없으며, 사기와 유사를 편찬할 당시에 의성부로 있었기에 위와 같은 표현이 된것 같다.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 원년(918) 6월 무진일에 태조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전략) 이전 임금(궁예)이 신라의 품계, 관직, 군 ·현의 명칭 등을 비속하다고 새 제도를 만들어 여러 해를 통용했으나 백성들이 잘 알지 못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모두 신라의 제도로 다시 고쳐야 한다. 그러나 그 이름 중에서 알기 쉬운 것은 새로 만든 것을 쫓아도 될 것이다. " 하였다. 이렇게 군 ·현의 이름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하다가 나라가 완전히 평정되고, "태조 23년(940) 경자년 3월에 주 ·부 군 ·현의 이름을 고쳤다. "(고려사 세가 태조조) 태조가 처음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 사이 2건의 행정구역개편이 있었는데, "태조 원년(918) 8월 병신일에 평양이 옛 고구려의 도읍지인데도 퇴락하고 여진족이 침범하여 어지럽히므로 이곳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켜 수비하도록 했고", "태조 18년(935) 12월 임신일에 신라국을 폐하고 경주로 하였다. " 태조의 행정구역개편의 신중성을 엿볼 수 있다.
태조는 건국초기에 흥술장군이 자신에게 귀부하여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여 고려 건국에 일조한 공으로 태조 23년(940) 행정구역개편때 문소군을 의성부로 개명 ·승격시켰을 것이다.
5. 의성현으로 강등
대동지지 (1864) 의성 연혁조에 "인종 21년(1143)에 현령을 두었고, 신종 2년(1199)에 적에게 함락되어 감무로 강등되었다. " 하였다. 인종 21년(1143)에 부에서 현으로 강등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때 처음으로 외관직친 현령이 배치되었다. 고려사에 동년 12월에 일선등 7개 현에 현령을 두었다는 것이다. 큰 현에 현령을 두고 작은 현에는 감무를 배치했다. 신종 2년(1199)에 적에게 함락되어 작은 현으로 강등되고 현령이 감무로 교체되었는데 이 때의 적이란 신종 원년(1198)에 일어난 만적의 난, 신종 2년(1199)에 일어난 명주와 동경의 민란을 꼽을 수 있다.
6. 대구에 병합
대동지지에 "고려 충렬왕(1274∼1308)때 대구에 병합되었다가 현령을 다시 찾았다. " 하였다. 대구의 속현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구는 현으로서 인종 21년에 의성과 함께 현령이 배치된 곳으로 세종 원년 (1419)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이러한 현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행정구역으로서는 최악의 상태이며 감무도 배치되지 않고 실질적으로는 대구현의 아전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이다. 필시 의성현에 큰 사건 ·사고가 발생한 탓인데 그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 뒤 "현령을 되찾았다. "한 것은 대구의 속현에서 해제되고 대현으로서 현령이 배치되었다는 것인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류상묵의 의성지에 우왕 원년(1375)에 허연이 안집별감으로 부임했다 하는 것은 공민왕, 우왕때 현령과 감무를 안집별감으로 통칭한 결과이며, 감령이란 것은 현령의 신라때 명칭으로 오기 이다.
7. 의성군의 개편
조선조 때의 행정구역은 도 아래에 부 ·대도호부 ·목도호부 · 군 ·현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갑오경장 다음해 고종 32년(1895. 5. 26)에 칙령 98호로 도를 없애고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종래의 목·부·군·현을 군으로 단일화하여 부 밑에 두는 제도로 개편하였다. 이때 의성과 비안현은 군으로 개편되고 군수를 두게 되었다. 전국을 23부로 분할 할 때 경상도는 진주, 동래, 대구, 안동부로 나뉘었다. 이러한 개편이 뿌리 깊은 8도제를 무시한 것으로 큰 마찰이 일어나 다음해 건양 원년(1896. 8. 4) 칙령 36호로 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채택하였다.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그 밑에 1목 ·9부·329군을 두었는데 이때 경상도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경상북도가 생기고 의성과 비안군은 경상북도의 관할이 되었다. 목, 부, 군을 5등급으로 나누어 인원 ·봉급 ·경비를 달리하였는데 의성은 2등군, 비안은 4등군이 되었다.
8. 1907년도의 행정구역 조정
1906년에 상주군의 단밀 ·단동 ·단북 단남면이 비안군에 편입되었고 조선환여승람 (1984) 건치연혁 조에 "광무 11년(1907) 6월 1일에 비안 일부를 나누어 내속시켰고" 는 비안군 외북면이 의성군 안평면에 편입된 것을 말한다.
의성지(1982) 건치연혁에 "단기4240(광무 11년)에 구 비안군과 구 의흥군의 각 1면을 이속하였고"와 의성승감(1962) 건치연혁에 "단기 4240년 (광무 11년)에 구 비안군, 구 의흥군에 각 일부를 할하여 이속하였고"는 착오로 보인다.
의성현이 군으로 개편된 직후에 편찬한 경상북도 의성군지에 의하면 의성군에 속한 면은 19개로서 남부, 북부, 단촌, 점곡, 옥산, 사곡, 빙산, 소야, 가음, 산운, 억곡, 상천, 조문, 하천, 금뢰, 석전, 안평, 우곡면이다.
9. 1909년도의 행정구역 조정
1909. 6. 25에 의성군의 우곡면이 비안군에 편입하여 18개면이 되었다.
10. 1914년도의 행정구역 개편
부령 제111호(1914. 3. 1)에 의거 부 ·군 ·면의 행정구역에 관한 폐합 정리가 추진되어 1914. 4. 1에는 대대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
비안군이 관할 현서면을 예천군 풍양면으로 이양하고는 비안군 전부가 의성군에 편입하였다.
의성군 소야면을 군위군에 이양
다음과 같은 인접지역이 의성군에 편입되었다. 안동군 남선면의 외하, 토지동, 의흥군 내화면 원제동, 용궁군 신하면(막제동외 12개동), 군위군 화곡면 사지, 율사동
이때 군내의 면을 폐합하였는데, 의성군 관내의 남부 ·북부면을 의성면, 단촌·구산면을 단촌면, 빙산면을 춘산면, 산운 ·억곡면을 산운면, 상천 ·조문면을 조문면, 하천 ·금뢰면을 봉양면, 석전 ·안평면을 안평면, 기타 점곡 ·옥산 ·사곡·가음면을 그대로 하여 11개 면이 되고 구 비안군 관할은 전면 재편하여 비안 ·구천 단밀 ·단북 ·안계 ·다인 ·신평면의 7개 면이 되어 모두 18개 면이 되었다.
11. 일부 지역 이양
부령 제173호(1914. 12. 22)에 의거 1915. 1. 1에 조문면 용대동을 군위군에 이양
12. 면의 폐합
1934 2. 1에 산운 ·조문면을 통합하여 금성면이 되어 17개면으로 되었다.
13. 의성읍 승격
제령 제12호(1930. 12. 1)에 의거 읍 ·면 제도가 1931. 4. 1부터 시행되었다.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된 기록은,
의성승감(박재구) 건치연혁에 "단기 4269년에 의성면은 읍으로 "승격되어"라 하였고
한국지방행정사(내무부, 1988) 상권 p. 195 시 ·도별 행정구역 변천에 "1936. 11. 1에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으로 되어 있고, 과거의 의성통계연보에도 "1936년에 읍으로 승격"된 것으로 되어 있어 의성읍 승격이 1936년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읍 승격 당시의 부령이 공고된 관보가 발견되어 이를 초록하며 읍 승격을 1940. 11. 1로 바로 잡는다. (1읍 16면)
조선총독부 관보 제4126호 (소화 15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령제221호
읍면 및 읍면장에 관한 규정중 좌와 같이 개정한다.
소화 15년 10월 23일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제1조의 효중 예천읍의 항 다음에 좌와 같이 추가한다.
의성읍 : 의성군 의성면 일원
영주읍 : 영주군 영주면 일원
부칙
본령은 소화 15년 11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한다.
-2003.6. 14
▷ 위 내용은 <의성군청>홈페이지의 연혁입니다.
※ 경북 <의성군청>의 연혁에서는 소문국이 조문국으로 기재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14.일직현<一直縣>
신라시대 : 직성현
조선시대 : 일직현
1895. 5. 26.(고종32년) : 일직면으로 개칭 13개리
1914. 3. 1. : 원동면과 원서면을 일직면으로 합병
안동시의 남부이며 安東市에서 서남쪽으로 16.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면이다. 원래 安東府에 딸린 일직현(一直縣)으로 1914년 一直面이라 개칭했다. 행정 주요 里으로는 龜尾·九天·望湖·光淵·明津·坪八·龍角·菊谷·造塔·遠湖·松里·雲山 등 13 개 동 20개 行政里가 있다.
松陽川·망율천·眉川 등의 洛東江 지류들이 面을 관류하고 있으며 南後面과의 경계선에 自由峰 남부 향로봉을 비롯한 낮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지 면적은 협소하고 대부분이 林野地帶이다. 양파,마늘의 주산지며 그 외에 사과,고추 등이 재배된다. 문화재로는 造塔洞에 統一新羅 時代 作品으로 보이는 五層塼塔등이 있다.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며 중앙고속도로가 관통하여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면적 85.19㎢, 인구 4,591명(2001)이다. 13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남선면(南先面)과 의성군 단촌면(丹村面), 남쪽은 의성군 안평면(安平面), 서쪽은 풍천면(豊川面), 북쪽은 남후면(南後面)에 각각 접한다.
송양천(松陽川)·망율천·미천(眉川) 등의 낙동강 지류가 있고, 풍천면과의 경계에 자유봉(自由峰)을 비롯해서 남동부의 향로봉(香爐峰:327m) 등 낮은 산지가 있다. 경지면적은 협소하며 벼농사가 주산업이다. 중앙선 철도와 5번 국도가 동부 계곡지대를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보물 57), 안동 소호헌(蘇湖軒:보물 475), 이산정(泥山亭), 사휴정(四休亭), 수옥정(漱玉亭), 서성태실(徐敵胎室), 서산서원(西山書院), 광천재(光川齋), 개성서원(芥城書院), 송리동 산성, 이로정(履露亭), 송음정(松陰亭), 산천재지(山泉齋址), 운산동(雲山洞)·망호동(望湖洞)·원동(院洞)·평팔동(坪八洞)·조탑동(造塔洞)·송리동(松里洞) 등의 고분군이 있다.
15.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
靑松郡 沿革(청송군 연혁)-history of CHEONGSONG
[고대]
본래 고구려의 영역으로 청기현(靑己縣):[청송읍]이었고 이화혜현(伊火兮縣):[청송군 안덕면]과 칠파화현(漆巴火縣):[청송군 진보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뒤 신라에 편입(編入)되어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16)에 청기현는 적선현(積善縣)으로 개명(改名)되어 본래 고구려의 야시홀(也尸忽)인 야성군(野城郡):[영덕]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이화혜현은 연무현(緣武縣)으로 개명(改名)되어 본래 삼한과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인 곡성군(曲城郡):[안동 임하면]의 영현(領縣)이 되고
칠파화현은 진보현(眞寶縣)으로 개명(改名)되어 본래 삼한 때의 소문국(召文國)인 문소군(聞韶郡):[의성]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한편,고구려 때의 조람현(助攬縣)은 진안현(眞安縣)으로 개명(改名)되어 야성군(野城郡):[영덕]의 영현(領縣)이 되었는데 진보(眞寶)는 곧 칠파화현(漆巴火縣)과 조람현(助攬縣)을 합(合)한 것이다.
[고려]
후삼국의 쟁패기(爭覇期)에 이들 지역은 각기 유력한 호족(豪族)들이 대두하여 할거(割據)하고 있었지만, 주로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후 점차 고려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922년(태조5) 진보성(眞寶城)장군 홍유(弘儒)가, 930년 재암성(載巖城)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차례로 귀부(歸附)하였다.
통일 이후 고려초 적선현은 부이(鳧伊)라 하다가 운봉(雲鳳)으로 개칭(改稱)되었다.
진보현은 고려초 924년(태조 7)에 고구려 때의 조람현(助攬縣)이었던 진안현(眞安縣)과 합하여 보성부(甫城府):<재암성(載巖城)>를 설치(設置)하였고 1018년(현종 9) 예주(禮州):[영해.영덕]에 귀속(歸屬)되었다.
예주는 고구려 때는 우시군(于尸郡) 지역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유린군(有隣郡)으로 개편(改編)하였고 다시 940년(고려 태조 23) 예주(禮州)로 개칭하였다.
연무현은 940년(태조23) 안덕현(安德縣)으로 개명되었다.
적선현은 986년(성종 5) 청부현(靑鳧縣)으로 개명하고 예주(禮州)에 예속(隸屬)시켰으며 1018년(현종 9) 다시 안동부(安東府)에 예속되었다.
[조선]
1394년(태조 3) 청부현은 보성부에 병합(倂合)되고 진보현에는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같은 해 안덕현(安德縣)은 송생현(松生縣)에 병합되었다.
1418년(세종원년)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本鄕)이라 하여 청부현와 진보현을 통합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되었다.
1423년(세종 5) 청부현과 송생현에 병합되었던 안덕현은 청송군의 속현(屬縣)이 되었고,청보현과 송생현을 통합하여 청송군(靑松郡)이 성립되고 진보현은 분리되었다.
이처럼 잦은 지역적 변화를 거친 뒤 1459년(세조5)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가 설치되어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근대]
1895년(고종 32) 청송도호부와 진보현 두 지역 모두 군(郡)이 되어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
1896년 8월(고종 33)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과 진보군(眞寶郡)이 됨.<칙령 제35호>
1914년 4월 진보군이 폐지되고 그 관하(管下) 4개 면이 청송군에 편입(編入)되었다.<부령 제111호>
[현대]
1973년 현서면의 복리.덕성리.성재리가 안덕리에 편입되었고 1979년 5월 청송면(靑松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대통령령 제9409호>
이를 계기로 1983년과 1987년에 군내 관할 지역에 대한 부분적인 개편을 실시하였다.
-2003.4. 29
▷ 위 내용은 <청송군청>홈페이지의 연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