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벽을 깨우는 소리
김 동 근
‘흰 눈같이 결백하고, 눈같이 고운 그 이름도 아름다운 백석이라네 ~’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한창이던 60년대에 부락대항 체육대회가 열릴 때면 부르던 ‘내 고향 백석(白石)마을’의 노래 가사이다. 요즈음은 고향, 망향, 실향이라는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류이지만, 나에게는 명절, 고향, 부모님이라는 말은 동심을 자극하는 그리움이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추억의 장소이다.
나의 고향은 충청북도 보은군 산외면 백석리 산골이며, 국도에서 6K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뒤로는 속리산 자락에 우뚝 서있는 장구봉의 높은 정기와 영감이 감돌고, 앞으로는 안산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으며, 그 사이에 좌로는 지퐁골, 우는 고래실로 트인 곳을 이용하여 외부와 소통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순백한 강도로 결정된 큰 차돌바위가 있었기에 백석리로 명명되었고, 자연부락 명으로는 흰돌(흔들)로 불리기도 하며, 지금도 그 바윗돌 일부가 남아서 마을의 의미를 지켜주고 있다. 주민들은 순백과 강직을 기풍으로 삼고 합심단결하며, 상부상조하는 협동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백석이라는 고향 이름은 <통영>, <고향>, <북방에서>의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 백석대학교, 인근에는 백석고등학교(일산), 백석역(지하철 3호선), 백석교회(은평)도 있다. 가끔씩 백석(白石)이라는 단어를 접하노라면 반가움과 고향을 떠오르게 한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고향 백석 하면 새벽을 깨우는 세 가지 그리움의 소리가 있다.
광명의 소리
새벽을 깨워 주었던, “꼬끼오~”의 닭 울음소리가 많이도 그립다. 현대인들에게는 단잠을 깨우는 소음으로도 생각되겠지만, 시골 마을에서 정적 속에 울려 펴지는 그 울음은 창조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대자연의 합창이다. 또한 시계가 없던 동심의 시절에는 시간을 알려주고, 새벽을 깨워주는 자명종의 역할을 해 주었던 소리이기도 하다.
새벽닭은 보통 4~6시경에 운다. 그 옛날에는 닭이 울어 새벽이 밝아지고, 오늘날은 새벽이 되어서 닭이 운다고 한다. 동심의 시절에는 그 무엇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닭이 새벽에 울 때 날이 밝아지기 시작함을 알려주는 전령사의 메시지로 들릴 뿐이다.
베드로가 들었던 새벽 닭 우는 소리가 회개를 낳게 하는 소리였다면, 고향의 새벽 닭소리는 기다림의 새 아침을 열어주는 희망의 소리였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는 성경 구절을 생각하노라면, 긴 밤의 휴식을 끝내고, 삶의 일터로 향할 새로운 하루를 일깨워주는 여명의 소리도 되고, ‘닭의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라는 말을 연상하면, 암흑의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에 빛의 도래를 알리는 광명의 소리이기도 하다.
주님이 부르는 소리
산골마을에 새벽 정적을 깨우는 또 하나의 소리로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있다. 땡~땡~땡, 나무망치로 원통형의 긴 종을 타종하면 울려 퍼지는 종소리이다.
새벽기도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생활의례이며, 불교 승려들의 새벽 예불, 민간 무속에서 정한수를 떠 놓고 샛별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신앙, 남편과 자식을 위해 부뚜막이나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 놓고 간절하게 빌고 지성을 드리는 모습도 연상이 된다.
고향 백석마을에는 예배당으로 불리는 단칸의 조그만 장로교회가 있었으며, 간혹 젊은 전도사가 시무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 연장자인 장로가 예배인도를 하였다. 그래도 우리 마을의 백석교회는 모교인 장갑 초등학교 학군 내에는 유일한 교회이었다. 선물도 주고, 성경이야기가 재미가 있어 어릴 때에는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어린이집이 없던 그 시절에는 고향인 백석마을 출신 학생들이 학교 내 우수학생을 거의 독식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단련된 기초학습의 영향으로 보인다.
잠결에 고요를 깨우며 은은히 울려 퍼지는 새벽의 교회 종소리는 주님이 부르는 소리, 엄마의 다정한 음성과 같이 친근하게 들렸다. 호기심에 주일 학생이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골목길을 걸어서 어른들만이 참여하는 새벽 기도회에 참여를 하였을 때 칭찬을 받았던 기억도 새롭다.
잠결인지 꿈길인지 새벽이면 들려오던 새벽 종소리, 투박한 마룻바닥, 희미한 호야등불, 성경책, 찬송가도 없이 두루마리 괘도에 적힌 가사를 보고 반주도 없이 불러대던 찬송가, 모든 것이 빈약했지만 그 시절의 예배당은 맑고 밝은 성도들 간에 순수하고 소박한 정이 있고, 은혜도 있었으며, 그리움의 추억도 많이 남아있다. 멋쟁이 높은 빌딩이나 화려한 무대보다도 오손도손 예배당이 보고 싶고, 잃어버린 내안에 영혼의 종소리가 그립고, 주님이 부르는 새벽의 교회 종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참사랑의 멜로디
새벽을 깨우는 가장 기억에 남는 소리는 ‘얘야, 일어나라’는 엄마의 목소리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집에서 30리길(12 km)인 읍내로 통학을 하였다. 처음에는 걸어서 다녀도 보았고, 형편이 되어서는 중고 자전거로 통학을 하였다. 그것도 자전거로는 산골짜기 고갯길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집에서 2km 지점에 있는 문암리에 자전거를 맡겨 놓고, 그 구간은 걸어서 다녔다.
일찍이 새벽밥을 지어 놓고, 5시경이면 잠을 깨우던 엄마의 목소리가 싫거나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이었기에 항상 자연스럽게 일어나던 일이 생각난다. 새벽길을 나서는 자식을 챙겨주기 위해 지은 새벽밥은 엄마의 참사랑이 묻어나는 정한수이며, 단잠을 깨워야 하는 안쓰러운 엄마의 목소리는 참사랑의 멜로디였다.
지금도 많이 그리운 것은 엄마의 사랑이다. 아직도 어머니이기보다는 엄마라고 부르고 있다. 어쩌다 시골방문을 하면, 노구의 몸을 이끌고 자식 식사를 챙겨주는 것이 불편하고 안쓰럽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보며 느끼는 것 같아 그 모습도 그리워진다. 가끔 서울 집에 오게 되면 동심의 재롱도 떨어보고, 자식이 부모가 되어 챙기고 보살피려는 관심도 가져 본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면 도심 생활이 힘들다고 시골로 내려간다. 만남의 기쁨, 헤어짐의 섭섭함, 더하여 허전함을 반복하는 생활이다.
그래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고, 사랑을 받아보고, 재롱을 떨어 볼 수 있는 엄마가 계심이 행복하다. 어린 시절에 새벽을 깨워 주던 소리로 숙련된 생활은 지나온 삶에 아침 시간을 좋아하는 생활로 이어진 듯하다.
모두가 가야 할 본향 땅! 그 곳은 보고 싶은 얼굴, 듣고 또 듣고 싶은 목소리,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모습들의 심정 공동체, 가족 공동체, 식구 공동체의 ‘One family under God’라는 기치의 천일국 에덴동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