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책계왕(責稽王)이 수즙(修葺)한 위례성(慰禮城) 수수께끼
※ 위례성(慰禮城)은 온조왕(溫祚王)이 형 비류(沸流) 어라하(於羅瑕)를 떠나 열다라(十濟)를 세울 때, 처음 세운 왕성(王城)입니다.
☞[三國史記卷第二十三(삼국사기권제23)百濟本紀第一(백제본기제1)始祖溫祚王(시조온조왕)]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 [太白逸史(태백일사)第六高句麗國本紀(제6고구려국본기)]
高朱蒙 在位時 嘗言 曰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 慮將不利於二子 歲庚寅三月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而居之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南至帶水 東濱大海 半千里之土境 皆其有也 遣人致書于朱蒙帝 願以內附 帝甚悅而獎之 冊號召西弩爲於瑕羅 及至十三年壬寅而薨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이르러 돌아가셨다.
太子沸流立 四境不附於是 馬黎等謂溫祚 曰臣聞馬韓 衰敗立至 乃可往立都之時也溫祚 曰諾 乃編舟渡海 而始抵馬韓彌鄒忽 行至四野 空無居人久而得到漢山 登負兒岳而望可居之地 馬黎烏干等十臣 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開沃澤 西阻大海 此天險地利 難得之勢 宜可都於此更不可他求也 溫祚 從十臣議 遂定都于河南慰支城 仍稱百濟 以百濟來 故得號也後 沸流薨 其臣民 以其地歸附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사방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 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 열다라(十濟)의 첫 도읍(都邑)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지금의 요동반도(遼東半島) 남동쪽 봉황산성(鳳凰山城) 자리이었는데, 동쪽의 낙랑(樂浪; 최숭의 낙랑국)과 북쪽의 말갈(靺鞨)의 침략에 견디다 못해, 마한(馬韓) 월지국(月支國)으로부터 아리수(漢水; 지금의 압록강) 건너 백 리 땅을 얻어 한성(漢城; 지금의 성천강 유역)에 천도(遷都)하고, 위례성(慰禮城)도 옮겼습니다.
☞[三國史記卷第二十三(삼국사기권제23)百濟本紀第一(백제본기제1)始祖溫祚王(시조온조왕)]
○十三年,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13년(BC.6)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九月, 立城闕.
9월,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來遷<漢山>都.
14년(BC.5) 봄 정월,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2월,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4)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17년(BC.2)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 아리수(漢水; 지금의 압록강) 건너 천도(遷都)한 후에도 열다라(十濟)는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의 침략(侵掠)에 시달렸습니다.
또 한편 먼저 계림(鷄林); 지금의 길림(吉林) 지역에서 진한(辰韓) 육촌(六村)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옹립(擁立)하여 세운 서라벌(徐羅伐)이 두만강(豆滿江)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마한(馬韓)을 노리고 있어, 온조왕(溫祚王)이 먼저 손을 쓴 것입니다.
☞[三國史記卷第二十三(삼국사기권제23)百濟本紀第一(백제본기제1)始祖溫祚王(시조온조왕)]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26년(서기 8)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1)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 도읍을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 AD.286년에 즉위(卽位)한 책계왕(責稽王)이 수즙(修葺)한 위례성(慰禮城)이 200년 전 온조왕(溫祚王) 17년(BC.2)에 낙랑(樂浪)이 침입하여 불태웠던 위례성(慰禮城)인지, 아니면 온조왕(溫祚王) 26년(AD.8)에 합병(合倂)한 마한(馬韓)의 국읍(國邑)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 또 책계왕(責稽王)이 수즙(修葺)한 아차성(阿且城)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문(碑文)에 기록된 지금의 선천군(宣川郡) 대륙산(大陸山)에 있는 아단성(阿旦城)의 오기(誤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