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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배를 담지하고 있는 질그릇들(성도)이 지향해 가야할 방향과 서야할 자리(고후4:7-11) >
글 : 김 강 석 목사
고후4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깨어질 질그릇으로 표현을 하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질그릇의 특성은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만들 때에 그 필요에 따라 내용물의 용도에 맞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만들어진 질그릇은 그 주인의 용도에 맞지 않을 때에는 가차 없이 깨어서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 질그릇의 가치는 그 질그릇 자체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그릇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쌀을 담고 있으면 쌀 항아리가 되고,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진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보화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사기 7장의 말로 바꾸면 기드온의 전쟁에서 미디안을 부수는 항아리 속의 횃불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그 횃불을 감싸고 있는 질그릇인 항아리가 깨어져야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그 횃불의 역할로 말미암아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쟁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이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으로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능력과 열심히 치러지는 전쟁이 아니라 철웅성 같은 인간자아 숭배의 현장을 치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육적 자아 해체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렇게 육적자아가 해체되어야, 항아리가 깨어져야 그래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가 평화의 관계로 화목 되어지는 것이고 이게 자기부정이고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 자체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릇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드러내 보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질그릇을 깨뜨림으로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과,
또 하나는 그 속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아~! 그 속에 무엇이 들었구나! 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질그릇의 가치는 질그릇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물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내용물이 밖으로 반드시 드러나 보여 져야 합니다.
호두열매는 단단한 껍질이 겹으로 싸여 있기 때문에 망치 등으로 깨뜰어져야 호두라는 속 열매가 우리 머리에 좋다는 견과류를 보고 먹을 수 있듯이 사도바울도 고후 4장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성을 깨어질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신자)을 보배를 담는 질그릇이라는 이 비유의 설명을 통해서 그 보배를 담은 그릇은 그 보배를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육적자아인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의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과 야망을 이 땅에서 이루려고 했던 세상의 가치들을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힘의 논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질서인 문화와 전통과 풍습과 관습, 상식에 따라 움직이며 살던 습관들이 이미 내 몸에 수년 동안 살아오면서 익숙하게 체질화 되어 있어서
그것이 양파껍질처럼 하나하나 겹겹이 쌓여서 나를 사로잡아 이 세상에 안주하도록 움직이고 있는 동인의 역할을 하는 그걸 가리켜서 옛 사람적 육적자아, 또는 자기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뭡니까?
본래 철학에서 사용 된 용어입니다. ego = 개개인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내면의 실체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 스스로 自, 나 我”자를 씁니다. 어떻게 씁니까? 손수 변(手)에 창과(戈) 자를 씁니다.
이걸 해석해 보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자아“입니다.
그런데 이걸 신앙 안에서 실행하거나 성숙시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지식( 자기상식)에 기반을 두고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삶으로 지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10:2-3절 기록에서처럼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걸 가리켜 죽음(사망)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악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붙들고 있는 이 창(戈=我)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사는 것이고 이게 성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체(주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나를 통치하시고 주관해 가심으로 인하여 나는 객체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져야할 “나”라는 그 육적 자아의 질그릇들이 겹겹이 쌓여서 자기의 방어 기재로 삼고 숨기면서 위장하고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존재의 가치와 영광과 평판과 인기와 명예를 챙기고 있을 때에는 항상 침묵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그러한 자신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가 다른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게되면 어떻게 됩니까? 핏대를 세우며 결사적으로 대항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숨겨진 자신의 육적자아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자존심상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열심히 율법대로 잘 지켰는데 어느 날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더니 그들이 지키는 율법에다가 초를 치니까 자존심이 상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마16:24절에서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정체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의 자신의 실상, 자신이 갖고 있던 자격, 조건, 능력, 배경, 열심 등으로는 하나님께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한 실체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하는 것이 아! 나는 참으로 무능한 존재였구나! 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는 하나님나라 백성 됨의 삶의 원리적인 면에서는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마치 공동묘지에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통이나 교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렵다거나, 공포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체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이 세상에서 시체들이라고 자처하며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처하는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하는 성공이나 실패, 소유의 다소, 이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 시체이니까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했으니까? 그리하여 본래 피조물의 죽은 흙의 자리,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자각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리로 변해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내 뜻과 내 의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꺾이고 부수어지는 자기부인의 삶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요한은 요 3:30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여 왔다고 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참 된 보화를 드러내기 위해 세례요한 자신은 깨어져야할 질그릇으로서의 역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내가 망해야 예수가 드러난다고 하는 말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을 담는 가에 의해서 그 내용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요강은 배설물을 담는 그릇으로, 보석함은 보석을 담는 그릇으로서 그 그릇의 자격과 됨됨이와 조건은 그의 정체성 확립에 아무런 기여를 못합니다.
그러하기에 그릇은 주인이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올바른 정체성으로서 그 그릇이 담지하고 있는 가치 평가로 인정받기 때문에
따라서 그 질그릇의 기능은 반드시 그 안에 담긴 내용물에 영광을 위해 쓰여 지고 소모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 그릇 자체의 가치나 위상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면 그 질그릇은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어떻게 훼손이 되어도 어떻게 평가를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불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 있는 그 내용물이 그 가치와 영광을 인정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질그릇 됨의 역할입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질그릇이 잘못 구워지고, 깨어지고 금이 가고 땜질을 했다하더라도, 내 안에 보화로 계신 그리스도만 간직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도, 깨어지는 것도, 멸시를 당하는 것도 질그릇 뿐, 보화는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보화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계속 후패해지고 내 안에 예수의 은혜만이 더욱더 빛나게 되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이들을 가리켜서 성도, 또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고후 4:15,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그릇 됨에 자아인식 속에 있는 이들은 점점 자신의 치장이나 겉모습 외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몸에 짊어질 십자가의 삶이며 자기부인의 삶입니다.(고후 4:7-12) 그게 우리가 진짜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렇게“나”라는 세상나라가 하나님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면 육신의 나라가 조금씩 점령을 당하면서“나”라는 나라 속에 갇혀있던 새 생명이 결국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게 되고 결국 육으로서의 "나는" 천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소멸(멸절)되어져 감으로 인해 십자가 뒤로 숨겨지게 되는 원리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되면 이 새 생명에 의해 어미가 먹히고 결국 새 생명이 출산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어미의 몸이 아이의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잉태 된 그 아이에 의해 보기 싫은 모습으로 망가지잖아요?
그 원리에 의해 우리가 이 육신의 몸을 새 생명에 의해 먹히고 점령당하고 결국에는 새 생명으로 확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뜻과 의지가 이 세상 속에서 자꾸 부인 당해지고 저와 여러분의 희망과 야망과 비전과 뜻이 하나님의 의해 기각 당해지는 경험을 할 때에 그러면서 점점 내 뜻은 이거 아무 것도 아니구나! 성취되어져 봤자! 별 것 아닌 거구나!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아 가는 그 상태가 현재적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진짜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귀한 그릇으로 간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자기 선시서 고후 4:7절 이하에서 질그릇에 불과한 것에 보배를 두신 것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게 성도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되면 성숙 될수록 이 자기부인이 잘 되어져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토를 달지 않고 바로 꼬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게 잘 되면 잘 될수록 타인에 대한 용서와 관용과 배려와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고후 6장에서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심정이) 넓어졌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절제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내가 아니까? 확연히 깨달아지니까요? 예수님도 이 자기부인의 삶을 이 땅위에서 사셨습니다. 그게 체휼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자리로 내려가 인간과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분이 인간의 눈높이 내려가서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던 것입니다.(빌립보서 2:6-11)
이렇게 성도의 육적 자아가 변화되는,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의 육적 자아인 그의 뜻과 의지가 부인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질그릇 같은 성도의 육적자아 안에 들어와 계신 보배로우신 예수가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성숙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성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의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로 나타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안에는 우리 스스로 이루어 내는 성숙과 변화가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갈 5: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이제 성령에 이끌린 삶을 사는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본질의 상태입니다. 이미 존재(being) 된 자로서의 그의 삶을 지향하게 되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은 내 안에 계신 보배를 드러내는 존재로서 서야하는데 그 보배인신 성령께서 들어나기 위해서는 질그릇인 내가 반드시 깨어져야
그 때 비로소 내 안에 담지하고 있는 그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내 밖으로 드러나서 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이끄시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에게는 이미 그가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복을 받는 자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혹자의 주장처럼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으로 설명하게 되면 결국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의한 육적인 복도 함께 챙겨야 한다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는 어불성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 스스로가 실천을 기반을 둔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편으로 사용된 하나님의 언약적 용어로서 그 믿음의 주체 또한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혹자가 주장하는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으로 설명하는 분들의 이러한 논리의 주장은 성경을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한 통전적인 시각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의 토대로 견지해 가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구속사의 흐름의 맥락을 잘 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본질상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칭의와 더불어 성화와 영화가 동시적이며 현재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는 아직 유한한 존재로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그러한 긴장 관계성에서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성령의 소욕을 좇아 거듭난 새 인격을 발휘해 나감으로서 칭의적이고, 성화적이며 영화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14:20-24절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와 연합 된 성도는 주님이 예비한 처소의 내용인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복되고 영광스런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그걸 자연스럽게 삶의 실질로 격발되고 발휘되는 삶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빌립보서 2:12절 이하에서“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신자가 지향해 가야할 방향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도와 연합 된 관계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이 완전히 맞추어 지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양육의 훈련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과거시제와 구원의 현재시제와 더불어 미래시제를 미리 선취적으로 맛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 땅, 이 세상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에 이끌리심에 의해 반드시 그리로 지향해 가도록 지어져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해서 신자들에게 그 방향을 잃지 말라고 책망과 더불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