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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7:1-21) 스토커(Stalker)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스토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스토커'라고 하는 것 요즘 199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도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진즉부터 스토커로 인한 살인 같은 것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상태인데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스토커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주로 대상들이 연예인들인데 그 스토커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사전적으로 정확하게 다시 한 번 그 뜻을 살펴보면 이런 것이에요.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가 아무리 싫어해도’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싫어해도 즉, 상대방의 의사나 의지를 무시한 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편집광적인 망상을 부풀러 가면서 자기혼자 생각을 하는 겁니다. '내 애인이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상상을 하면서 어디든지 따라 다니고 또 어디에서든지 기다리거나 전화를 걸어 대고 끈질기게 쫒아 다니는 그런 사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지나 의사는 아무 상관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그 사람을 끈질기게 쫒아 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을 우리가 스토커라고 합니다. 'Stalker'의 뜻은 '몰래 다가온다. 살며시 다가온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연예인이 최근에 들어서 스토커를 고발을 했어요. 한 남자가수를 쫓아 다니는 이십대 여자 아이인데 정말 지겹겠더라고요. 3개월 동안 밤12시부터 아침까지 매일 전화를 건다는 거예요. 문자 보내고 전화하고 밤12시부터 잠도 안자고 아침까지. 그 가수가 스케줄을 소화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어떻게 알아냈는지 또 그 전화로 12시부터 아침까지 전화를 또 건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발을 했어요. 주로 이렇게 연예인들이 스토커의 대상이 되는데 때로는 여러분! 목사님들도 그래요.
곽선희 목사님 본인이 말씀하신 건데 한 여자 분이 곽선희 목사님을 그렇게 쫓아 다녔데요. 곽선희 목사님이 가끔 지방에 집회를 인도하시러 내려가시면 첫날 집회를 시작하려고 강단에 서시면 맨 앞자리에 그 여자가 앉아 있다는 겁니다. 기절하는 겁니다. 광주로 가건, 대구로 가건, 부산으로 가건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앞에 와 앉아 있다는 겁니다. 섬뜩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영락교회 있을 때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제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몸이 불편하셔서 남한산성에서 요양 차 거주하시면서 주일날이 되면 휠체어를 타시고 교회로 내려오십니다. 한경직 목사님 기념관 안에 목사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공간이 이렇게 있어요. 바로 기념관 안쪽 한쪽 옆으로 목사님들이 주일날 식사하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식사하러 들어가 보면 항상 여자 분이 마흔 다섯 정도의 여자 분이 잠바를 입으시고 항상 손을 이렇게 하고 계세요. 한경직 목사님 기념관 문 앞에서. 제가 다른 목사님에게 물었어요. 저분이 왜 저기 계시냐고? 저 분이 누구시냐고 했더니 당신이 한 경직 목사님을 경호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마치 경호원들이 속에 총을 차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손을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여자 분이 이렇게 하고서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제가 들어 갈 때도 이 자식이 누군가 쳐다보는 겁니다. 하여간 한경직 목사님만 오시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항상 그렇게 자기가 지킨다고 문 앞에 서있는 여자 분이 있었어요. 한경직 목사님 복도 많으시지요.
여러분! 사람이라는 게 참 특이해서요. 끊임없이 나를 봐 주는 시선을 찾아다닙니다. 연예인들은 대중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기를 원하고 있고 또 누가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기면 그 이성이 나한테 눈길을 한 번 주기를 바라고, 또 학교에서는 선생님께서 따듯한 시선을 한 번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려고 합니다. 시선을 간절히 원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끊임없이 시선을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욥의 고백 속에서 참 처절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이 하나님을 보는 믿음을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정직함은 진짜 여비서의 정직함으로 사장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충직한 여비서가 어디 있겠어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이 갖고 있는 하나님 경외요, 하나님에 대한 정직으로 보셨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참으로 철두철미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믿음이 얼마나 철저한가 한번 제가 그런 구절들을 골라내 봤어요. 하나님께서 늘 자기를 지켜보시는 생각이 욥의 신앙의 뿌리였습니다.
자식들을 키울 때도 자식을 이 세상 기준으로 잘 키워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식 양육을 원했던 것이에요. 자기가 마음대로 어떤 자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늘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굉장합니다.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하는 말은 죽은 다음에 8절에 나옵니다. 그 다음 12절 “내가 바다입니까 바다의 괴물입니까”라고 하는데 바다나 바다 속에 사는 괴물이 사람의 삶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해를 끼치지 못하게 지키고 감시한다는 말입니다. 14절에 보면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는 말은 꿈속에서도 나타나시고, 그리고 16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 니이다.”라고 합니다. 17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라는 말은 그를 관찰하신다는 겁니다. 18절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 19절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 20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주여 내가 범죄 하였던들 주께 무슨 큰 해가 되오리까 어찌하여 나를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라고 하는데 참 기가 막힙니다. 너무너무 힘든 고통 가운데 욥이 하나님의 시선을 향해서, 제발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래 중에 그런 노래 있지요.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딴 딴 딴 따다단 날 보러 와요’라는 그런 노래 있잖아요. 욥은 거꾸로 제발, 제발 아까 그 가수의 스토커가 밤 12시부터 아침까지 전화를 건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욥은 지금 하나님이 스토커가 된 겁니다. 꿈속에서도, 깜짝깜짝 놀라게. 얼마나 지독한 스토커인지 꿈속에서도 나타납니다. 꿈속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분초마다 아침마다 나를 도우시며 권징하시고 침 삼킬 순간도 나를 잊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계시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 시선이 좋으면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싫으면 어떻겠어요. 어쨌든 이 욥의 신앙에는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통 전체가 다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토커 같은 것이에요.
여러분! ‘펄펄 눈이 옵니다.’라는 노래 있지 않습니까? 그 눈은 snow가 아니라 eyes 라고 생각하면 온 세상에 펄펄 눈이 내려요. 하나님의 눈이 온 세상에 펄펄 내려서 우리를 늘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스토커처럼. 그 시선을 좋아하면 모르겠거니와 또 아니면 불신앙에서처럼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면 되지요. 편하지요. 망각하고 살면 돼요. 그런데 욥의 신앙에서는 그게 허용이 안 되므로 이 신앙이 대단한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이 지금 내 옆에서 분초를 다투어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화를 내고 그렇게 신경질 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이나 이런 생각을 쉽게 하지요.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고 화를 내지요. 성질을 내지요. 하나님이 분초마다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있고 침 삼킬 동안도 예외 없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인상 쓰고, 그렇게 마음먹고, 그렇게 비판하고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내 앞에서 나를 보고 계시다면 그 분의 의견을 물을 수밖에 없고 그렇잖아요? 어떻게 그분 앞에서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럴 수 없지요. 그 분이 좋으면 모르겠거니와 내게 이렇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는 이 상황에서 욥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무서운 스토커가 된 겁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 상황이 발전되면서 마지막에 ‘내가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봅니다.’라는 신앙의 단계로 바뀌지 않습니까? 야! 참 드라마틱하잖아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우선 배워야 될 것은, 침 삼킬 동안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신앙 이예요. 이게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신앙의 뿌리라는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므로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 조심스럽지요.
저도 스토커를 당해 봤어요. 제가 얼마나 놀랬느냐면 주차를 하다가 자동차를 기둥에 박아 버렸습니다. 문자가 계속 오는 거예요. 어떤 때는 문자가 60개 70개 80개가 와요. 사람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마음의 밸런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극적으로 변하느냐? 영화를 보면 스토커를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속 전화하고 만나자고 그러고 12시부터 아침까지 계속해서 아니 미친 여자 아닙니까? 끔찍하잖아요.
곽선희 목사님 부흥회 하러 가셨는데 그 앞에 앉았는데 대구에 가건 광주에 가건 그 앞에 딱 앉아 있어 봐요. 얼마나 섬뜩하겠나? 그런데 예를 들어 한 젊은 연예인이 스토커를 당합니다. 스토킹을 당해요. 그래서 고소해서 경찰서에 갔어요. 그 여자를 잡았어요. 그 여자를 봤어요. 그 외모가 갑자기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조서를 꾸미는데 보니까 몇 살이고 어느 학교를 나오고 쭉 얘기를 하는데 멀쩡한 거예요. 그래서 둘이 대화를 하는 시간을 줬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정신병자가 아니라 대부분 스토커가 정신병자인데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겁니다. 몇 번 만나 봤더니 진짜 사람이 괜찮은 거예요. 스토커를 사랑하게 되니까 완전히 빠져 버리게 된 겁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느냐? 자기가 스토커가 되는 거예요. 결혼해서 회사 나가서 아무 때나 틈만 있으면 전화를 걸어 대는 거예요. 거꾸로 자기가 스토커가 되는데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분초도 빠지지 아니하고 침 삼킬 동안도 남김없이 다 우리를 지켜보고 계세요. 아주 민망해 죽겠어요. 무슨 행동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계속해서 스토커처럼 우리를 쫒아 다니시고 보고 계십니다. 욥이 아주 힘들어서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겁니다. 이러다가 욥이 하나님을 딱 봅니다. 하나님을 보는데 이게 웬일 입니까? 너무너무 아름다운 하나님, 너무너무 좋은 하나님, 그 앞에 나는 지렁이 같은데 이상한 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지렁이 같은 나, 벌레 같은 나를 스토킹 하셨다는 거예요. 벌레 같은 내가 그 분을 스토킹을 해야 되는데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마치 장동건씨가 이름도 없고 능력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한 여자를 스토킹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스토킹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나를 분초마다 지켜보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정신이 도셨나봐. 나 같은 것을 그렇게 봐야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욥이 그러잖아요. 사람이 무엇이관데 내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된다고 그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나를 왜 나를 스토킹하고 계시냐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일어나는 변화가 뭡니까? 그동안 계속해서 나를 스토킹 한 그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면서 ‘야, 하나님이 나같이 벌레 같고 더럽고 추악하고 볼 것이 없는 나를 왜 그렇게 스토킹을 하고 다니셨고 왜 침 삼킬 동안도 빠짐없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것인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면서 당신을 보게 하시는데 하나님 뵙고 나니까 그 아름다우신 우리 하나님, 그 좋으신 우리 하나님, 그 하나님만 계시면 되겠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침 삼킬 동안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스토킹하면서 쫒아 다닙니다.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는 겁니다. 스토커를 사랑해서 내가 거꾸로 스토커가 되는 것, 이게 바로 복음의 역사라는 것인데 감격스럽지 않아요?
나 같이 정말 별 볼일 없는 것을 침 삼킬 동안도 잊지 않고 지켜보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아버지!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무엇일지라도, 그러니까 욥의 신앙을 우리가 이해 할 때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의 신앙과 비교하면 참 좋아요. 욥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못지않게 사도바울이 고통스러웠어요. 살점이 뜯어지는 매를 맞고 감옥에 던져 졌습니다. 거기서 기뻐하며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자기가 고통을 받고 있는 그 광경을 매를 맞고 살점이 떨어져 가는, 그 광경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만 의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스토커로 의식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스토커가 된 거예요. 그 매 맞는 그 순간에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품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갖게 되고 그 하나님을 보고 갖게 된 감격이 너무너무 커서 욥과 같은 고난의 현실을 넘어서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에요.
욥은 지금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을 뿐입니다. 사도바울과 제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스토커가 된 상태예요. 끊임없이 하나님을 쫒아 다니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거꾸로 침 삼킬 동안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는 스토커가 되었을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환난도 그들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스토커처럼 욥을 지켜보고 계심을 욥이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게 되는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시간이 있어야 돼요. ‘분초마다 침 삼킬 동안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라는 이 믿음이 없이는 보는 단계로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한다는 게 뭐에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내 생각 죽어야 하고, 내 계획 죽어야 하고 내 소원 죽어야 하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십자가의 반쪽인 여비서의 위치에요. 그 다음에 나머지 십자가의 반쪽은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보고 내가 하나님을 갖고 내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스토커, 비유적으로 끌어들여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번 설명해 봤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 생기고 멋진 연예인들에게 스토커가 붙습니다. 그런데 이거 웬일입니까? 볼 것 없이 추악하고 악할 뿐인 나의 하나님께서 스토커가 되셔서 마치 하나님 눈에는 내가 무슨 멋진 연예인이라도 되는 듯이 붙어 다니시며 지켜보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스토커적 사랑을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가 이제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 보는 자리로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에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어쩌다가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 큰 사랑을 목포수와 같이 부어 주시는 겁니까? 오늘 하루도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만 바라보는 아버지의 스토커로 살겠습니다.
17절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그를 관찰하신다는 겁니다....아!!! 이말씀에 너무도 목이 매입니다...이좋은
말씀 올려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