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떨어질 때 (수필)
예진당 / 황해숙
하마터면 흰 눈이 내린다고 탄성을 지를 뻔했다. 봄비가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몰래 다녀간 후 벚나무 가지마다 전율하면서 꽃잎을 사정없이 떨구고 있었다. 꽃샘바람이 벚꽃의 개화를 시기와 질투로 방해하던 날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히 팝콘을 터뜨리듯 가지마다 연분홍 꽃을 달고 있었다.
겨우내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던 나목을 잊지 못한다. 오랫동안 기다리다 봄의 문턱을 넘는 마지막 고개 꽃샘추위를 견디면서 가지마다 생명을 흡수하여 전달하고 있었을 것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맞는 꽃샘바람은 겨울 한파보다 더 차갑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하여 외출할 때마다 두꺼운 외투를 입었다. 그때 벚나무 가지 끝마다 사춘기 소년의 여드름 같은 꽃망울이 맺히고 있었다. 가히 생명의 탄생은 신비 그 자체였다.
봄바람은 따뜻한 햇볕을 등에 업고 훈풍으로 다가왔다. 그 입김이 닿은 가지마다 연분홍 꽃봉오리를 열어서 속살을 드러냈다. 이때다 싶었을까. 꿀벌들이 윙윙거리며 꿀을 모으기 시작했고 나비들의 우아한 춤사위는 쉬지 않았다. 나는 칙칙하고 두꺼운 외투를 벗고 소녀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 아름다운 꽃잎을 매달고 며칠이나 있었을까.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짧은 시절을 피었다 지고 만 것이다. 매년 봄마다 맞이하는 시절인연이었건만 유독 올해는 벚꽃의 낙화가 애달프기만 했다.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눈 깜짝할 새에 봄날이 가버린 것만 같아 울고 싶었다.
나무 아래에서 하롱하롱 떨어지는 꽃잎을 손으로 받아보았다. 나무에 매달렸을 때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꽃이었건만 분분하게 떨어지는 꽃잎은 쓸쓸하게 보였다. 우리네 인생도 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아름다운 한 시절이 있었으니까.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꽃다운 시절이라고 할 때가 있었다. 이순을 넘기고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순간을 감상한다.
나의 스무 살 시절에도 벚꽃은 피었으리라. 그리고 눈처럼 펄펄 날렸으리라. 그때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친구들하고 까르르 웃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바빴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에 꿈 한 조각 걸어두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여행자처럼 들떠있었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절이었으나 불편하지 않았고 심심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웃는 얼굴이 벚꽃보다 예뻤고 그 웃음소리에 진한 향기가 묻어 있었다. 누군가 지금 내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여장을 챙길 것이다.
일장춘몽이었다. 벚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는 것, 내가 삶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꽃다운 시절을 지나온 것도 한바탕 봄날의 꿈이었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 지금의 시절을 또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세월이 저만치 나앉았을 때 이순의 시절도 꽃다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쓸쓸하게 미소를 짓는다.
꽃이 진 자리마다 초록색 구슬 같은 열매를 매달고 뜨거운 태양을 반길 것이다. 태양이 두툼해지는 계절이 다가오면 붉은 구슬은 검붉게 익어갈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서럽지 않은 이유다. 꽃답던 시절 지나고 보니 가지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내 삶의 광주리에 열매를 담으니 가득하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자위한다. 벚꽃이 지는 날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