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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 2. 04-2
<음악 열등국가가 만들어 낸 최후의 무대 컨텐츠, 뮤지컬>
17. 오페레타의 확산
이로부터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는 단숨에 프랑스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에 수출된다. 못된 것은 빨리 퍼지는 법이다. 여기저기서 ‘나도 보고 싶어!!’라는 소리가 들리게 된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펜바흐와 결혼한 여자는 런던의 유력한 흥행업자와 관련 있는 집안이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오펜바하의 오페레타는 ‘본국 동시 초연’까지 하게 된다. 1년에 4개씩 나오니깐, 파리에 나오는 순간, 런던에서도 영어판으로 바로 올라가게 된다.
급기야 오펜바흐의 작품은 당시 여전히 유럽 문화의 수도였던 비엔나에 진출한다. 그리고 독일에도 들어간다. 또한 이탈리아로 퍼진다. 이어 스페인을 휩쓴다. 이러면서 오페레타는 전 유럽에 거대한 흥행시장을 만들게 된다.
결국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전통 회고적인 비엔나조차 오페레타의 붐은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펜바흐의 작품들은 연속해서 비엔나에서 흥행에 성공한다. 그럼 비엔나의 예술가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다. 비엔나에서도 ‘어라? 저게 되는데. 우리가 해도 돼?’ 이래 가지고 비엔나의 예술가들도 전부 오페레타 시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경기병 서곡’, ‘시인과 농부 서곡’ 등 주로 오케스트라곡으로 유명한 프란츠 폰 주페(Franze von Suppe)였다. 우리는 주페의 오케스트라 곡밖에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 사람의 본업은 오페레타 작곡가였다. 그런데 음악사에서 절대로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18. 박쥐
그래도 역시 뼈대 있는 가문답게, 오페레타의 최고 걸작은 비엔나에서 나온다. 바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가 1874년에 만든 ‘박쥐’이다.
이 작품은 꼭 보시기 바란다. 그리 길지도 않다. 어떤 뮤지컬보다 재미있다. 스토리도 자기를 모욕한 귀족에 대한 일종의 사적 복수극이다. 그리고 음악도 죽인다. 완전 팝음악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요한 스트라우스는 오페레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미 당대에 왈츠 작곡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너도 나도 다 오페레타를 했지만, 자존심이 있어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계속 미적대고 있었는데, 옆에서 ‘선생님도 한 번 해보시죠?’ 그러니깐 ‘그럼 한 번 해볼까?’라고 해서 작품 하나를 썼는데, 개박살이 났다.
그러니깐 야마가 확 돌게 된다. 그래도 ‘씨..내가 자존심이 있는데..’ 그래서 다시 진짜 신경를 써서 만든다. 보통 주페 같으면 한 작품을 두 달만에 썼는데, 요한 스트라우스는 그보다 더 열심히 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게 오페레타 최고의 걸작이 되는 것이다.
‘박쥐’는 헝가리 출신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의 ‘즐거운 과부(The Merry Widow)’와 함께 오페레타의 탑 투(Top two)를 이루는 작품이다. 전편을 즐겁게 보기 바란다. 이걸 보고도 지겹다면, 뮤지컬를 볼 필요없다. 그런 건 안 봐도 우린 다 살 수 있다.
그런데 역시 요한 스트라우스였고, 역시 빈이었다. 그는 이 오페레타 안에 유려한 관현악의 왈츠를 정말 화려하게 펼쳐놓았다. 춥고 가난한 파리의 오펜바흐는 결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보는 재미에 더해서 듣는 재미가 있다.
19. 거지 오페라
런던은 브로드웨이와 더불어서 세계 뮤지컬 계를 양분하고 있는 웨스트 엔드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영국은 맛 없는 피쉬 앤 칩스(FISH & CHIPS)나 먹는데 무슨 좋은 작품을 쓰겠는가? 문학적 전통은 깊으나 훌륭한 음악가는 찾기 어렵다.
영국의 모차르트라고 불리우는 헨리 퍼셀(Henry Purcell) 정도가 있는데, 내가 볼 때 36살에 죽은 거 말고 모차르트와 별로 공통점이 없다. 아무튼 헨리 퍼셀 정도의 사람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영국은 제대로 만들지는 못해도, 자신들의 강력한 부를 바탕으로 돈 주고 사와서 감식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다. 그러니깐 영국인들은 타고난 비평가들이다.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브로드웨이와는 다른 뮤지컬 전통을 만들게 된다.
헨델이 와서 대규모의 블록버스터 급 오페라로 영국을 휩쓸고 있던 1728년에 존 게이(John Gay)는 이상한 작품 하나를 발표한다. 바로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라는 일종의 영국판 오페라 코미크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음악적 요소가 거의 전무하고 앙상한데, 놀랍게도 근엄한 런던의 시민들에게 ‘와! 너무 쇼킹하다!’는 충격을 주면서 엄청난 대박이 난다.
그런데 이걸 런던에서 올린 제작자 이름은 리치다. 그래서 그때 런던에서는 농담으로 ‘게이는 리치가 되고, 리치는 게이가 되었다.’는 말이 돌았다. 게이(gay)의 또 다른 뜻으로 ‘즐겁다’라는 게 있다. 즉 ‘게이는 부자가 되고, 리치는 즐겁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John Gay
이게 이른바 ‘발라드 오페라’의 효시가 된다. 여기서 발라드는 여러분이 아는 그 발라드가 아니다. 발라드는 여러 가지 뜻으로 진화를 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의 음악사에서 ‘발라드’는 굳이 우리 나라말로 옮기자면 담시(譚詩)라고 한다. 서사적인 구조의 스토리가 있는 시를 발라드(ballad)라고 한다. 혹은 스토리가 들어 있는 시적 형식이 들어 있는 기악곡을 ‘발라드’라고 한다.
18세기 전까지 오페라 전성기 시대의 오페라에도 스토리가 있었지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페라는 연극이 아니었기 때문에 치밀한 캐릭터 사이의 갈등, 인간의 고뇌와 내면, 개인적인 인간을 표명하는 대사가 없었다. 오페라는 그냥 이미지만 있고, 껍데기만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깐 무대 위의 ‘배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무대 위에 있는 뮤즈일뿐이었다.
그런데 왜 ‘거지 오페라’가 산업 혁명의 절정기에 달하던 런던의 노동자 계급에 먹혔냐 하면, ‘이건 생생한 이야기인데. 사실적인 얘기야. 일상적인 얘기야. 이거 그냥 절로 동감이 가네. 내 얘기 같네.’라는 이른바 사실주의적 환기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오페라가 결국 20세기에 와서 몰락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물론 안 그런 오페라도 있지만, 대다수 오페라의 이야기가 너무 뻔했다. 결론도 너무 뻔했다. 그런 것을 4시간이나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대중들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안에 좋은 노래와 음악이 있었지만,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 번 나온다. 그런데 스토리라도 재미있으면 볼텐데, ‘다음 장면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하는 궁금증이라도 있으면 계속 볼텐데, 결론이 뻔했다. 이래서 결국 오페라가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뮤지컬은 오페라가 저질렀던 내러티브(narrative)의 허약함을 벗어나면서 자기 경쟁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뮤지컬의 등장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1728년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라 할 수 있다.
20. 웨스트 엔드의 직계 선조
런던에 노동자 계급이 많다보니깐, 아까 베네치아의 산 카시아노 극장처럼 노동자들이 값싸게 가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뮤직 홀(Music Hall)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게 많아졌지만, 부르주아들은 거기에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의 집이 넓었기 때문에 자기들 응접실에서 ‘저 사람들은 저러고 노는데, 우리도 한 번 해볼까?’라고 해서, 응접실에서 ‘거지 오페라’ 같은 발라드 오페라는 공연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들 중에도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기도 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응접실에서 발라드 오페라를 공연했는데, 여기서 스타가 등장한다.
대본 작가인 길버트와 작곡가인 설리반이 함께 하는 길버트 앤 설리반(Gilbert and Sullivan)이라는 콤비가 등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들에 의한 런던에서의 작품이 웨스트 엔드의 직계 선조라고 생각한다.이 사람들의 작품은 꽤 많다. 검색해보시면 굉장히 많이 나올 것이다. 한 번 보기 바란다. 굉장히 현실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21. 미국의 상황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미국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도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을 물론 다 알고 있었다. 왜냐? 미국인이 모두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18, 19세기에 다양한 유럽의 오페레타들이 계속 신대륙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신대륙 안에서도 토착적인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로 파르스(Farce)라는 게 있다. 짦은 풍자소극(諷刺笑劇)으로 개그와 비슷한 것이다. 음악극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보드빌(vaudeville)이라는 게 있다. 19세기 미국의 도시 를 돌아다니는 일종의 순회 극단들이다. 우리로 치면 유랑극단과 같은 것이다. 보드빌의 공연 내용은 종합선물세트였다. 즉 춤도 있고, 개그도 있고, 마술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가끔 가수가 나와서 노래도 부른다. 이런 각종 장르들을 하나로 모아서 하는 흥행물이 보드빌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는 토착적인 것에서부터 이야기하고 싶어하니깐 보드빌을 본격적인 미국 뮤지컬의 시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레뷔(revue)라는 것도 있다. 레뷔는 보드빌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다. 레뷔가 보드빌과 다른 점은 레뷔에는 테마가 있다는 것이다. 보드빌이 각 코너를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하는 거라면, 레뷔는 주제를 정해서 한다. 예를 들어서 도둑에 대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것이다. 뮤지컬에 관심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지금도 뮤지컬 레뷔라고 해서 우리나라 극장에 올라가는 것도 몇 개 있다.
그리고 수입품인 오페레타가 있었다.
이런 토착적인 요소와 수입적인 요소가 뒤섞이면서 서서히 흥행 시장의 나라다운 것들이 미국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지방에서 인기 있었던 것이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이다. 민스트럴(minstrel)은 음유시인이라는 뜻이지만, 이름과 달리 그렇게 폼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도 일종의 풍자극인데 좀 치사한 방법을 쓰고 있다. 풍자라는 게 원래 가난한 사람이 가진 자들을 비꼬는 것인데, 이 쇼에서는 가진 놈이 없는 자를 비꼬고 있다.즉 백인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나와서 쇼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아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줄였는데, 오페레타가 19세기말 유럽에서 터질 때, 배우 가운데에서 스타들이 나온다. 비록 파리넬리 같은 카스트로트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가장 주목을 받은 희극배우들은 여장을 하는 남자 배우, 남장을 하는 여자 배우였다. 일부러 성을 바꾸어서 풍자의 강도를 높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백인이 시꺼먼 흑칠을 하고 나와서 사람들을 웃겼다. 흑인들이 하는 촌스럽고 이상한 짓을 흉내내면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좀 더티했다.
그리고 벌레스크(Burlesque)라고 하는 것은 익살 광대극이다. 광대가 아예 주인공으로 나와서 소동을 피우고, 미친 짓을 하고, 놀리고, 웃기고, 속이고 하는 것을 벌레스크라고 한다.
22. 미국 뮤지컬의 등장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이라는 말이 붙게되는 장르가 20세기에 와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가볍고 웃기고 조롱하고 풍자적인 것들이 대중들에게는 먹혔다. 즉 아무래도 ‘뮤지컬 코미디’가 초기 미국 뮤지컬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장르였다.
이런 것들에 기반해서 미국 안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창작 뮤지컬 코미디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1866년 뉴욕 니그로즈 가든에서 공연된 ‘블랙 크룩(The Black Crook)’이다.
그리고 20세기가 되면, ‘다호미에서(In Dahomey)’라는 작품이 나온다. 이것은 처음으로 진짜 흑인들이 배역으로 등장하는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그대를 노래하리(Of Thee I Sing)’ 같은 1932년도의 작품에 이르게 되면, 회전 무대, 돌출 무대가 등장한다. 즉 현대 뮤지컬에서 보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무대가 완성된다.
23. 쇼 보트
그리고 미국 뮤지컬에서 하나의 획을 긋게 되는 미국적인 작품을 쓰는 작곡가가 등장한다. 바로 제롬 컨(Jerome David Kern)이다. 그는 1920년대에서 40년대까지 미국 뮤지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롬 컨
그리고 오스카 해머스타인(Oscar Hammerstein)이라는 50년대까지 미국 클래식 뮤지컬 시대를 장식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헤머스타인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운드 오브 뮤직’ ‘왕과 나’와 같은 작품을 쓴 극작가이다.
‘해머스타인, 제롬 컨’ 콤비가 젊은 시절인 27년에 만든 ‘쇼 보트(Show Boat)’야말로 산업적으로 미국 뮤지컬의 본격적인 원년을 알리는 작품이다.
오스카 해머스타인
그래서 아예 이름도 ‘뮤지컬 코미디’라고 하지 않고 ‘뮤지컬 플레이’라고 한다. ‘이 뮤지컬은 웃기는 게 아니야. 우린 진지해.’라는 뜻이다. 쇼 보트는 지금도 많이 공연되고 있고, 영화로도 3번이나 만들어졌다. 이 뮤지컬은 개막 후 582회의 공연을 하면서, 이른바 장기공연시대의 확실한 출발을 알리게 된다.
쇼 보트의 내용은 환락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배 안에서 사람도 웃기고 연주도 하는 흑인이 낀 공연단의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랑과 결혼의 문제도 있지만 인종의 문제까지 모두 담겨 있다. 당연히 흑인 배역들도 들어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뮤지컬이라는 것이 단순히 웃고, 즐기고, 깔깔거리고 끝나는 희가극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당대의 핵심 문제를 진솔하게 다루는 것이 뮤지컬에 담아야 될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을 웃기고 재밌게 해 주는 것만으로 호주머니에서 돈 털어내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롬 컨이라는 그야말로 미국을 상징하는 이 작곡가는 지금 들어도 너무나 좋은 노래들을 많이 넣었다.
특히 여자 주인공이 부르는 빌(Bill)이라든지 ‘After the Ball’ 같은 노래는 복잡한 뮤지컬의 코러스 라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노래이다. 특히 온갖 차별과 가난 속에서 묵묵히 삶을 살아내야 되는 흑인 주인공이 부르는, 쇼보트의 주제가라고 할만한 ‘Ol' Man River’라는 노래는 독자적으로 크게 히트를 해서, 몇 십 년동안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렀고, 나중에 두 번째 뮤지컬 영화에서 배역을 맡은 폴 로브슨(Paul Robeson)이라는 유명한 흑인 스타가 있다. 폴 로브슨은 1920년대의 흑인이었지만, 아이비 리그를 나온 흑인 엘리트였다. 그렇지만 흑인이었기 때문에 정말 참혹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정말 똑똑한 진보적인 흑인이어서 흑인 사회의 자랑이었다. 사상적으로도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었고,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50년대 매카시즘 시대, 이 사람을 소련의 간첩으로 몰아간다. 그때 정말로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지금도 많이 듣는 이야기인 ‘그렇게 좋으면 평양으로 가!’라는 말과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결국 그는 정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폴 로브슨은 20세기 미국 흑인 인권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사람이 된다. 바로 이 사람이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된 계기가 바로 쇼 보트에서 부른 ‘Ol' Man River’라는 노래때문이었다.
24. 뮤지컬 영화의 등장
그렇게 이제 뮤지컬이 확 터지나 했더니, 바로 대공항이 터지면서 뮤지컬 계는 한번에 확 주저앉아 버린다.
하지만 대공항이 폭발하면서, 그래도 영화가 제일 쌌기 때문에, 30년대에 뮤지컬을 헐리우드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뮤지컬 영화’ 라는 장르를 열게 된다.
그래서 1933년 최고로 히트한 뮤지컬 영화가 여러분도 다 아는 42번가(42nd Street)이다. 사실 42번가는 뮤지컬이 아니고 뮤지컬 영화였다. 이게 무대 뮤지컬로 초연하게 되는 것은 거의 50년이 지난 1980년에 가서이다. 이건 처음부터 ‘뮤지컬 영화’로 나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온 또 다른 유명 작품으로는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가 있다. 이것도 처음엔 영화로 나온 것이다. 무대 뮤지컬 작품으로 올라가는 것은 발표 후 한 20년이 지난 뒤였다.
이렇게 미국은 독특하게도 경제 공황기에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를 만들게 된다. 왜냐하면 공연물은 티켓 가격이 아무래도 비싸기 때문에 경기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면 관객이 줄어든다. 그리고 제작비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연물은 굉장히 리스크가 큰 위험한 상품이 된다.
사실 이때 미국 뮤지컬은 그냥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뮤지컬을 미국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게 만든 결정적인 공로자는 영화관이었다. 우리가 마치 영화 ‘레 미제라블’를 보고 ‘레 미제라블’를 봤다고 하는 것처럼, 영화관에서 싼 돈을 주고 뮤지컬 영화를 즐기게 되면서, 미국의 대중들에게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굉장히 친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즉 뮤지컬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결정적인 공로자는 바로 헐리우드 영화였다.
25. 미국의 반격
그리고 공황의 끝무렵,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드디어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 무대 음악극의 마스터피스이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다. 바로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과 그의 형인 아이라 거쉬인((Ira Gershwin)이 만든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라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건 이젠 뮤지컬이 아니고 오페라로 인정받고 있다.
뮤지컬적인 요소와 오페라적인 요소가 막 섞여있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클래식 계는 ‘포기와 베스’를 오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양키가 만든 건데, 뭔 오페라야?’ 이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고전이고, 오페라계도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깐, 지금 오페라 쪽에서도 받아들여진 특이한 뮤지컬이 되었다.
거슈윈은 이 작품 안에서 서양 고전음악의 음악적 전통과 블루스부터 시작하는 미국의 토착적인 대중음악의 전통을 굉장히 높은 수준에서 하이브리드하는 놀라운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여러분이 ‘포기와 베스’는 몰라도 주제가인 “Summertime”은 모두 아실 거다. 여름만 되면 나오는 노래이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도 불렀고,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명곡이다.
이 ‘포기와 베스’가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드디어 브로드웨이가 30년대에 이르러서 자신들의 열등감의 대상이었던 유럽을, 단순히 시장의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적 완성도의 차원에서 따라잡았다는 것이다. 미국인에게 자부심을 안겨준 작품이 바로 ‘포기와 베스’이다. 여기서부터 미국은 더 이상 자기들의 출발지였던 서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거슈윈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을 발표하고 2년 뒤, 35살의 젊은 나이에 이상한 병에 걸려서 사망한다. 그 바람에 거슈윈은 더 좋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다. 거슈윈의 스타일은 작품을 쓸 때마다 계속 발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정말 기가 막힌 작품을 남겼을 것이다. 거슈윈은 그런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사람이다.
26.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끝무렵부터 우리가 말하는 브로드웨이의 전성시대가 개막된다. 그래서 4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 브로드웨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아는 이른바 로저스와 핸머스타인 콤비에 의해 수많은 작품들이 나온다. ‘왕과 나’ ‘사운드오브뮤직’ 등등 정말 셀 수 없는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그러다 50년대말 드디어 뮤지컬 전체의 예술적인 격에 대해서 더 이상 그 누구도 비하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957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가 발표된 것이다.
당시 현역 뉴욕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발표한 브로드웨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보셨을 것이다. 이것은 흥행에 있어서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브로드웨이 판이었고, 나중에 마이클 잭슨은 바로 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내러티브를 모델로 해서 ‘beat it’의 뮤직 비디오를 찍었다.
이 작품은 60년대 이후의 미래 뮤지컬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완벽한 내러티브와 함께 한 명 한 명 캐릭터들의 내면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여태까지의 뮤지컬은 개인의 성향이나 내면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연극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부분이었다. 연극은 계속 연기를 하니깐 자기 내면의 고뇌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을 말로 표현하면 된다.
하지만 뮤지컬은 대사를 하다가 노래를 불러야 한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사를 할 때는 현실적 시간이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는 탈현실적 시간으로 간다. 그러다 노래 끝나면 다시 대사를 해야 한다. 이렇게 현실과 탈현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개인의 심리에 도달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단절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레너드 번스타인은 훌륭한 대본작가와 파트너십을 맺은 것도 있지만, 음악적으로 그 상황과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굉장히 현대적이면서 도전적인 화성을 쓰면서도, 듣는 사람들이 ‘이건 너무 어렵잖아?’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충분히 납득 가능하게 표현하였다. 정말 미국의 유태인다운 탁월한 효율성을 가지고, 이른바 작품의 미학적인 도전성도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커뮤니케이션도 획득하였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10대들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뮤지컬을 더 이상 어른들만 보는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보는 거라는 결정적 변화의 물꼬를 트게 된다. 이렇게 몇 가지의 아주 입체적인 측면에서 의미있는 작업을 수행한 작품이 바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도 2, 3년에 한 번씩 꼭 한다. 한번 보시기 바란다. 정말 재미있다.
27. 오프 브로드웨이
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 드디어 브로드웨이도 주류가 된다. 주류가 되면서 당연히 주류의 짝을 이루는 ‘오프 브로드웨이’가 1960년대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는 지난 록큰롤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미국 사회가 가장 풍요롭고 번영했던 시대였다. 매카시즘의 반동이 있기는 했지만, 정말 좋았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깐 문화적으로도 굉장히 윤택한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된다.
브로드웨이가 이제 엄청난 성공을 거두다 보니깐, 점점 더 규모나 작품에 투입하는 물량들이 경쟁적으로 커지게 된다. 그러면서 사실상 점점 붕괴의 위험 또한 동시에 커져가고 있었다.
모두가 흥행적인 요소로만 가는데 대한 반동이 당연히 생겨나게 된다. 즉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의 반동이 생겨나면서 작은 규모의 몇 명 안되는 인원으로 공연하는 오프 브로드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마치 오페라 코미크나 오페레타의 초기 시절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걸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오히려 이걸로 나의 재능을 증명해서 메인스트림으로 스카우트되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이것만으로도 나의 독자적인 예술적 표현이 가능해!’라고 믿는 개성적인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또한 ‘나는 저런 대자본의 투자자들에게 목이 메여 사느니, 이렇게 살다 죽을래!’라는 사람들도 모여서 ‘오프 브로드웨이’를 형성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 뮤지컬의 저변은 굉장히 넒어지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나가냐 하면, 브로드웨이도 아니고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조금만 뜨면, 몇 달 뒤에 우리나라에서도 하고 있다. 정말 무섭다. 미국이 제국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제국주의인 거 같다.
이 오프 브로드웨이의 초기에 가장 크게 떴던 작품이 ‘더 판타스틱스(Ter Fantastics)’이다. 이 작품은 소극장용으로 등장 인물도 5명 정도이다. 그런데 흥행에 크게 성공해서 장기공연을 한다. 특히 이 뮤지컬이 처음 시작할 때 나오는 ‘Try to remember’는 9월달만 되면 FM에서 나온다.
또 여러분도 아는 작품으로 ‘I DO! I DO!’ 같은 것은 오프 브로드웨이의 흥행 기록을 다 갈아치운다. 이 작품의 출연자은 두 명이다. 그런데 한 20년동안 깨지지 않는 최장 공연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런 게 오프브로드웨이의 매력이다. 실험적인 것을 할 수 있다. 실패를 해도 몇 대 쥐어박히는 정도로 끝날 수 있는, 도피하거나, 구치소에 갈 필요없는 그런 리스크를 안고, 굉장히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표현의 벽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28. 3대 대표 작가
이런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들이 또 어마어마한 층을 만들면서, 60년대 70년대에는 여러분도 다 아는 뮤지컬 작품들이 마구 쏟아지게 된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셋을 꼽는다면, ‘카바레’, ‘시카고’와 같은 작품들로 유명한 ‘캔더 앤 에브(Kander & Ebb)’ 콤비, 제롬 컴 다음의 최고 히트 작곡가인 제리 허먼(Jerry Herman)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티븐 손더하임(Stephen Sondheim)같은 사람이 있다.
Jerry Herman
Stephen Sondheim
손더하임의 작품 중에서 여러분이 알만한 것은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를 담은 ‘스위니 토드(Sweeney Todd)’가 있다.
이 사람은 옛날 오페레타 초기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깐 너무 뻔한 그런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기괴하고 엉뚱한 것을 다룬다. 풍자는 풍자인데 굉장히 더러운 풍자를 한다. 마치 B급 무비를 보는 거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손더하임의 위대함은 뮤지컬 싱어송 라이터라는 것이다. 보통 작가가 있고 작곡가가 따로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본작가 출신인데. 작곡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기가 쓰고 자기가 작곡을 한다.
그는 60년대에서 70년대에 토니 상을 수없이 수상한다. 특히 손더하임은 대중적인 히트작이나 대규모의 블록버스터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내면을 가장 풍요롭게 살찌운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도 기회가 있으면 보시기 바란다. 물론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29. 록뮤지컬
이런 오프 브로드웨이와 더불어서 60년대는 이상의 시대, 반항의 시대였다. 온갖 양아치들이 전 세계적으로 이 60년대에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하나의 사건은 바로 록뮤지컬의 등장이다. 역시 록의 시대였으므로 록뮤지컬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 1967년에 등장한다. 바로 헤어(hair)라는 작품이다.
1967년은 위대한 년도이다. 67년이 왜 위대하냐 하면, 60년의 위대한 유토피아주의가 가장 극점에 도달한 것이 67년이다. 그래서 이 해를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이해에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고 불리게 되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발표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해에 록뮤지컬의 원년을 장식하는 ‘헤어’가 나온다. 그리고 헤어와 더불어서 '그리스 (Grease)' 같은 작품도 나온다.
이 ‘헤어’가 터지는 것을 보면서, 저 대서양 건너의 굉장히 교육을 잘 받은 젊은이 하나가 ‘나도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역시 꼼꼼한 영국인답게 록음악이 뮤지컬에서 그냥 단순히 음악의 새로운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록음악적인 요소가 어떻게 새로운 장르의 문법으로 승화할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졌다.
결국 그는 친구인 팀 라이스(Tim Rice)와 함께 1971년에 여태까지 돈으로 사오기만 했던 자기 조국의 모든 오명을, 뮤지컬의 중심지로 돌려놓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바로 ‘Jesus Christ Superstar’였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이렇게 등장한다.
Tim Rice
Andrew Lloyd Webber
이 때부터가 바로 웨스트 엔드가 ‘나도 만든다니깐..’하면서 명함을 딱 꺼내서 브로드웨이와 맞짱을 뜨기 시작한 순간이다.
보수적인 영국 사람들 모두가 ‘절대 안된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무려 개막 후 8년간 약 3,300회의 공연 기록을 세우면서, 뮤지컬 역사에 이른바 ‘메가 오픈 런’ ‘영구 오픈 런’ 시대를 연다.
‘팀 라이스 앤 로이드 웨버’ 콤비는 이때부터 정말 황금알을 낳게 되고, 세계 뮤지컬의 중심지를 뉴욕에서 런던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 단 한 명의 힘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로드웨이가 아닌 건 아니었다. 이 웨스트 엔드의 작품이 전세계에서 폭발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브로드웨이의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가장 흥행에 성공한 곳은 웨스트 엔드가 아니고, 브로드웨이였다. 그러니깐 이 둘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이른바 동반 3각 경기를 이때부터 펼치게 된다.
이때부터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서는 이른바 장기공연의 위대한 아이템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그 경제적인 효과는 지난 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30년간 약 4조달러정도의 부가가치를 런던 시에 만들어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Jesus Christ Superstar’는 영화로도 나와 있다. 이 영화의 보컬이 딥 퍼플(Deep Purple)의 이언 길런(Ian Gillan)이었다. 정말 샤우트 보컬의 끝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것도 보기 바란다.
이 안엔 여러분도 잘 아는 명곡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의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하기도 했다.
로이드 웨버는 젊었지만 정말 견고했던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정확하게 현대의 풍조를 꿰뚫고, 록을 가장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록 뮤지컬’이라고 안하고 ‘록 오페라’라고 붙였다. ‘오페라 꺼져!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뜻이 숨어있다.
그래서 이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라고 하는 것은 뮤지컬을 단순히 1회성 소비재가 아니라 동 시대의 가장 격조 있는 소비, 가장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하는 소비로 만들었다. ‘니가 베를린 필하모니 콘서트 보러가는데 30만원 내는데, 나도 한 번 그렇게 받아보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로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가게 만드는 단초를 스스로 기획했다는 점에서 로이드 웨버는 정말 뮤지컬의 귀재이다.
30. 캣츠
그런데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70년대말에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시에 꽂힌다. 그래서 그 시를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니깐 웨버는 진짜 고급스럽게 팔려고 작정을 한 거였다.
T.S.엘리엇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원작이 소설이나 희곡이나 영화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원작이 시(詩)라서 안 풀렸다. 그래서 몇 년을 까먹고, 결국 SOS를 치게 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바로 웨스트 엔드의 신화 시대를 열게되는 제작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Cameron Mackintosh)였다.
Cameron Mackintosh
1981년, 캐머런 매킨토시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손을 잡고, 엘리엇의 시를 가지고 만든 캣츠(Cats)를 초연할 때만 해도 반응이 좋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결국 월드와이드 히트작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를 넘어선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열게 되는 첫 번째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의 에피소드 하나로, 이 작품의 첫 번째 연출은 트레버 넌(Trevor Nunn)이라는 베테랑 연출자가 맡았는데, 개막 전 리허설을 할 때까지, 이 뮤지컬 캣츠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메모리’라는 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Trevor Nunn
초연 무대는 객석이 무대 주위를 둘러 있으면서 회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나 방자하게 티켓에다 박아놓았냐 하면 ‘우리는 객석이 회전하오니 늦게 입장하시면 공연을 볼 수 없습니다. 1분만 지나셔도 입장 불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분장도 화려하게 하고 온갖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는데, 정작 노래는 임펙트가 없었다.
그래서 연출자는 리어설을 하고 작곡자인 로이드한테 ‘솔직히 노래가 별로야. 너무 재미없어. 1막이 끝날 때, 뭔가 하나 훅이 확 가야하는데, 이렇게 대충 끝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았어, 형. 기다려 봐.’ 그래서 그날 밤 단숨에 쓴 게 바로 ‘메모리’였다고 한다.
다음 날 이 곡을 들은 트레버는 뮤지컬의 미래를 영원히 함께 할 노래를 지금 들었다며 감격해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캣츠는 기적적으로 성공을 하게 된다.
31. 레 미제라블
그러면서 드디어 80년대의 빅4 뮤지컬 시대가 개막한다.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그리고 ‘미스 사이공’이 빅4가 된다.
그런데 이 네 작품의 제작은 모두 매킨토시가 하지만, 두 작품은 ‘로이드 웨버’와 하고, ‘레 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은 쉔베르크의 손자인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Claude-Michel Schonberg)’랑 하게 된다.
쇤베르그
그런데 ‘레 미제라블’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프랑스 뮤지컬은 그 혁혁한 오페라 코미크와 오페레타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사실 20세기에 와서 거의 문을 닫았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 지나고 난 뒤부터 시장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뮤지컬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쇤베르그는 작사가인 친구 알랭 부빌(Alain Boublil)과 60년대 말부터 자기들의 고전인 레 미제라블을 작품을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인들이었기 때문에 미국처럼 할 수는 없었다.
Alain Boublil
하지만 방대한 이야기를 한정된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푸는 차원에 70년대 ‘프랑스 혁명(La Revolution Francaise)’이라는 작품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무대에 올린 것은 아니고, 2장짜리 LP로 발매한다. 그런데 이게 10만장이나 팔린다.
프랑스에는 시장이 없으니깐, 마치 대중음악처럼 앨범을 발표해 놓고 ‘이제 좀 알았니?’ 하고 나서, 무대에 올려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이 룰이 프랑스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도 이렇게 처음에는 앨범을 먼저 발표하고 만든 뮤지컬이다.
일단 곡을 알려서 사람들의 지명도를 높힌 다음에 무대에 올린다. 왜냐하면 앨범을 만드는 건 돈이 얼마 들지 않지만, 무대 만들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룰에 따라 알랭 부빌과 쇤베르그가 ‘프랑스 혁명’을 만들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드디어 프랑스 어로 된 레미제라블을 썼는데, 런닝 타임이 5시간에 육박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등장해서 도저히 이건 현실화 될 수 없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 작품은 서랍 속에서 썩어서 끝나는 걸로 여겨질 찰라, 알랭 부빌이 매킨토시의 어떤 작은 동화 뮤지컬 프로젝트를 위촉받아서, 그 작업을 하러 매킨토시가 있는 런던에 갔다.
작업이 잘 끝난 후에 ‘형. 사실, 우리가 이런 거 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답이 안나오네.’ 그러면서 살짝 보여주었다. 그래서 매킨토시가 그걸 보니깐, 너무 장황하고, 너무 말이 많고, 사람도 너무 많이 나오고, 절대 작품이 될 수 없는 거였다. 그렇지만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래서 매킨토시라는 프로듀서가 훌륭한 것이다.
그래서 무려 3년간의 개작 작업을 한다. 쳐낼 것은 쳐내고, 핵심적인 사건 중심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당연히 프랑스어판은 영어판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해서 레 미제라블이 무대에 올려졌고, ‘레 미제라블’은 그야말로 빅4의 일원이면서 사실상 지금까지 현존하는 세계 뮤지컬사의 금자탑이 된다.
레 미제라블
우리는 오페라 같은 작품을 통해서, 특히 베르디와 바그너 같은 그야말로 오페라의 왕들이 등장한 19세기 무대극을 통해서는 인간의 총체적인 역사 혹은 인간이 가진 거대한 신화적인 주제들을 본 적이 있지만, 뮤지컬을 통해서 그런 역사와 인간을 모두 통합적으로 꿰뚫는 거대 서사를 만나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가장 최고 수준으로, 단 하나의 대사도 허용하지 않는 Sung-through 방식으로 완벽하게 만들어낸 그 첫 번째 작품이 ‘레 미제라블’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동시에 작곡가인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의 재능을 넘어서서, 뮤지컬 사상 가장 위대한 제작자로 남게될 ‘캐머런 매킨토시’라는 프로듀서의 역할과 기능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 가장 처절한 실례가 될 것이다.
매킨토시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당신이 작품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기준은 도대체 뭡니까?’ 그때 매킨토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난 내가 보고 싶은 작품만 만든다. 내가 정말 간절히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든다. 그것뿐이다.’
32. 미스 사이공
사실 레 미제라블로 재미를 본 뒤, ‘미스 사이공’을 다시 쇤베르그랑 한다고 했을 때, 그 기획에 대해 굉장히 많은 비난이 있었다. 실제로 그 작품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많은 말들을 지금까지 남기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은 빅4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작품이 된다.
사실 저는 ‘미스 사이공’이 빅4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에 있어서도 여자 주인공의 설정에서 인종 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그래서 백인 우월주의라는 비난도 받았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러티브를 보면, 오페라 나비부인을 굉장히 교묘하고 치사하게 차용했다는 점에서 창의성이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뭐,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오페레타 시절에 얼마나 많은 기존의 오페라들을 가져와서 패러디하고 조롱했나? 그렇지만 이것은 그런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이 아니다. 이런 거대한 규모의 브로드웨이 작품은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하는 어떤 하나의 트렌드를 보여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조용필이 찌질하게 펑크 음악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건 반칙이야. 그런 점에서 미스 사이공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캐머런 매킨토시라는 프로듀서가 그런 약점과 사전의 비판, 비난을 몰랐을리 없다. 개막하자마자 그 모든 비난을 한 방에 끝내버리는 반격의 카드를 내 보인다. 바로 무대에서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게 한 것이다.
이 작품은 89년에 개막한 것이기 때문에, 90년대 초에 브로드웨이 가서 이것을 직접 보고온 후배들이 제 주변에도 많았다. 그래서 ‘야..어떻더냐?’라고 물으면, ‘딴 거는 뭐 아무것도 기억 안나고, 그냥 헬리콥터가 극장에서 떠! 끝이야!’라고 답했다.
지금 우리에게 들어온 버전은 헬리콥터가 안 뜬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화면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초연 때부터 첫 번째 개작 전까지는 무대에서 진짜 헬리콥터가 떴다.
사실 그냥 말로만 들었을 때는 ‘그게 뭐 대단해? 헬리콥터가 뜨는 거 월남전 영화에서 한두번 봤냐?’고 했는데, 본 사람들 말을 들으면 그 장면 하나만 보고 나와도 돈이 안 아깝다는 거였다. 한 명이 그런 게 아니라, 그걸 보고온 사람들은 모두 ‘형. 그걸로 끝이야. 꼬우면 봐!’라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들도 모두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33. 뮤지컬의 생존 법칙
사실 캐머런 매킨토시는 ‘미스 사이공’을 통해서 21세기의 뮤지컬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정리했다.
이제 뮤지컬은 거대한 빅 비지니스가 되었다. 이제는 1년에 4편씩 써 대던 오펜바흐 시대가 아니고, 뮤지컬 하나를 준비하는 데도 최소한 4년에서 7년이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미 준비 기간부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랬을 때, 뮤지컬이 가혹한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뭐냐? 그 방법을 매킨토시는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요소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된다고 해서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이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내러티브다. 아무리 노래가 좋아도 말이 안 되는이야기를 들고 나오면 실패하게 된다. 가령 ‘제너두(XANADU)’ 같은 경우다. 아무리 ‘올리비아 뉴튼 존’이 나와도 롱런할 수가 없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기본적으로 뮤지컬은 무대극이기 때문에 시나리오부터 주제 의식이 나름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플롯의 진행 과정에서 극적인 흥미를 자아내는 정통극의 요소는 최소한 갖추어야 한다. 너무 첨예한 인간 심리의 추구는 안 해도 된다. 뮤지컬은 어차피 그런 것을 해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기본이다.
두 번째는 네 마디의 메인 테마가 머리에 남아야 된다. 네 마디만 남으면 된다. 뮤지컬을 보고 나왔을 때, 네 마디의 음악이 머리속에 남아있으면 그건 대박이다. 그런데 문제는 10편 중에 9편이 그걸 못 남긴다는 것이다.
레 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생각해 보자. 처음 듣는 사람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노래의 배치도 교묘하다. 그걸 꼭 두 번 듣게 만들어 놓았다. 언제나 주제곡은 1막이 끝날 때 나온다. 그리고 2막에서 클라이맥스를 칠 때 또 나오게 되어 있다. ‘유사품에 주의 하세요. 이 선율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잘 기억 못한다. 왜냐? 재미가 없으면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레 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나 캣츠의 ‘메모리’는 한 번만 들으면, 머리에 딱 찍힌다. 그럼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스펙터클이다. 오프 브로드웨이 말고 메이저 뮤지컬에서 세 번째는 스펙터클이다. 그런데 스펙터클에는 2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하는 스펙터클이고, 또 하나는 매커니즘이 하는 스펙터클이다.
인간이 하는 스펙터클은 뭐냐? 군무(群舞)같은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레 미제라블에는 매커니즘에 의한 스펙터클은 없다. 그런데 바리케이트 씬이 있다. 즉 인간이 하는 스페터클은 군무나 군중에 의한 시각적 압도성을 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테크놀로지에 의한 메커니즘이 있다. 이것의 끝을 ‘미스 사이공’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제 더이상의 스펙터클은 없다. 무대에서 헬리콥터가 떴는데, 그거 말고 더 이상 우리가 어떤 스펙터클을 기대하겠는가? 그래서 나중에 이 장면에 충격을 받은 마이클 잭슨이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로 월드 투어를 하면서 무대 뒤에서 탱크를 몰고 나왔다.
34. 신파극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했지만,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미래의 뮤지컬 시장으로 21세기에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 한국은 이른바 수입 뮤지컬, 라이센스 뮤지컬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아직 우리의 독자적인 창작 뮤지컬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뮤지컬 한류라고 하면서, 한류 kpop 스타들을 동원한 한국의 뮤지컬들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나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작품 그 자체의 설득력과 완성도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뮤지컬에 대해 허약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창작 뮤지컬 역사는 비록 그것이 단절되어서 그렇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뮤지컬 역사의 시작은 19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초반에,지금 우리가 라이센스 뮤지컬을 수입하듯이, 일본에서 수입한 뮤지컬인 신파극에서 시작한다.
신파라고 하면 눈물을 질질 짠다는 뜻으로 쓰지만, 본래 뜻은 뉴웨이브다. 그 당시로는 굉장한 수입 신상품이었던 일본의 무대극은 전부 남녀간의 천편일률적인 사랑과 배신의 드라마였다. 그러다 보니, 그런 통속적인 것을 보고 아예 신파적이라고 해서 쓰고 있지만, 본래 뜻은 뉴웨이브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전까지 그런 류의 무대극을 한번도 듣도보도 못했다. 그야말로 새로운 물결이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수일과 심순애도 우리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본래 곤지키야샤(金色夜叉)라는 일본 신파극이다. 이 일본 작품을 번안해서 만든 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수일과 심순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장한몽(長恨夢)’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연극이다. 단지 주제가가 있는 연극이다. 안에 노래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깐 연기를 하다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1막이 끝나면 가수가 나와서 주인공의 주제가를 불렀다.
그래서 정확하게 뮤지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연극도 아니었다. 일종의 보드빌이나 버라이어티 쇼 같은 것이었다. 연극은 진행되지만 사이사이에 노래를 불렀다. 좀더 진화해서 웃기는 스토리 같으면 만담가가 나와서, 한번 웃겨주고 ‘그럼 이제 김말똥이 어떻게 됐는지 볼까요?’라고 말하고 싹 들어가면, 다시 연극이 시작되는 거였다.
그때부터 뮤지컬의 초창기 형태인 이런 버라이어티 쇼 스타일의 일본 신파극이 수입되었다.
그러다가 이걸 바탕으로 해서, 1930년대가 되면 많은 악극단들이 생겨난다. 왜냐? 당시 한국에 트로트 음반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콜롬비아 레코드, OK 레코드, 빅터 레코드와 같은 레코드 회사들이 ‘조선 악극단’, ‘콜롬비아 악극단’ 같은 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무대 공연을 위한 라이브 전문 팀을 만들었는데, 그냥 콘서트만 하는 게 아니고, 드라마를 만들어서 했다. 왜냐하면 소속 가수들이 많으니깐,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마치 극처럼 만들어서 파는 것이 더 큰 수익을 올릴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35.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견우직녀’
그런 일종의 초보적인 악극 시대가 30년대에 만들어졌고, 이걸 바탕으로 해서, 본격적인 한국의 창작 뮤지컬은 1941년에 처음 발표된다.
우리가 지난 첫 번째 시간에 했던, 조선음악가동맹의 위대한 작곡가 안기영이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을 쓴다. 그것은 바로 1941년에 라미라 가극단을 통해서 발표된 ‘견우직녀’였다. 그런데 이건 별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에 ‘콩쥐밭쥐’를 내고, 이어서 견우직녀의 속편을 ‘은하수’라는 제목으로 낸다. 견우직녀는 견우직녀 설화의 지상편이고, 은하수는 천상편이었다. 그런데 이 천상편은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이것들의 악보는 모두 남아있다. 편곡 악보는 없지만, 메인 악보가 모두 남아있다.
라미라 가극단은 곧 해산하고, 곧 한국 뮤지컬의 최대 단체가 되는 게 반도 가극단이 만들어진다. 반도 가극단의 극단장이 박구라는 분인데, 이 분의 막내 아드님이 알고보니깐 내가 오랫동안 잘 알고 지냈던 형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모르셨다. ‘형 아버지는 역사적인 분이라니깐.’ 그랬더니 ‘어, 그러냐? 우리집에 이상한 옛날 악보 같은 게 있는 거 같은데..’하는 거였다. 그래서 ‘갖고 와 봐.’라고 했다.
딱 봤더니, 한국에 단 한 부밖에 남지 않은 ‘견우직녀’ ‘은하수’ ‘심청전’의 오리지날 대본과 악보가 그대로 있는 거였다. 사실 대본은 이미 입수했었다. 대본은 그 대본을 쓴 서항석이라는 작가가 대본을 나중에 묶어서 책으로 남긴 게 있어서 대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악보는 처음 본 것이었다.
저는 그 악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진짜 무식한 악보였다. 보통 뮤지컬을 쓰면, 여기서 써먹었던 것을 저기서 살짝 바꿔서 써먹는다. 그런데 이 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신곡으로 채웠다. 1편에 40곡이 넘었다.
거기에 연출 디렉션이 지시되어 있는데, 그걸 보니깐 단순히 무대에서 연기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전통적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대 장치의 디렉션을 보니깐 굉장한 블록버스터 작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냥 한복 입은 아저씨, 아줌마 몇 명이 모여서 한 게 아니고, 굉장히 거대한 규모의 블로버스터 작품이었던 것이다.
특히 ‘춘향전’ ‘심청전’ ‘은하수’ 같은 경우는 크게 히트를 해서, 반도 가극단의 규모가 그 당시에 이미 단원이 180명이었다고 한다.
한창 때는 A팀, B팀, C팀으로 나누어서, A팀은 서울 이남지방의 순회공연을 하고, B팀은 서울 이북과 만주지방까지 가서 공연을 했고, C팀은 일본 순회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3개의 팀을 동시에 굴렸다.
그리고 우리가 알만한 초기 엔터테이먼트 스타들은 모두 이 극단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서 배우 황해, 허장강, 김희갑, 윤복희 윤항기 남매의 아버지인 한국 최초의 개그맨이자 진행자인 윤부길 선생, 이런 사람들이 모두 반도 가극단의 출신들이다. 장동휘처럼 해방 이후, 한국 최고의 슈퍼스타가 되는 사람들도 이 가극단 출신이었다.
공연도 굉장히 규모가 큰 것이었으며, 예술적으로도 우리 음악의 한국적 감수성에 입각한 굉장히 창조적인 선율들이었다.
아직까지 이것이 연주로든 녹음으로 혹은 무대에서 재현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우리나라 뮤지컬이 자신의 뿌리찾기에 좀더 깊은 수준으로 가게 되면, 이 작품들을 미디어나 무대를 통해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창조적인 시도들은 분단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찢어지고, 아수라장이 되면서, 해방이후 60년대까지의 분단과 전쟁의 혼란기에 무대 공연은 기반이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36. 예그린
그리고 다시 15년 정도의 공백을 가지고, 61년 군사 쿠데타 직후에 놀랍게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에 의해 다시 시작한다.
김종필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군인이었지만 굉장히 인문적인 인사이트가 있는 분이었다. 정치적인 노선은 마음에 안들지만, 그것말고는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가령 자민련 소속으로 대통령으로 나왔을 때, ‘마지막으로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고 하면서 나왔다. 물론 비명도 못지르고 갔지만,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이 아닌가? 김종필은 사실 청년 장교들 중에서,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 선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냥 단순한 군바리를 아니었다.
그 당시 쿠데타 정부는 돈이 없으니깐, 많은 기업들을 협박하다시피해서 기업들로부터 스폰싱을 받아서 ‘예그린’이라는 창작 뮤지컬 극단을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된다.
왜 만들었냐? 그 당시 박정희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잘 사는 북한과의 경쟁이었다. 우리나라에 비해 모든 부분에서 훨씬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 있던 북한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거였다. 적어도 북한을 따라 잡음으로서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것이 최고의 국정과제였다.
그 당시에 박정희 정부가 북한에 대해 얼마나 열등감을 갖고 있었냐 하면, 이 한 가지 예로도 설명이 된다.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국가 중에서 제일 먼저 월드컵 조별 예선을 통과해서 8강에 들어간 나라는 북한이다.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였다. 거의 4강도 갈뻔 했다. 준준결승전에서 포르투갈에 3대0으로 이기다가 5대3으로 역전이 되어서 결국 아쉽게 탈락을 한다.
그때의 흑백 자료화면으로 봤는데, 당시 영국 노동당의 노동계급들은 북한대표팀을 열정적으로 응원했다.
8강전을 하는데, 그 경기장까지 북한 사람들이 응원갔을 리는 만무하고, 경기장을 가득 채운 영국 관객들은 일방적으로 북한을 응원하고 있다. 일단 북한 축구가 매력적인 것도 있었지만,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처절한 지지를 경기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때 한국은 어땠냐? 북한이 너무 강팀이라서 예선전에 나가붙었다가는 처절하게 져서 쪽 팔릴 까봐 예선전에도 출전을 안했다. 54년이후 예선전조차 출전 못한 유일한 월드컵이 런던 월드컵이었다. 그런 정도로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그 당시 북한 축구의 핵심은 김일성 직계 라인인 425축구단이었다. 김일성은 거의 사설 국가대표팀을 만들어서 환상적인 국가대표 상비군 팀을 만든 거였다. 그걸 흉내 내서 박정희도 66년 이후에 기존 팀 중에서 제일 잘하는 선수들만 뽑아서, 많은 월급을 주고, 사설 국가대표 상비군을 만든다. 그 팀의 이름이 ‘양지’였다.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러니깐 정확히 말하면 중앙정보부팀이었다.
지금 한국은 본선에 나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4강 못가니?’라고 하면서, 8강에 가도 별 감응이 없는 배불러 터진 조국에 살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60년대 북한은 문화적으로 전세계를 향해서 자랑하고, 큰 소리칠 수 있는 콘텐츠가 있었다. 이른바 5대혁명 가극이라는 것이었다. 평양의 피바다 가극단은 전 유럽에서 공연을 해서, 유럽 비평가들의 넋을 완전히 빼놓았다. 왜냐? 세계 뮤지컬 사에서 처음 보는 작품을 갖고 있었다.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뭐냐하면, 무대에 전투 장면이 있으면, 한 500명 정도가 나와서 진짜로 전트를 했다. 만주나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할 때가 배경이니깐, 무대에 실제 폭포를 만들어서 진짜로 물을 떨어뜨렸다. 그러니깐 돈은 얼마든지 대줄테니 하고 싶은대로 한 것이다. 완전히 루이 14세 시절, 그랑 오페라 수준의 대규모 공연단을 가지고 유럽 투어를 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이것 때문에 당황을 한다. 그래서 그 정도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북한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급 가극단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게 ‘예그린’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작품이 1966년에 나오는데, ‘살짜기 옵서예’라는 것이었다. 제가 볼 때는 아직까지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로 이 작품을 넘어선 작품이 없다고 본다.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 여러분도 꼭 보시기 바란다. 작년에도 예술의 전당에서 했다.
최창권이라는 굉장히 뛰어난 뮤지컬 감독이 작곡을 하고, 소설가 김영수가 대본을 쓰고, 박용구 선생이 가사를 맡았다. 그야말로 당시로는 드림 팀이었다. 그리고 초연의 주인공은 ‘패티 김’이었다. 그러니깐 당시 한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대표 선수는 모두 모아서 만든 게 예그린의 ‘살짜기 옵서예’였다.
그런데 ‘예그린’은 결국 붕괴한다. 왜냐? 김종필이 쫒겨나면 해산을 했다. 그리고 김종필이 다시 복귀를 하면 재건한다. 이런 식이니깐 국가 주도의 이 단체는 오래 갈 수가 없게 된다.
대춘향전
그래서 예그린의 주도적인 인물이자 작곡가이었던 최창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예그린이 붕괴한 뒤에 나와서 독자적으로 뮤지컬 센터 미리내라는 것을 만든다. 그리고 70년대 한국 창작 뮤지컬의 시대를 열려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한다.
최창권
최창권은 ‘살짜기 옵서예’를 개작해서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70년대 돈으로 무려 1억 8천만원이라는 제작비를 들여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래서 연일 매진을 한다. 하지만 미리내는 결국 도산을 하고 말았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리 매진을 해도 손익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관 주도에서 뮤지컬을 하다 보니, 철저히 시장 주도로 했을 때의 프로덕션 마인드가 없었던 것이다. 예술가적 욕망으로만 작품을 만드니깐 돈을 너무 많이 썼던 것이다. 결국 미리내 뮤지컬 센터도 공중 분해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한국 창작 뮤지컬의 암흑기를 경험하게 된다.
37. 한국 뮤지컬의 재건
그러다가 다시 90년대에 와서 전기(轉機)의 물꼬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에이콤의 명성황후다. 이덕일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 민바 따위가 국모 대우를 받는 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 알 수 있다. 정말 우리 손으로 못 죽인게 한이 되는 여자다.
아무튼 이상하게도 당시 강남의 신흥 부르주아들이 이 작품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여줌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의 창작 뮤지컬이 이른바 프로덕션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2001년에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이 처음으로 수입되어 크게 흥행에 성공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메이저 뮤지컬 시장을 개막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38. 한국 뮤지컬의 과제
현재 한국 뮤지컬의 과제는 굉장히 명확하다. 한국은 그동안 수많은 라이선스 뮤지컬을 통해서, 짧은 기간 안에 굉장히 훌륭한 퍼포머들을 많이 배출했다. 놀라운 일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써도, 그걸 연기하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무대 퍼포머들이 없으면, 뮤지컬은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또 너무나 빨리,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렸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희안하게도 2,000년대 와서, 한국의 엔터테이먼트 비지니스는 멀티 아티스트 모델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왜냐?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만 불러가지고는 도대체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박았다, 저기 박았다 할 수 있는 멀티 유닛을 만들어야 간신히 BEP을 맞출 수 있다.
그러다 보니깐 데뷰를 뮤지컬로 하는 것이 너무나 현실적인 게 되었다. 왜냐하면 뮤지컬을 하려면 노래도, 연기도, 춤도, 미모도, 몸도, 모두 만들고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돈을 주고서라도 해야될 판인데, 작지만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깐 뮤지컬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래서 뮤지컬은 아이돌 스타들의 배출 통로가 되었다.
영화 쪽에서도 신인 캐스팅을 할 때, 옛날에는 연극을 보러갔지만, 지금은 50대 이후를 캐스팅할 때는 연극을 보러 가고, 젊은 배우를 캐스팅할 때는 전부 뮤지컬를 보러 간다.
대중은 이제 아예 가수를 선호하기도 한다. jyj의 준수 같은 친구들은 조성모보다 많은 개런티를 받고 뮤지컬에 출연한다.
이제 스타덤에 오른 아이돌 스타들도 뮤지컬을 병행하는 것이 자신의 스타로서의 라이프 사이클을 늘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런 굉장히 좋은 조건들이 짧은 10여년간에 만들어졌다.
또한 마치 90년대 후반, 한국 영화 부흥기 때 그랬던 것처럼, 기술 스텝들도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과의 교류 경험을 통해, 이제는 장난 아닌 수준으로 뛰어난 무대 스텝 인력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아직 딱 하나가 없다. 크리에이터가 없다. 곡을 쓰고, 드라마를 만들고,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이건 히트곡을 작곡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현대 뮤지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는 크리에이터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뮤지컬을 보면, 언제나 대본 작가와 작곡자 이름이 딱 붙어 있다. ‘해머스타인 앤 제롬 컨’, ‘팀 라이스 앤 로이드 웨버’과 같은 식으로 쓰고 있다.
우리는 이제 뮤지컬의 가장 핵심적인 유닛이면서, 비어 있는 마지막 퍼즐을 메꾸어야 할 때이다.
39. 뮤지컬의 의미
1,600년 오페라로 시작해서 2013년 한국 뮤지컬까지 참으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결국 뮤지컬은 17세기 이후 지배계급 문화의 가장 극점에 서있던 오페라 안에서, 오페라를 반동하고, 오페라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오페라를 극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리고 점점 격동하는 이후의 17, 18, 19세기의 시대 정신들을 흡수하면서 오페라 안에서 오페라를 넘은 뮤지컬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최후의 무대 콘텐츠를 만들어 내었다.
결국 그 힘으로 인해, 뮤지컬은 가장 늦게 등장한 문화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장르가 되었으며, 가장 효율성 높은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뮤지컬의 생명력이 앞으로도 굉장히 길게 유지될 거라고 예상되는 이유는 비록 그의 출발은 늦었으나, 그 앞의 수많은 인류 예술사의 최선의 성과들을 이 안에서 포섭하고 축적해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예술사에서 나타난 가장 순조로운 반전의 명예혁명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뮤지컬은 오페라를 학살하지 않고, 조용히 유폐시켜 버리고, 오페라가 누려왔던 그 모든 것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자신의 영역으로 구축한 최고의 장르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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