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삼1:1-4)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계속해서 돌파 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마6:25-34의 경제관과 마25: 14-30 의 경제관이라는두 가지의 복음(성경)적인 경제관이 있는데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가야 한다고 복음(성경)적인 경제관이라는 글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선택”이라는 논리가 필요 없어 졌습니다. 왜냐하면 마6:25-34의 경제관은 마25: 14-30 에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성경)적인 경제관은 마6:25-34에서 시작하여 마25: 14-30에서 비로소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달란트 비유의 말씀까지 왔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전에는 말씀을 하나로 둘로 또는 다섯으로 받은 것으로만 이해하여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돌파 복음을 묵상 하면서 마 6장의 말씀과 연계하여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6-26)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라고 말씀 하심으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여 보라고 합니다. 너희는 공중의 새보다, 들의 풀보다 귀하지 않으냐 그러므로 너희도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까지 마6:25-34에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입는 문제를 염려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우리가 잘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잘못하고 계신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맛있는 것과 좋은 옷을 입기 위한 염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맛있는 것과 좋은 옷만 포기하면 염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 합니까? 저는 이 시점에서 마25의 달란트 비유를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하여 집중해서 보고자 합니다. 받은 달란트 마저 빼앗기고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그는 왜 쫓겨났으며 그는 누구일까요?
한 달라트 받은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 6장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에게 그대로 가는 사람……그가 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일까요? 들풀도 공중에 나는 새도 열심히 먹고 살기 위해서 먹이 활동(일)을 합니다. 그리고 번식을 합니다. 혼자 사는 법이 없습니다. 요즘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결혼도 안 합니다. 설사 결혼을 한다고 하여도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합니다. 배로 남기기는커녕 그렇게 살다 죽으면 마이너스 입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달란트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금)을 하나로 둘로 다섯으로 공평하게 준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한 달란르 받은 사람이 오해한 것처럼 우리도 왜 나에게는 조금 밖에 주지 않았느냐고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 달란트 받은 것에 감사하여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둘, 다섯을 더 하여 주시는 것이 온전한 복음(성경)적인 경제관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합니까?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영혼이 잘 되는 분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잘되는 사람은 반드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잘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여러분의 모습을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고 평가 할 수 있습니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범사)일에 점과 흠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영혼이 잘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시온산의 장자들의 총회 다음 카페에 가셔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가? 라는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돌파 복음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돌파할 대상은 범사(모든)에 점과 흠을 돌파해야 한다고 말씀 드립니다. 무엇으로요? 겨자씨 믿음으로……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1-33)
여러분은 겨자씨 비유를 잘 알 것입니다. 씨앗이 거의 모두가 작은 것이지만 특히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왜 겨자씨에 비유하셨을까? 를 묵상하게 합니다. 그것도 천국에 비유하여……그렇다면 겨자씨 비유는 그저 작은 믿음을 말씀 하시는 것일까요?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그러나 겨자씨 믿음은 뽕나무를 바다로 심을 수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1-22) 뿐만 아니라 겨자씨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에 대하여 묵상하다 보니 제가 겨자씨 믿음에 대하여 오해하였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 믿음이야말로 돌파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뽕나무와 산을 옮길 만한 의심하지 않는 겨자씨 믿음……우리의 돌파 복음의 핵심 아닙니까? 그러므로 겨자씨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점과 흠을 돌파하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두 다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되기 위하여 오늘 이 시간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저희 천금 경제 심리 상담 연구소가 돕겠습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위하여 ~ ^:^
첫댓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1-22) 뿐만 아니라 겨자씨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에 대하여 묵상하다 보니 제가 겨자씨 믿음에 대하여 오해하였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 믿음이야말로 돌파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뽕나무와 산을 옮길 만한 의심하지 않는 겨자씨 믿음……우리의 돌파 복음의 핵심 아닙니까? 그러므로 겨자씨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점과 흠을 돌파하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두 다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되기 위하여 오늘 이 시간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저희 천금 경제 심리 상담 연구소가 돕겠습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위하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