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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리액션의 달인>의 줄거리: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주어집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을 전후한 삶의 모습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리액션의 달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액션에 대한 리액션의 달인 말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내가 주체적으로 액션을 취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리액션하면서 살았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오직 하나님의 액션에만 리액션하면서 삽니다. 대표적인 리액션이 바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이지요.
리액션의 달인
(행4:1~22)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리액션의 달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리액션의 달인.
기자 출신의 칼럼리스트 전 경우 씨가 있는데, 미래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의 소장이시기도 합니다.
이 분이 작년에 책을 하나 발간을 하셨는데, 그 책 제목이 ‘문제는 리액션이다’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대답해도 제스처가 다른 사람이 이긴다’, 이게 부제에요.
‘똑같이 대답해도 제스처가 다른 사람이 이긴다’
대답할 때에 제스처라는 것은 리액션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팔을 크게 벌리면서, ‘어~ 어~ 그렇구나~’ 이게 리액션이라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에이, 뭐 그렇긴 하지’ 이렇게 시답지 않은 리액션을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리액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대인관계 리액션, 그리고 상황에 대한 리액션, 또 직장인으로서 백전백승할 수 있는 리액션,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펼쳐 나가는 가운데 맨 마지막 부분에서 달인 급 리액션에 대한 예를 듭니다.
달인 급 리액션이라는 얘기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변해가는 인물들 중에서, 리액션을 잘~ 하는, 그래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드는데, 거기에 보면 뭐 유재석씨라든지, 강호동씨 뭐 이런 개그맨들 MC들이 등장하고, 역사적인 인물로는 흥선 대원군과 안동김씨 세도가의 핵심이었던 김병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원군과 김병기 이야기가 맞물려 있는데, 대원군의 행적에 대해선 우리가 대충 알잖아요?
안동김씨 세도가들이 왕의 친인척들을 견제하고 역모로 몰아서 계속 처벌해 나갑니다.
이 와중에 살아남기 위해서 흥선 대원군이 파락호를 자처하잖아요, 세상 물정 모르는 궁도령처럼 행사하면서, 상갓집을 기웃기웃 하면서 상갓집 개라는 별명을 받게 됩니다.
뭐 얻어먹을 게 없나 해가지고 돌아다니다가… 일부러 리액션을 하는 거지요.
그 세도가 안동김씨들의 위협에 대해 리액션을 그렇게 한 거지요.
이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둘째 아들 명복이 고종으로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이때, 둘째 아들이 왕이 된 뒤에, 김병기의 집을 찾아갑니다.
이제는 대원군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실세 아닙니까?
산해진미를 차려서 대접을 합니다.
산해진미를 먹으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대원군이 갑자기 막~ 먹은 걸 토해 내는 거예요.
막~ 토해 내면서 한 말이, 안동김씨의 핵심세력인 김병기가 내가 대원군이 되자 나를 독살 하려고 음식에 독을 탔다고 해 갖고, 왕족들이 안동김씨에게 모함을 받았던 것처럼, 거꾸로 이 김병기를 끊어 내려고 합니다.
이때 김병기가, 이 문제는 리액션이라는 책에서, 달인 급 리액션의 예로 등장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김병기라고 하는 이 안동김씨의 핵심 세력가가 뭘 한 거 같습니까?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해 나간 것 같습니까?
대원군이 토해낸 것들을 다 자기가 먹습니다, ‘봐라, 독살할 음모가 전혀 없었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하! 대단해요, 대단해요, 정말 리액션의 달인들입니다.
근데 여러분 아십니까?
진정한 리액션의 달인은 누구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진정한 리액션의 달인입니다.
리액션의 달인, 달인 급 리액션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에요.
구원을 받은 전과 후의 차이점이 뭡니까?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의 모습은 바로 리액션에 있다는 것이에요.
구원받은 자가 리액션의 달인이라는 말이 어떤 뜻이냐 하면, 첫 번째, 주도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주도적인 액션을 취하는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자기가 뭘 알아서 액션을 취할 필요가 없어요.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니셔티브를 쥐고 액션을 취하실 때에, 그 액션에 대해서 리액션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액션의 주도권을 놔 버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나 그 액션의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의 액션에 대해 리액션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리액션의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게 바로 리액션입니다, 리액션.
리액션만 하면 돼요.
뭘 자꾸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이루겠다고 그러지 말고,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리액션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나를 이끌고 계시니까, 하나님의 주도적인 액션은 항상 이어져가고 있으니까.
하! 사는 거 끝났어요, 간단해요.
리액션만 하면 되는 거예요, 리액션만.
둘째로 리액션의 달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액션에 대해서만 리액션한다는 얘기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리액션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리액션의 달인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대하든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해서 리액션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상황을 만납니다.
좋은 상황, 나쁜 상황 뭐 괴로운 상황, 실패한 상황, 성공한 상황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리액션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의견과 생각과 마음에 대해 리액션합니다.
상황을 만날 때는, 그 상황을 주도하시고, 상황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또 리액션합니다.
이게 리액션 달인이라는 거예요.
아무리 실패하고 어려워도 실패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 실패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반응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리액션의 달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리액션의 달인의 모습, 그리고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거예요.
본문에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해서 40년을 앉은뱅이로 참으로 가엽게 살던, 구걸하며 살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치유를 받는 기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 기적의 여파가 지금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센세이션이 점점 더 가속화 되고, 점점 더 확장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목을 할 때, 성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종교 체계 안에서 합법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적이 없는 갈릴리 촌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 천, 수 만 명 앞에서 가르치는 모습, 그 광경 자체가 그 당시의 기득권 층에 있었던 대제사장이라든지 사두개인, 사두개인 중에 대제사장 출신이 많았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볼 때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다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하게 됩니다.
‘너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병자를 고치고, 이렇게 가르치고 하는 일을 하느냐, 누구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이렇게 물어볼 때 베드로가, ‘너희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불쌍하게 살던 사람이 치유함을 받게 된 이 기적에 대해서, 이 기적이 어떤 능력과 권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내가 말하겠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사람을 그렇게 낫게 했다. 그리고 그 이름만이,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이름이다’라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구원의 길.
예수님 이름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 이름을 믿는 게 뭐지요?
예수님 이름을 믿는 것과 예수님 이름을 아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이제 구분이 되시겠지요.
예수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인물에게 내 마음을 드린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름만을 인지한다는 얘기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렇죠?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은 알지만, 박근혜 대통령 실제 인물과는 나와 관계가 없고, 내가 마음을 주지도 못합니다, 이름만 아는 거예요.
이름을 아는 것과 이름을 믿는 것은 다른 겁니다.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인물에게 내 마음을 드린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구원이 주어진다는 얘기에요.
구원이 주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40년 동안 미문에 앉아서 앉은뱅이로 살다가 치유된 사람으로서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앉은뱅이로 40년을 살았다, 이 사람에게 제일 문제는 뭡니까? 동작이 불가능한 겁니다.
액션과 리액션이 불가능 한 거예요.
그래서 3장에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들어다가 성전 미문에 데려다 앉혀 줍니다.
그러면 구걸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액션과 리액션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치유함을 받고 이 사람이 한 일이 뭐냐 하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동작이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이 사람을 낫게 해 주는 하나님의 액션이 있었습니다.
이 액션에 대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리액션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상징적으로 구원의 모습을 보여준 뒤에, 실제로 베드로 요한 자신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서의 리액션을 합니다, 실제 삶에서.
그게 뭐냐 하면,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 예수 이름으로 다시는 언급도 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아라하고 협박을 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스승님이신 예수님을 잡아 죽인 사람들입니다.
얼마든지 무서울 수 있지 않습니까? 부담을 느낄 수 있어요.
근데 이때 이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지 너희가 판단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따라서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바로, 리액션의 달인이라는 얘기입니다.
리액션의 달인이라는 얘기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중에도 하나님에 의해서 리액션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 왜 하나님 앞입니까? 지금.
이게 이상한 거예요.
왜 하나님 앞이라고 얘기하죠?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이 아닙니까? 대제사장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인들 앞에 있는 거 아닙니까?
이게 바로 구원받은 자의 리액션의 달인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앞에 있는 걸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리액션의 달인 된 모습을 우리가 조금 응용을 해서 생각하면 이런 거예요.
연예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연예인들이 목숨을 거는 게 있어요.
인터넷 상에 올라오는 댓글입니다, 댓글.
자기 사진이 하나 올라오면 그 사진에 대한 댓글이에요.
‘뭐 이렇게 멋지냐, 샘난다, 정말 현실의 인간 같지가 않다’ 이런 댓글을 보면 좋아합니다.
근데 댓글 중에, ‘완전히 성형발이다, 다 뜯어 고쳤다, 저 배 살짝 옷 바깥으로 나오는 뱃살을 봐라, 저렇게 자기 관리가 안 될 바에는 나가 죽어라.’ 이런 댓글을 보면 그 댓글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그런 댓글이 반복되다 보면 자살까지 가는 겁니다.
이게 리액션하는 거예요, 리액션하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 리액션하는 거예요.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예수 전하지 말라 그럴 때, ‘알겠습니다!’
안동김씨 세도가들 앞에서 상갓집 개 노릇 한 것처럼 임시 모면할 수도 있어요.
그게 리액션이에요.
근데 이렇게 리액션 안 합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공회원들보다 더 가까이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 리액션합니다.
내가 너희를 때리고 죽일 것이다.
이 육체에 대해 협박을 하게 됩니다.
근데 이 육체보다 더 가까운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리액션합니다.
그래서 순교가 일어나는 거예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순교를 하는 겁니다, 이게 리액션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 세상에 리액션하느라고 연예인들이 댓글을 보면서 일희일비합니다.
근데 웃기는 거예요, 성경이.
성경 말씀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나에 관한 말씀, 나를 향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향해 주신 말씀이에요.
그 속에 나에 대한 댓글이, 그 성경 전체가 어떻게 보면, 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달아 주시는 댓글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사랑하신다고 하는 말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묘사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바 뜻이 뭐냐 하면,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바로 전지전능하시다.
다시 말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랑할 만큼 귀한 존재다’라는 댓글을 달아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 성경 속의 댓글에 대해선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전부가 나에 대한 댓글인데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댓글에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것이 안 됐지만,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으면 자살까지 하겠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근본을 따져 보면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게 바로 자살이고, 세상에 대한 리액션이라는 얘기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색이, 세상에 리액션하고, 사람이 뭐라 그러면 반응을 하고, 거기에 일희일비하는 거예요.
‘예수님 이름 전하지 마라, 가르치지도 마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가 판단하라.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리액션하겠다 이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그 분과 연합하는 게 예수 이름을 믿는 겁니다.
이게 바로 원초적인 리액션입니다, 원초적인 리액션.
하나님의 액션, 하나님이 어떤 액션을 취하십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십니다.
내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 진 나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맺으신 거예요.
이 원초적인 하나님의 액션에 대해서 리액션할 때에, 이 리액션으로부터 모든 리액션이 다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기쁨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리액션할 때,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라고 리액션할 때에, 그 리액션으로부터 항상 기뻐하는 리액션,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기도의 리액션,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리액션이 나오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이 세상에서 나에게 리액션을 요구하는 모든 사람, 모든 상황, 모든 물건에 대해서 죽어버리니까,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리액션할 수 있게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 그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유재석씨나 강호동씨나 박명수씨처럼 1인자 2인자 쯤 되가지고,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면서 승승장구 하지 못해도, 늘 게스트로만 나오면서 오래오래 방송인 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그 조형기 같은 사람, 그리고 왜 김나영이라는 아가씨, 김영철, 이런 사람들 주로 게스트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리액션 하나에 있는 거예요, 리액션.
주도적으로 뭘 하지 않고 리액션만 하는데, 평생을 먹고 사는 겁니다.
조형기 씨, 몇 번 만나 봤어요.
얼마나 잘 사는지 몰라요.
벤츠 자동차에다가, 일산에 멋진 단독주택을 가지고 잘 살아갑니다, 리액션 하나로.
우리 기독교인이 구원받고 산다는 것은 대단한 거 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액션에 대해 리액션만 하면 되는 거예요.
학벌이 필요한 거 아닙니다,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거 아닙니다, 외국어 실력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정말 돈도 없고 건강도 별 볼일 없는 상황을 주셨어요.
이 상황을 주신 게 하나님의 액션에 의한 것이에요. 그러면 리액션하면 되는 거예요.
‘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게 돈이 이거 밖에 없다니요? 이게 하나님 다 아시고 계시고, 하나님의 액션에 의한 결과인데 감사합니다!’ 리액션하는 거예요.
그 리액션으로 먹고 살아요.
리액션이 다음에 축복을 부르고 하나님의 다음의 액션을 불러들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액션에 대해 올바르게 리액션할 때, 내 리액션에 대해서 하나님의 리액션으로 오는 게 그게 바로 축복이에요.
그게 바로 정말 비교가 안 되는 이 세상에서 주는 것과 다른 그런 평강입니다.
리액션만 하며 살면 되는 거예요.
지금 돈이 없습니까? 돈 벌려는 액션을 취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그것도 물론 리액션이에요.
돈이 없다는 상황에 대한 리액션인데, 그렇게 내가 스스로 액션을 취하지 마세요.
그냥 돈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주신 거라 생각하고 리액션해요! 감사해요!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저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고 있는데 욕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액션 안에서 저 사람이 나에게 욕하는 거예요.
그러면 리액션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욕을 하다니요, 어떻게 내가 죄인 인 걸 알고 나를 욕을 할까요? 감사해요’ 리액션하면 되는 거예요.
그 리액션 하나 갖고 평생을 먹고 사는 거예요.
리액션의 달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 사는 게 뭐 별것입니까?
대단한 계획을 주도적으로 해나가고, 꿈과 비전을 엄청나 게 큰 것으로 확정하고, 그것을 향하여 열정을 갖고 뜁니까?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액션에 앞서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이 앞서고, 하나님의 액션이 앞서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주고 계시니, 저는 그저 리액션만 하게 해 주시며, 제일 먼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액션에 리액션함으로써, 그 리액션으로부터 모든 축복으로서의 리액션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