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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식량과 순두부로 아침식사
아침에 일어나 운동도 할 겸 밖으로 나오니 어제보다 스모그가 더 심하다. 모든 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운행을 하고 있고 길 건너 건물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스모그가 심하다. 한국에서 가져간 전투 식량 2개를 띁어 물을 붓고 비볐더니 맛있는 비빔밥이 된다. 아침운동을 나갔다 오는 길에 시장에서 사 온 순두부와 사과를 곁들이니 훌륭한 아침식사가 된다. 아침을 먹으며 소림사 가는 것을 포기하고 뤄양(洛陽)으로 가기로 한다.
▶ 등펑 시외버스터미널
▶ 뤄양가는 미니버스 안에서
▶ 스모그에 휩싸인 뤄양 시내
숙소에서 나와 배낭을 메고 걸어서 등펑 시외버스터미널로 가 뤄양 행 미니버스에 오른다. 오늘 스모그로 소림사 가는 것도 포기하고 뤄양으로 스모그를 피해 도망치는 것인데 이놈의 스모그가 우릴 놔 주지 않고 계속 따라 온다. 한 시간 쯤 달리자 일반 승객과 함께 여행객들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몇 내린다. 우리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자 버스기사가 의아해 하며 “여기가 관림인데 안 내리느냐?”고 묻는다. 우린 뤄양까지 표를 샀는데 고개를 도리질하니 이상하다며 그냥 달린다.
뤄양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에 짐을 풀고 룽먼(龙门:용문)석굴로 향한다. 용문석굴(龙门石窟)은 둔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곳이다.
▶ 룽먼석굴 입구 상가
▶ 룽먼석굴 입장권-표하나로 룽먼석굴, 향산사, 백원을 입장할 수 있다.
▶ 전동차
택시로 약 40분 쯤 달려 도착하니 매표소까지 가는 전동차가 기다린다. 걸어 갈 수도 있지만 관린(關林)과 바이마쓰(白馬寺)까지 돌아보려면 시간을 아껴야 할 것 같아 전동차를 탄다. 매표소에 도착해 입장권을 사려니 입장료가 120元. 살인적인 중국 관광지 입장료 누가 좀 말려 줄 수 없나? 그러나 이 티켓 한 장으로 메인인 서쪽 룽먼석굴, 동쪽 향산석굴, 향산사, 유명 시인 백거이의 무덤을 모두 돌아 볼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중국 주요 관광지의 입장료는 정말 비싸다. 하루 숙박비가 1인당 50元에 교통비, 식비까지 해봐야 하루 150元 정도면 여행할 수 있는데 관광지 입장료가 120元이라면 정망 비싼 것이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입장료가 싸면 너무 많은 중국인들이 몰려 관광지가 황폐화되기 때문에 비싸게 책정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인가?
▶ 룽먼석굴 일대 안내도
입구 앞 안내판에는 황허의 지류인 이허(伊河)강을 중심으로 룽먼산과 맞은편 향산의 암벽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신 동굴군의 위치가 안내되어 있다. 두 곳을 합하면 현존하는 석굴 수가 무려 2345개에 이르고 불상 수는 10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남북조시대 북위 정권이 다퉁(大同)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이후 다퉁의 윈강석굴(雲岡石窟)를 세운 숭불정신을 기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 용문(龍門)
▶ 관리소 안 또 하나의 문
용문(龍門)이라 멋들어지게 새겨진 석조 다리 밑으로 난 입구로 입장해 조금 걸어 들어가니 룽먼석굴 관리소가 나오고 이곳에서 문을 또 하나 지나면 개미굴처럼 숭숭 뚫린 석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석굴들은 육조시대 북위의 효문제가 짓기 시작한 이래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수, 당, 북송의 역대 왕조에 걸쳐 약 400년 에 걸쳐 조각되었다고 1500년이 넘은 역사의 기운이 내 눈앞에 다가온다.
▶첸시쓰(潛溪寺)란 석굴군
입구에서 맨 먼저 첸시쓰(潛溪寺)란 석굴군이 나타난다. 목조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당나라 때 조각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석굴마다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불상 머리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어 너무 안타깝다. 오랜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오던 불상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 놈들의 머리속엔 뭐가 들었던 놈들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석굴 안쪽 벽면에도 수많은 불상 부조들이 조각되어 있다.
▶ 빈양삼동(賓陽3洞)
▶ 북위의 선무제가 만든 빈양중동(賓陽中洞)의 수골청상(秀骨淸像) 양식의 부처님
그 옆에는 북위의 선무제가 만든 빈양중동(賓陽中洞)이란 석굴이 있는데 얼굴이 가련하고 수려하며 날렵한 소위 S라인의 육감적인 수골청상(秀骨淸像) 양식의 부처님이 근엄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다른 부처님에 비해 엷은 미소를 짓고 있어 인상적이다. 이 석굴군 좌우에 있는 南洞과 北洞 석굴군과 합쳐 賓陽3洞이라 부르는데 이곳을 만드는데 무려 8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 수많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완포동(萬佛洞)
▶ 당대 마애삼불감
이어지는 징산쓰(敬善寺)와 마애삼불감을 지나니 수많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완포동(萬佛洞)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무려 15000개에 가까운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는데 작은 것은 불과 몇 cm에 불과하지만 동굴 밖까지 조각된 작은 불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 모양이 모두 다르게 보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조각 감독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조각한 그 시대 석공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천장에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된 렌화둥(蓮華洞)
▶ 한글 번역이 잘못된 안내판
석굴에 새겨진 불상을 하나하나 음미할 수도 없고 해서 혜간동과 노룡동은 건너뛰고 천장에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된 렌화둥(蓮華洞)으로 향한다. 그런데, 석굴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 “올라가지 마라!”는 안내판의 한글이 “하지 마시오, 암벽등반하다”라고 쓰여 있는 것 아닌가! 누가 중국어를 해석해 줘 이렇게 썼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한글이 중국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 관계자라도 보이면 나라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보이질 않는다. 렌화둥의 천장에 조각된 연꽃 문양의 채색은 1500년이란 세월의 장구함에도 지금까지도 붉은 색이 살아 있어 당시의 채색문화가 얼마나 발달되었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 높이 17m에 이르는 노사나불
올라가 수 없는 몇 개의 석굴군을 지나 펑센쓰(奉善寺)로 간다. 룽먼석굴 최대의 볼거리라는 이 석굴 중앙엔 높이 17m에 이르는 노사나불이 자비롭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며 좌우엔 부처님을 측근에서 보좌한 아난다존자(阿難)와 부처님 사후 교단을 이끈 까사빠존자(迦葉) 그리고 금강(金剛)과 신왕(神王)의 조각상이 보좌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임에도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엷은 미소와 철학까지 담은 듯한 빼어난 예술적 감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걸작을 바라보자니 입이 딱 벌어진다. 로사나대불(盧舍那大佛)은 머리가 4m, 귀가 1.9m이고 전체 높이가 17.14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으로 로사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신불 중 하나이다. 노사나불의 모델이 당나라 여황제인 측천무후란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 자신의 아들들은 연이어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라 공포정치를 펼쳤던 것을 가리기 위해 측천무후가 이곳을 지을 때 시주를 하면서 자신을 포장하려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노사나불은 높이가 워낙 높아 문화 대혁명 시절 홍의병들이 파손치 못해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의 석불과 보살상들은 다른 곳에서 조각해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대형 불상들이라니 더욱 놀랍다.
끝없이 펼쳐진 석굴과 석불들, 당시엔 크레인이나 마땅한 도구도 없었을 텐데 망치와 정 그리고 밧줄만으로 이 석굴과 석불들을 만든 것을 생각하니 그들의 깊은 불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정말 힘들었겠다는 측은한 생각도 든다. 바로 앞에 강까지 있어서 바람이 매섭게 불었을 텐데,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을 견딘 장인이 만든 명품 중의 명품이 아닐 수 없다.
▶ 만수교 , 정면에 보이는 곳이 동산석굴
펑센쓰를 나와 나머지 설굴들은 대충 그냥 지나쳐 동산석굴과 연결되는 만수교로 간다. 다리 밑을 흐르고 있는 이허는 수량이 많이 줄었는지 자갈과 모래 위로 잡초가 무성한 강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허전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홍수 땐 물이 룽먼석굴 아래까지 차올라 석굴들을 보존하기 위해 뚝을 단단히 쌓아 수해를 방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허의 도도한 물결은 찾아 볼 수 없다. 평일에다 스모그가 심해서 그런지 다리 위를 걷는 관광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 동문석굴 입구
▶ 동문석굴
만수교를 지나 방금 본 석굴을 뒤돌아 바라보니 스모그가 너무 짙어 멋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다리를 건너며 펑센스를 바라보니 대단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수교를 건너면 동산이라 부르는 돌산이 있고 그 돌산 여기저기를 석굴로 만들고 불상을 만들었는데 동산석굴의 불상은 조금 전 룽먼(서산)석굴에서 본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만들다 만 것도 있고 아마추어인 내가 보아도 예술성도 많이 떨어져 보인다. 동산석굴은 아마도 인턴 석공이 연습했던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석굴의 부처님의 얼굴이 모두 훼손되었다. 얼굴만 훼손되었다는 것은 누가 일부러 훼손했다는 증표다. 부처가 사라지면 그 다음 세상은 누가 보호할까? 홍위병이 보호할까? 아니면 다른 종교의 신이? 무지한 인간들, 내 것이 중요하면 남의 것도 중요한 줄 알아야 하는데....
이제 동산석굴이 모여 있는 언덕을 내려가 이하 강변으로 내려가 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의 서산 석굴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백거이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측천무후도 건너편 서산석굴을 바라보며 시화대회도 제법 여러 번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처럼 스모그가 자욱한 날은 서산석굴을 바라보는 풍경조차도 누릴 수 없다. 평생 한 번 여기를 온 나에게 이런 날씨는 최악이다.
▶ 향산사
돌계단을 올라 향산사(香山寺)로 간다. 어제 숭산 태실산에 오를 때도 돌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렸는데 오늘도 계단 천국이다. 일년 동안 오르내려도 다 모 오르내릴 계단을 어제와 오늘 정말 지겹게 오르내린다. 동산석굴이 있는 산 중턱에 당나라 때 대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이곳을 사랑해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곳으로 유명한 향산사(香山寺)라는 작은 절이다. 이 절이 향산사란 이름으로 불린 이유가 산 이름이 향산이고 향갈나무가 많이 자라 향산이라 부르고 향산에 절을 지었으니 그 이름이 향산사며 그곳에 말년에 행복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는 백거이도 향산 거사라 칭했다 한다.
향산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용문석굴 입구에서 산 입장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입장권이 없으면 여기뿐이 아니라 백거이 묘가 있는 백원에도 들어갈 수 없다. 누구나 들어올 때 표를 사지만, 왜 이렇게 다시 검사하는 사람을 두나 모르겠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민을 끔찍이도 생각하고 일자리를 더 만들기 위해 이러는 가 보다.
표를 검사받고 안으로 들어가니 장제스와 손문이 잠시 머물렀다는 건물이 나온다. 건물 내에는 그들이 이곳에 머물렀을 때의 침대와 비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향산사 대웅전
북위 시대인 516년에 건립된 향산사의 주불은 아미타불로 대웅전의 현판도 미타보전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다른 절처럼 대웅전 앞에는 향나무를 심어 놓았다.
▶ 대웅전(미타보전) 내 아미타불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옆으로 두 제자가 있는데 하나는 영취산에서 꽃을 든 붓다를 보고 웃었다는 마하가섭이며 다른 하나는 역시 열 제자 중의 하나인 석가모니 사촌 동생인 아난다라 한다. 다시 그 옆으로는 협시보살이 있다. 불단은 무척 간결하고 소박하게 꾸며 놓았다. 아미타불과 제자와 협시보살은 모두 하나의 통나무를 조각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 백거이 묘소가 있는바이위엔(白園:백원) 입구
향산사를 구경하고 나와 용문교 쪽으로 가다 보이 바이위엔(白園:백원)이라고 쓴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오른편에 바로 백거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백거이가 죽으며 원했던 바로 그곳에 묘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1982년 뤄양시에서 묘원을 중수한 후 그 이듬해부터 외부 공개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곳이 지금은 용문석굴의 가장 매력적인 경구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쓰여 있지만 우리가 갔을 땐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 바이위엔 입구에서 들어가면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제법 운치 있는 계곡 청곡구
묘원은 전체적으로 세 구역으로 뉘는데 우선 묘원으로 들어가면 청곡구라는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제법 운치 있는 계곡으로 풍류를 아는 사람이 묻혔다고 주변 환경을 제법 잘 조성해 놓았다. 백거이는 죽어서도 이런 멋진 곳에 누워있으니 아마도 사후 세상에서도 멋진 시를 지었을 것 같다. 묘원으로 꾸몄지만, 워낙 아름다운 곳이라 마치 아름다운 정원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오늘 하루 돌산에 조성된 석굴만 보고 다녔으니 숲이 제법 우거지고 잘 조경된 이곳이 당연히 아름답게 보인다.
▶ 회랑의 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거이가 남긴 시를 돌에 새겨놓은 회랑이 나타난다. 한문을 안다면 이곳에서 백거이의 시 몇 편을 읊으며 거닐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위로 왼편에 낙천당이 있는데 그 안에는 백거이가 쓴 시집을 비롯해 많은 서책과 지필묵이 진열되어 있지만 짧은 한문 실력으로는 읽기조차 어려운 글이 많이 있다.
▶ 백거이의 묘
낙천당을 끼고 조금 더 올라가니 제일 위에 커다란 묘가 보인다. 묘 앞의 석비에는 당소부백공지묘(唐少傳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아마 백거이가 당나라 태자의 스승이었기에 당소부(唐少傳)라는 비문을 새겨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묘지 위에 나무를 자라게 내버려 두면 주위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는데 이들은 묘소 이에 풀과 나무가 자라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좌우간 한 시대를 풍류했던 시의 거장도 죽고 나니 이렇게 잡초와 나무가 무성한 무덤 안에서 한 줌의 흙으로 변한 것이다.
▶ 한국 白氏 종친회 참관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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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白氏 종친회 기념비와 일본의 기념비
묘지 옆에는 우리나라 백씨 종친회와 일본, 싱가포르에서도 이곳을 찾아 기념비 세워 놓았다.
백원을 나오니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용문교를 건너 용문석굴 입구로 발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