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32)>에는
봄에 육부 이름을 고치고 각각 성을 주었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성을 이씨로 했으며,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성을 최씨로 했으며, 대수부는 점량부[모부 라고도 한다]로 고치고 성을 손씨로 했으며,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성을 정씨로 했으며, 가리부는 한비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했으며,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성을 설씨로 했다. {영인}
이 기록은 한국성의 시작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이를 근거로 이른바 최씨대동경주기원설이 나왔다. 또『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에는 “진한 사람들은 박(바가지 만드는 풀 열매)을 박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으므로 성을 박이라 했다.”[1] 또 같은 책 <탈해이사금>에는 “궤짝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자를 줄여 석을 성으로 삼았다.”[2] <탈해이사금, 9년 봄 3월>에는 “금빛 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이라 했다.[3]”
이런 기록들은 묘사가 매우 실감 나지만, 해방 후 삼국통일 이전에 세운 신라 비석이 많이 발견되면서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 비석들은 모두 육부(六部)에 사성(賜姓)을 했다는 32년으로부터 500년 이상 지나서 세운 것들이지만 어떤 비석에도 신라인의 성씨는 적혀 있지 않았다. 따라서 유리이사금 9년에 사성이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계속 유지되지 못했으니 한 번의 해프닝(happening)에 불과하다.
대표적 사례로서 561년(진흥왕 11) 세운 국보 제33호 창녕비에는 “훼부(양부) 거칠부 일척간님과 사훼부(사량부) 심표부 급척간님과 촌주 마질 술간님”[4]라고 적혀 있다. 만약 『삼국사기』에 적힌 대로 32년부터 성을 사용했다면 “이거칠부 일척간님과 최심표부 급척간님과 촌주 마질 술간님”이라고 적어야 옳다.
또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리신라비에는 법흥왕이 재판을 벌여 판정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524년(법흥왕 11) 1월 15일 훼부 모즉지 매금왕”[5]이라고 적혀 있다. 훼부는 양부(梁部)로 『삼국사기』에 이씨로 사성 했다 적혀 있다. 모즉(牟即)은 법흥왕 휘(諱, 이름)고, 지(智)는 님처럼 사용되는 존칭 의존명사고, 매금(寐錦)은 신라 임금이라는 것이 고구려 금석문을 통해 증명되어 있다. 만약 32년에 정말로 양부에 이씨로 사성 했다면 법흥왕은 김씨가 아니라 이씨가 되는 것이다.
신라 6부가 각각 6개 성(姓)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32년에 그들에게 사성을 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그로부터 먼 훗날(아마도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 유학생들이 중국성을 인용(引用)하여 성을 만들 때 양부 귀족은 이씨를 인용하고, 사량부(沙梁部) 귀족은 최씨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량부 최씨는 최이정(崔利貞)으로 헌덕왕 17년(825) 당나라 유학생 대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한성화된 성을 사용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신라 진흥왕이다. 하지만 진흥왕의 성씨 사용법은 현대인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색하다. 말하자면 처음 사용하다 보니 서툴렀던 것 같다.
『북제서(北齊書)』 <하청 4년(565)>에는 “2월 갑인일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지절로 삼아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영인} 라고 적혀 있다. 즉 신라 24대 진흥왕이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冊封)을 받은 것이다.
진흥왕은 휘[6]가 삼맥종(三麥宗)이다. 말하자면 김삼맥종을 책봉해야 하는데 실수로 김진흥을 책봉해버린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등은 훙서(薨逝) 후에 만든 묘호[7]다. 진흥왕은 훙서 이전에 이미 진흥으로 불렸으므로 묘호는 아니고, 본명(本名)은 삼맥종으로 따로 있다. 아마 생시(生時)에 사용하던 일종의 존칭호(尊稱號)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6~7세기 신라 임금 기록에는 이런 사례가 많다. 모두 성씨를 처음 사용하면서 발생한 시행착오로 생각된다. 26대 진평왕은 휘가 백정(白淨)인데 『수서(隋書)』에 김진평(金眞平)으로 적혀 있고, 27대 선덕여왕은 휘가 덕만(德曼)인데 『책부원구(冊府元龜)』에 김선덕(金善德)이라 적혀 있다. 이상을 통해 신라성은 중국과 외교(外交)를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교 목적에서 왕이 처음 김씨 성을 사용했고, 외교적으로 역할이 필요한 귀족들이 또한 김씨를 인용했으니 김유신(金庾信)이 대표적 사례다.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金武力)이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김유신이 김씨를 인용하므로 인해 저절로 김씨가 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처음에 성이 없었다. 『고려사』<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의하면, 왕건의 아버지는 용건(龍建)이고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인데 훗날 왕건이 왕씨(王氏)로 성씨를 만들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모두 왕씨가 되었다. 아들이 왕씨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왕씨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각주 ------------------
[1] 辰人謂瓠爲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爲姓.
[2] 初櫝來時有一鵲飛鳴而隨之宜省鵲字以昔爲氏.
[3] 以其出於金櫝姓金氏.
[4] 喙居七夫智一尺干沙喙心表夫智及尺干村主麻叱智述干.
[5] 甲辰年正月十五日喙部牟即智寐錦王.
[6] 諱. 죽은 사람 이름. 대개 높여서 부를 때 사용한다.
[7] 廟號. 훙서(薨逝)한 임금의 시호(諡號). 사당(祠堂)에 모시므로 묘호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