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산자야’라는 종교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불교를 제외한 신흥종교 집단을 크게 여섯 개로 분류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컸던 종교집단의 종교지도자 였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자이나교에 추월당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큰 집단이었고, 논쟁이 붙었을 때 '산자야'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누군가 당시의 스승에게 물어봅니다.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존재합니까?, 아닙니까?" 어떤 스승은 ‘존재 한다’고 얘기하고, 어떤 스승은 ‘다 죽고 나면 끝이다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스승은 ‘아니다 신이 있어 죽고 나면 그곳으로 간다.’ 또는 ‘신이 돼서 다음 세상으로 간다.’ 등 여러 방법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산자야'는 ‘불가지론’의 사상으로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다음 세상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말을 합니다.
"왜 이런 논리들을 폈느냐?" 하면 실제 우리가 보고, 들으며, 냄새 맡고 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아는 것들은 실제로 보여지는 것이므로 부정을 못합니다. 그리고 "누가 죽었다.", 내가 그걸 직접 봤다."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해 들었거나, 본 사람이 없을 때는 반론들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산자야'라는 스승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내가 직접 보고, 들으며, 냄새 맡고 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얘기해 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신이 있는가 없는가?"하면 "누가 신을 본 사람이 있어?" 하며, "최초에 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가?" 하면 "누가 태초에 가본 사람이 있어?"라고 하고,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습니까?"하면 "죽고 나서 돌아와 본 사람 있어?"라며,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그것이 "맞다", "그르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없다고도 말할 수도 없으니, 이처럼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종교와 논쟁해도 '산자야'가 우세합니다. 이것을 일견에서 보면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로 모여듭니다. 이때 붓다의 십대 제자가 되기 전의 '사리불'과 '목련존자'도 '산자야'의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산자야'의 밑에 많은 제자들이 모였지만, 이들은 실제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후에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다’ 라고, 가르치는 스승의 제자들은 다음 세상이 있으니까 내가 조심하며, 열심히 살고, 바른 일을 하려 합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삶에 이익을 갖게 됩니다. 또한 ‘다음 세상은 없다’라고, 가르치는 스승의 제자들은 "내가 지금 어떻게 살겠다."라는 계획을 세우려 합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삶에 이익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산자야'의 제자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이들에게는 배움에 대한 실제적인 이익이 없게 됩니다. 이들은 다만 끊임 없이 사유하고, 끊임 없이 추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산자야' 밑에 있는 제자들은 추리 능력은 굉장히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논쟁에도 지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이들의 행은 모든 것을 추론으로 만들어가는 형태를 띕니다. 그러니 이는 이익도 없으며, 다만 피곤해 지기만 합니다. 이는 '산자야'가 하는 것은 ‘불확정성’이며, ‘어떤 것도 확정지을 수 없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산자야'의 밑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는데 그중에서 '사리불'과 '목련존자'도 거기서 논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으로 삶에 안주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자야' 밑에서 공부는 했지만 이로 인해 깨달음에 이른 것도 아니고, 욕심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이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곳을 떠납니다.
이 둘은 헤어지며 바른 길을 알게 되면 서로 알려주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사리불 존자'는 길을 가다가 '앗사지 존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앗사지 존자'가 탁발한 음식을 받아가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스승인 '산자야' 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앗사지 존자'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당신은 어떤 진리를 따라가며,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그는 답합니다.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마디만 가르쳐주십시오.” 드디어 '앗사지존자'는 한마디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내 스승이신 부처님은 그 원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때 '사리불 존자'에게 "아, 이것이 진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이를 듣고 지혜의 눈이 트입니다. “한마디 더 해주십시오.”, 그는 답합니다. “원인이 소멸하면 깨달음에 이릅니다.”, “원인이 소멸하면 그것이 열반이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십니다.”
'사리불 존자'는 첫 번째 게송을 듣고는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두 번째 게송을 듣고는 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원인이 소멸하는 건'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 하며, 이를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다원 이상의 도과를 성취 하려면 자기가 스스로 수행해서 체험하지 않으면 그 이상으로 도과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원인이 소멸하는 열반에 대해 말 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체득한 것이 아니라면 이를 심신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부처님 밑에 가서 직접 수행해야겠다.’ 라고, '사리불존자'는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친구 '목련존자'도 같이 갑니다. 이때 스승 '산자야'도 같이 가자고, 얘기해 봅니다. 그런데 '산자야'는 부처님 보다 훨씬 나이가 많습니다. “내가 왜 거기 가냐. 젊은 스님한테. 갈려면 너희들이나 가라.”
“스승님.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붓다라는 이름을 들기만 해도 거기에 귀의하고, 법을 따릅니다. 그러니 갑시다.” 그런데도 안간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현명한 사람이 많냐, 어리석은 사람이 많냐? 니 말이 진짜라면 현명한 사람들은 부처님한테 갈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내게로 올 것이다.”
그러자 두 제자는 자기를 따랐던 500명에게 물어봅니다. “이곳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인에 의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열반에 이른다고 법을 설합니다.”
그러자 반은 남고, 반인 250명은 그들을 따라갑니다.
'산자야'가 가만히 보니까 화가 치밉니다. 500명 이던 제자들의 반이 사라지니 강당이 썰렁해 집니다. 내가 열성으로 가르쳤는데, 이리 빠져나가다니 분하고, 원통합니다. 그리고는 위대하고 칭송됬던 스승은 피를 토합니다.
그리고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이로 인해 '산자야' 교단이 거의 쇠퇴해서 없어지게 됩니다.
그후에 '목련존자'는 혼침에 대해서 부처님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사리불 존자'는 그후에 보름이 지나고 나서 허무주의적인 견해인 "허무하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에 대한 가르침을 듣다가 깨달음을 이룹니다. 이처럼 진리라는 것은 실제 입니다. 그러니 내가 몸과 마음으로 진리를 체득해서 이를 증명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진리는 몸과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 명상의 이익입니다. 그러니 명상이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이에 대한 실제인 진리를 체득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실전명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