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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6:1-19) 틈새의 진공밀착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틈새의 진공밀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틈새의 진공밀착’
이제 가을이 지나면서 겨울로 접어들고 있지요. 어느 날 집에 들어가 봤더니 집사람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장롱 속에 있던 옷들을 정리하는 것을 제가 옆에서 눈여겨보았습니다. 요즘 세상이 참 좋아졌어요. 커다란 비닐 안에 안 입는 옷들을 집어넣어서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공기를 쭉 빨아들입니다. 오리털 점퍼 같이 부피가 큰 옷들도 꺼낼 때 보니까 납작하게 눌려져 진공이 되어 있습니다. 가뜩이나 장롱 속이 복잡한데 그렇게 진공포장 비닐 안에 다 넣어서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밀착을 시켜서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틈새의 공기를 빼내면 양쪽의 물체가 찰싹 달라붙지 않습니까? 제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반신욕을 하는데 욕조 뒤에 등을 기댈 때 어떻게 하면 욕조와 제 등이 공기가 하나도 없이 밀착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제가 지금도 보여들일 수 있지요. 손바닥을 틈새가 없이 꽉 붙인 다음에 떼면 소리가 납니다.(요런 소리) 어렸을 때 장난 많이 했지요. 마치 굉장한 것을 터득한 것처럼 의시대기도 하고.
이렇게 틈새를 진공으로 밀착시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가 틈새의 진공밀착을 일으킨다면 뭐와 뭐의 틈새입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틈새를 주님의 십자가가 진공으로 밀착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틈새를 진공으로 밀착시키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뒤집혀지고 맙니다. 여러분! 레슬링을 할 때 벌칙을 주면 그 용어가 정식 용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빠떼루’라는 것 있잖아요? 손을 짚고 엎드린 상태에서 심판이 손으로 표시를 하면,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뒤집히지 않으려고 온갖 힘을 다 쓰고, 또 상대방 선수는 그 사람 몸을 뒤집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자세를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틈새가 벌어지지 않도록 레슬링 선수가 바닥에 온 힘을 써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상대방 선수의 손이 자기의 배를 감싸 안지 못하도록 애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그렇게 달라붙지 않는 한 반드시 뒤집힙니다.
뒤집히는 것을 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데 평강이 뒤집혀 집니다. 감사의 마음이 뒤집혀 집니다. 불평으로 바뀌어 버리지요. 기쁨이 뒤집혀 버리고 원망으로 분노로 변하고 미움으로 우울증으로 변합니다. 다 뒤집혀 버리고 맙니다. 하여간 내가 지금 기쁘지 않고,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과 계속 소통하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뒤집혀져서 틈새가 벌어진 것입니다. 틈새가 벌어져서 레슬링의 빠데루 자세로 있던 사람이 점수를 잃는 것처럼 지금 뒤집혀 버린 거예요.
그러면 틈새로 들어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과 나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제 느헤미야가 가지가지 원수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다 마쳤습니다. 단 하나 성벽의 문짝을 달아야 되는데 아직 문짝을 못 달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듯이 방해를 하는데 셋이 모여서 쑥덕거리면서 함정을 파놓고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로 불러내서 대화를 하자고 합니다. 네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느헤미야는 오노 평지로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오노 평지로 가면, 좋게 대담을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버팁니다.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무엇으로 느헤미야를 방해하려고 하느냐하면 ‘네가 지금 모반을 행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하고 있는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네가 왕이 되려는 영역을 지금 건설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성 루머, 모함하는 루머를 만들어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의 봉인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읽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그 편지를 갖고 가는 사신이 그것을 열어보고 다 돌아다니면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야,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하고 있데. 페르시아 왕에게 반기를 들고 있데.’라고 모함을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얼마나 느헤미야를 신뢰하고 총애합니까? 그런데 그 왕에게 오해를 받을 가능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스마야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마 제사장 가문인 것 같아요. 제사장이거나. 그런데 이 사람이 두문불출한다기에 느헤미야가 갔더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제 공사를 중단하고 문짝 다는 것을 멈추고 얼른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성소가 있는데 성소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잖아요?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앞부분에 성소가 있습니다.) 그 성소 안으로 도망하여 피신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율법에 어긋납니다. 제사장 말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게 잘못된 얘기라는 겁니다. 이게 뭐냐? 스마야라고 하는 제사장이 뇌물을 먹은 거예요. 매수를 당한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여기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니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해서 성전중심의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앞장서 나가는 사람이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율법을 어기고 성소 안에 들어갔다면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적들이 무서워서 그 안으로 피신했다면 그 안으로 들어간 것도 잘못이고 피신한 것도 잘못 아닙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그러한 모습을 나타날 때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의기소침해지고 좌절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의 방해는 하나님과의 틈새를 내려고 하는 도비야가 유대인 중의 귀족가문과 정략결혼을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서 많은 유대인 중의 귀족들과 high society에 속한 사람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이 적들이 내부인들과 동맹을 맺어요. 참 느헤미야입장이 쉽지 않지요. 이때 이런 모든 난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틈새가 진공밀착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틈새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짚어보기를 원해요.
첫 번째, 여러분!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 직장이면 직장, 학교면 학교 어디서 생활하던지 내 마음에 절대적인 샬롬과 감사의 마음과 기쁨이 없다면 뒤집혀진 것이라고 했어요. 왜 뒤집혀졌습니까?
틈새가 벌어졌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나와의 틈새가 벌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뭡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틈새가 벌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말씀이라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도 말씀입니다만, 내가 하는 지금의 행동이 내가 생활하면서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확신이 없이 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틈새를 허락합니다. 반드시 그런 일에 의해서는 우리 삶의 평강이 깨어지고 감사가 깨어지고 우리마음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는 뒤집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대적들이 느헤미야에게 나와서 ‘나와 함께 대담을 하자. 회의를 좀 하자. 논의를 좀 하자.’라고 할 때 느헤미야는 그 때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 큰 역사를 내가 지금 이루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면 되었지, 너희들과 만나서 의논할 일이 무엇이냐?’라고 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 하면 그만이다. 누구와 내가 의논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cd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려봅니다마는, 밴쿠버 삼성교회에서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cd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진짜 여러분! 한국이고 미국이고 캐나다고 어디에서도 cd를 그렇게 대중적으로 보편적으로 만들었던 교회가 없었습니다. 만들고 보니까 이래저래 말이 많았습니다. 그 cd자체도 매체 자체도 보급이 안 돼 있고 자동차에서 듣기도 좀 그렇고 설교가 너무 어려운 설교이기에 앞부분에 연예인들의 간증을 집어넣든지 하자는 등 말이 많았습니다. 연예인들의 간증을 무슨 수로 매주 찾아서 넣겠습니까? 그대로 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설교가 어렵다고 하니까 내가 마음이 위축이 돼요. ‘잘 하지도 못하는 설교 어렵기까지 하다면 누가 이 cd를 듣고 도대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인가?’라고 자꾸 마음이 위축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다가 다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지금 이진법복음 선교회를 인터넷으로 이렇게 합니다.
목회 다 그만두고 지금도 아침에 카메라만 보고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누가 듣겠습니까? 누가 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잘난 설교를 듣고 앉아 있겠습니까? 그러나 들으나 안 들으나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니까 하는 것이지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시켰기 때문에 하는 거니까, 누가 들어도 하는 것이고 안 들어도 하는 것이고 잘 났다고 해도 하는 것이고 못났다고 해도 하는 것이지요. 누구랑 의논을 하겠습니까? 내가 이 아침에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아침 홈 채플 설교를 한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이지요. 그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누구하고 의논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자꾸 다른 사람의 반응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귀 기울이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일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을 향한 나의욕망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일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는 모함과 루머입니다. 이간질을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총애를 받고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처에 총독들이 모여서 사마리아의 총독 아라비아의 총독들이 모여서 ‘왕이 신뢰해서 예루살렘으로 보냈던 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자기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라는 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아닥사스다 왕에게로 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느헤미야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왕이 오해할까봐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일은 없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어요. 그렇잖아요? 아닥사스다 왕도 사람인데 옆에 있는 총독들이 제 4관구 2관구 3관구에서 볼 때 5관구에서 반역이 일어나고 있다면 ‘누구냐? / 느헤미야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성벽을 쌓고 이 사람이 왕의 호의를 뒤집어서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번 가고 두 번 가다보면 왕의 마음이 ‘어, 정말이냐?’ 하고 의심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자기를 총애하는 자들,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모든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절대 그 사람들의 호의와 그 사람들의 친절을 앞세워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이 보시는 그 가운데에 내가 하지 않은 것이면,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하건 말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등을 돌리건 말건, 어떤 가능성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다시금 조서를 올려서 ‘왕이시여, 산발랏과 도비야가 보낸 편지에 흔들리지 마옵소서.’라는 얘기 안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말씀드렸잖아요. 밴쿠버에 있을 때 '미국에서 보험을 사기 치다가 적발이 되어서 이민국에 의해서 추방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제가 마츠다에서 나온 사브를 탔어요. 새벽기도를 28km를 왕복했기에 밴쿠버가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아주 날씨가 궂습니다. 또 저희 집은 언덕에 있었어요. 오르고 내리고 하는데 4륜 구동이 되는 마츠다에서 나온 유틸리티 자동차를 샀어요. 사브 모양으로 된 것을 샀는데 그 뒤에 스포츠라고 돼 있어요. 비싼 것도 아니에요. 일본 차 중에서 마츠다 차가 제일 싼 것입니다. 스포츠라고 씌여 있었는데 저를 반대하는 분이 편지에 뭐라고 돌렸느냐하면 태 목사가 스포츠카를 타고 다닌다는 내용의 편지들을 서울로 까지 보냈어요. 밴쿠버 전역에 퍼뜨린 것은 물론이고 그리고 교민신문 중앙일보나 조선일보에 전면광고로 말을 만들어서 온 밴쿠버에 다 돌리고 서울에 다 돌리고 심지어는 일본까지 그 편지가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이 미장원에 가면 미장원 주인이 ‘그 나쁜 목사님 아직도 안 떠나셨어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분만 그렇게 말 했겠어요? 아니 목사가 명예를 잃어버리면 무엇을 가지고 목회를 합니까? 그래도 하나님 보실 때 하지 않은 짓들이었어요. 제가 스포츠카를 탄 적도 없고 이민국에서 쫓겨난 적도 없고 보험사기를 쳐본 적도 없고 그냥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하는 겁니다. 그러자니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틈새가 벌어집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오해하게 하는 이런 일들이 그냥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서 분노하게 하지요. 미움이 생기게 하지요. 그런데 분노와 미움이 생겨버리면 도대체 무슨 수로 설교를 합니까?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할 수가 없지요. 죽을힘을 다해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고... '살려달라'는 것이 '루머를 없애달라'는 것이 아니라, 루머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저 사람 미워하면 나는 끝입니다. 아니 제 눈으로 보는데 중앙일보 전면광고를 보는데. 조선일보 전면광고를 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인 것이 하나도 없는데.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온 것만 빼고. 죽어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틈새가 벌어지면 끝나는 겁니다.
틈새가 벌어지는 것이 뭡니까? 그것에 반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니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내게 호의를 베풀고 총애하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다 마음으로 버려야 됩니다. 그 사람들의 총애를 마음으로 지니고 있었으면 하나님보다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람의 총애와 사람의 호의가 먼저 들어왔다면 틈새가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액션을 취하고 마는 겁니다. 왕에게 편지를 보내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그러나 나를 총애하고 사랑하는 왕조차도 하나님 다음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해 안하시면 되고 하나님이 나를 뭐라 안하시면 되는 것이다.’ 라고 붙어 있는 겁니다. 틈새에 진공밀착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세 번째 내부인을 매수해요. 제사장입니다. 성소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 그리로 피신하라고 그래요?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이 문제잖아요. 그런데 장소로서의 성소에 들어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겁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성전 뜰에 와서 번제를 드림을 통하여 실제 내 스스로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흔히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의 날개 그늘아래 와서 쉰다.’ 그리고 교회 오면 목사님들이 위로를 해 준다. ‘아,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다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라고 말을 하지요.
우리의 영이 똥과 오물로 가득가득 쌓였는데 하나님이 그냥 날개아래 품어주실까요? 오는 것을 반가워합니다마는 거기에는 절차가 있는 겁니다. 성전에는 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돼요. 그건 번제를 통해서 나를 태우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안아 주시지요. 번제를 얘기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날개그늘아래 피하라고 하는데 피해집니까? 하나님이 그 더러운 것을 감싸실 수가 있습니까? 이런 말 듣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 말씀에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말씀에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런 얘기해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님이다. 맞아요. 이 스마야도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이에요. 그러나 이 사람이 말씀을 떠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붙어있고 십자가의 말씀에 붙어있는 목사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라도 십자가말씀으로 삶을 살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설교하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를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가짜예요.
분명히 말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에요. 십자가만 전한다고 하니까 편협하다고 그래요. 뭐가 편협입니까? 편협이 아니라 십자가는 근간입니다. 기독교를 가능케 하는 사건입니다. 거기서 죽고 거기서 부활하면서 기독교인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디다대고 편협이니 뭐니 하는 그 따위 말을 합니까? 이단 같은 소릴 합니까?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목사라는 신분, 장로라는 신분, 권사라는 신분,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받아들였다가는 하나님과의 틈새가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인들의 내통함이 나옵니다. 조금이라도 가까운 자들, 실력자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높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기대고 마음에 담아놓았다가는 반드시 그들에 의해서 뒤집혀 되게 돼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의 귀족들 정말 그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잖아요? 외지에 있다가 타국에 있다 와서 일을 하는데, 외부적으로는 반대가 많고 적들이 많은데 정말 이 유다인들 중에 귀족들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 귀족 놈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적들과 내통합니다. 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의지했다면 하나님과 느헤미야 사이에서 이 귀족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신뢰나 의지함이 있었다면 또 뒤집혀지고 말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는 진공으로 밀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예쁜 내 자식이라도 끼이면 안 되고 아무리 내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도 끼이면 안 되고,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도 들으면 안 되고 오직 십자가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진공이 돼야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이라고는 사람이든 말이든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밀착되게 해 주는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고, 이렇게 밀착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끊임없이 빠떼루 자세를 뒤집으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를 뒤집으려고 하기 때문에 반드시 뒤집혀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도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내가 죽었다. 내가 죽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과 진공밀착을 이루시고, 하늘의 평강에 붙어있고 기쁨과 감사에 붙어있고 쉬지 않는 기도에 붙어 있는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떤 것이라도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먼저 마음에 붙잡는 이 세상의 것 없게, 세상이 완전히 진공상태가 되어서 하나님과 붙을 수 있도록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십자가복음을 전하시는 목사님을 만난 것이 복중의 복입니다. 십자가복음이 아닌 것은 다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방해하는 자들이 왜 없겠습니까? 이럴때 일수록 하나님과의 틈이 나지 않도록 더욱 주님의 십자가로 진공밀착돼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의 열열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를 수 있도록 ... 제로원의 모든 식구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