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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있게 사는 길
전도서 9 : 11 - 18
본문을 통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11절 말씀이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니라.”
전도서 기자는 여기에서 이 세상의 헛됨을 한층 더 세밀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전도서의 기조는 세상의 헛됨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하는 모든 일이 우리 손에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을 우리는 누구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 생활 체험을 통해서 보는대로 우리의 예측과 기대에 너무 어그러지는 일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10절에도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자세는 장래를 알지 못하지마는 내 최선을 다해서 무슨 일이든지 성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까지 책임질 수도 없거니와 지지도 못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는 것을 합니다. 정성을 들여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곡식이 자라고 열매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謀事在人 成事在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무슨 일이든지 인간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간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언 27장 1절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님도 우리에게 퍽 교훈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에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
이 사람은 치밀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까지 자기 나름대로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계획이 잘 세워졌다고 해도 힘써 노력하노라고 해도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계획이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이 무엇인데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시지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리 끝에 속으로 말했습니다. ”내 소출이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을 다 거기에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여기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은 아무런 계획도 하지 말고, 노력도 소용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과단성 있고 추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이 일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우리가 이것저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9징 21절에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런 계획 저런 도모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실 뿐만 아니라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에 내 생각 내 계획이 안 이뤄진다고해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우주의 계획은 완전히 이루어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하였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나 명철로도 여호와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를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은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경주하는데 빠른 사람이 선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제는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항상 선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갑작스런 사고로 지체되든지 너무 안심하고 태만하다가 늦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는 수가 많고 강력한 군대가 승리하며 용기있고 힘센 투사가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항상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레셋의 골리앗은 소년 목동 다윗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력자이었습니다. 골리앗 자신도 어린 다윗을 보고 우습게 생각하고 얕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된 것을 우리가 압니다.
사람들은 보통으로 식견이 있는 자들이 자산가가 되며 세상을 살아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 풍부한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큰 재산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 언제나 명철한 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2절에 말씀을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시기와 우연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연”이란 말은 사람 편에서 한 말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우연이 아니라 섭리 중에서 이뤄지는 시기인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절에도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31편 15절에도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하였습니다.
인간의 길이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단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최선 다해 합니다. 그래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실패하는 경우엔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따르고 자신의 분수를 지킵니다.
그러나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성공하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교만해 집니다. 그런데 실패하면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며 낙심하고 좌절되어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12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날, 우리의 시간을 모릅니다. 우리 앞에 어떤 환난이 있을지도 모르며 어떤 경우가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데려갈지도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내일 일을 모릅니다. 한 날에 혹은 한 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 중에 하나입니다. 내일 일, 다음 일을 모르기에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지 만일에 나중에 될 일을 안된다고 하면 무서워 겁에 질려 미리 죽을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볼 때 틀림없이 좋은 일이요, 우리에게 만족과 성취를 줄 수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그 일에서 난관에 부딪치거나 함정에 빠지는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립니다.”
물고기와 새들은 그들을 유혹하기 위해 미끼를 단 올무와 그물을 보고 욕심을 내서 달려들다가 걸리고 맙니다. 인간도 말하자면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에게 갑자기 닥치는 유혹을 받고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인간은 그들이 행복을 구하던 곳에서 파멸을 발견하며 횡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죽음을 당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환난을 언제 당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장래의 모든 것 주님께 맡깁시다.
그리고 본문 13절 이하에서 참된 지혜의 공헌이 무엇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본문에서 하나의 예화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예화는 하나의 공동체가 곤경과 위기를 맞았을 때 자기의 지혜로써 큰 봉사를 한 “어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조그만 성읍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성읍을 차지한다 해봤자 별로 볼 것도 없는 아주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그 성읍 안에는 그 성읍을 방어할 만한 사람이라곤 소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은 수이고 보니 그들은 약하며 겁이 많아서 그들의 성읍을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이 작은 성읍을 치려고 한 임금이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읍을 포위하였습니다. 어떤 동기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조그마한 성읍이 생각하던 것보다는 견고한 것을 보고 이 성읍에 대항하는 큰 흉벽을 쌓고 그 성벽에서 포격을 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몇 시간 안에 그 작은 성읍을 얻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작은 성읍에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한 가난한 지혜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었으나 가난했고 이 작은 성읍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아 유력한 인물로 발탁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비록 가난했지만 지혜로웠기 때문에 위기에 놓여 있는 이 성읍을 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곤경 속에서 그를 찾아내었고 그의 조언과 조력을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가난한 지혜자는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위기 일발 멸망 직전에서 건졌습니다. 그는 포위된 자들에게 지혜로운 가르침을 베풀고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보통 사람이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어떤 절묘한 계책을 그들에게 지시한 모양입니다.
그는 그 동안 자기를 이 성읍에서 소외시켰다고 야단하지도 아니하고, 자기는 가난하며 잃어버릴 것도 없으니 이 성읍에 어떻게 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성읍을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성공적으로 이 작은 성읍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혜롭고 자기 성읍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하였습니다. 그의 이 귀하고 선한 봉사로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에게 명예로운 훈장도 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전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가운데서 미미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이렇습니다. 배은망덕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노력한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는 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기억하지도 못하나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지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하십니다. 이 땅위에서는 상주는 사람이 없을지 모르나 하늘 나라에는 우리 위해 상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였습니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 맛을 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소금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이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 대문에 기도하는 무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지만 누구도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끝으로 본문 17절과 18절을 보십시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리라.”
여기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은 합리적이고 요령이 있으며 조용하고도 신중히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언에도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하였습니다.
지혜자의 말은 그 말이 비록 조용하게 하는 말이지만 크게 소리치는 우매자의 말보다 더 경청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매자의 떠드는 소리보다 더 감명을 줄 것입니다.
더구나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라고 했는데 지혜자는 언제 다급한 일을 당하여도 서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아니하고 당황하지 아니하고 침착한 자세로 자기의 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밖으로 볼 때는 가난하고 약해 보이지마는 하나님의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온 천하가 일어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도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언제나 종용하고, 침착하고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조금 넓은 의미로 생각하면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매한 육신의 소리는 강합니다. 호령을 칩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종용하기 때문에 어떤 때 주의깊게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아니합니다. 더구나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세미하게 들리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렇습니다. 들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아니하면 들을 수 없습니다.
예배당에 나온다고만 듣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계시록에 자주 나타나는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마는 사람은 물론 안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예민한 귀를 가져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합니다. 그러나 죄악에 빠져 사는 사람은 양심이 마비가 되어서 들리지도 않게 되고 맙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세상의 호령치는 듯한 육신의 소리 우매자의 소리를 듣지 마시고 종용히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끝으로 18절 말씀 보시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반절에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느니라” 병균 하나는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몸에 침입하면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하고 고통하게 합니다.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기 시작하면 그 구멍으로 인해 큰 저방이 무너지고 맙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에서 패하고 망신한 사실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장군은 땅을 치며 울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내 명령 어긴 사람이 있어. 그래서 내가 너희를 떠났다. 이제라도 그를 잡아 아골 골짜기에 묻어 버리지 아니하면 내가 결단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여호수아가 이때 정신이 들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아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유쾌하게 되는 날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죄를 품고 있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에는 아간이 없습니까? 이 죄를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 성실하게 삽시다. 그리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사십시다.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가 있으면 청산하고 이해를 전진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