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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교수 / 사람 냄새 (미 6:6-8)
I. 들어가는 말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주전 722년)을 전후로 하여 활동하던 미가 선지자의 시대의 모습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먹는 가렴주구의 탐관오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3:1-3). 부정축재자들과(6:10-12) 가진 자들의 횡포로 인해 일반 서민은 먹을 것을 찾기 힘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심했습니다(7:1).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리한다는 종교 지도자들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미 3:5).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정치, 경제, 종교의 피폐함이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간성 말살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미 7:2-6)
II. 전하고자 하는 말씀
지금부터 10년 전쯤 북에서 귀순하여 비교적 성공적으로 남한 사회에 적응했고 냉면 집 40곳을 운영하여 돈도 벌었다는 전철우씨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만나 본 귀순자의 80%가 '남한이 지긋지긋하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남한 사회를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하지요." 전씨의 친구들이 그에게 한 조언들이 더 기가 막힙니다. "돈을 벌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절대 믿지 말라. 돈을 노리는 사람일수록 친절하니 속아서는 안된다… 결혼하더라도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부인도 믿어선 안 된다." 우리의 시대와 미가의 환경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씨의 인터뷰를 담은 기사 제목이 "남녘생활 10년 사람냄새가 아쉬워요"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았던 미가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6:6)?" 인간성이 상실된 이와 같은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묻는 질문입니다. 정말이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요? 더구나 여기서 '나'는 그와 같은 세상에서 같이 어울려서 죄인이 된 공범자로서의 '나'입니다. 우리의 삶의 척도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수평적으로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그럴듯해 보이느냐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성공의 관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공의 잣대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입니다. 받아주느냐 받아주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이 좌우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는 왕후 에스더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교수가 어떻게 평가를 해 줄까를 생각하며 밤을 세워 페이퍼를 쓰는 학생의 마음입니다. 바이어의 마음에 들도록 제품을 만들어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구매 결정이 나기를 기다리는 사업가의 입장을 염두에 두시면 됩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미가의 시대와 같이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에, 헐뜯기 잘하고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며 아주 가까웠다가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 같으면 매정하게 배신하고, 약한 사람은 짓밟으며 가진 사람 앞에서는 꼬리치며 아부하며 교활하고 무정하여 참 인간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갖고 나가야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인생의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제사 중에서 비용이 가장 많이 들고 남는 것이 없는 번제를, 그것도 일년 된 싱싱하고 깨끗한 송아지를 통 채로 태워서 드리면 될까요? 그것으로는 안 된다구요? 그러면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으로 드릴까요? 솔로몬의 1천 번제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도 안 된답니다. 그러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큰놈을 번제로 드릴까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그것도 아니라고요? 그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얼마나 더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얼마나 더 비용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말일까요?
8절에 따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뭐가 이렇게 시시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번제보다도, 희생보다도, 그 어떤 제사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의와 인자와 겸손한 경건입니다.
공의(미쉬파트)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바르고 곧은 것입니다. 투명하게 정직하고 진실된 것이겠지요. 비뚤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후보자들의 좌우명들이 좋았습니다. (이회창 - "바른 곳에 서고 큰 길을 간다." 김대중 - "무엇이 되느냐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이 모두 올곧음의 미쉬파트를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계산이 복잡하고 비비 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지 못하고 뒤에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가를 한참 생각해야 하는 인간 세상이 되어 있지요. 그것은 미쉬파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쉬파트가 없는 세상, 그래서 믿고 신뢰하고 마음 탁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곧은 사람이 그리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이와 같은 시대에 하나님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미쉬파트의 삶입니다. 깨끗하고 구린데가 없고 투명하게 곧은 삶의 자세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자(헤세드)는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unfailing love)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로 인해 노하고 벌줄 때도 있으나 결국은 자신을 포기하며 어버이가 지고 마는 그런 사랑입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대지보다 넓은 사랑, 베풀어 용서하는 사랑 헤세드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받으신답니다. 피터 마샬(Peter Marshall)의 기도를 같이 음미해 보겠습니다. "Lord, when we are wrong, make us willing to change. And when we are right, make us easy to live with."(주여 우리가 잘못 되었을 때는 기꺼이 변화되게 하시고, 우리가 옳을 때는, 같이 살기에 편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미쉬파트를 이루려고 애쓰지만, 의를 이루고 나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에 우리의 의는 다시 깨지고 만다. 헤세드가 이어지지 않는 '의'는 사람을 죽이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공의는 남에게 요구하고, 사랑은 자신에게 베풀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거꾸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의 좌우명 하나를 더 들겠습니다. 이한동 의원이 자신의 좌우명이 "임기추상 대인춘풍," 즉 자신에 대해서는 가을 서릿발 같이 엄격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봄바람같이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말씀에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공의는 나에게 먼저 적용하고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겠지요. 공의를 행하지만 동시에 인자하고 자비롭고 이해심이 있어 받아줄 줄 아는 따뜻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헤세드를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알아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경건을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과 헤세드를 보이는 것이 인간의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며 능력을 베풀어주실 때 가능해 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참 공의와 참 사랑을 베풉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만이 경건과 성결을 유지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다른 사람의 인격을 참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갖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시대에도 정치적 부패, 경제적 피폐함, 종교적 혼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이 합하여 "인간미"가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의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대한 묘사가 어쩌면 그렇게 적확하게 들리는지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했습니다. 수년 전 베스트 셀러로 읽히면서 많은 사람을 펑펑 울게 만들었던 김정현씨의 소설 「아버지」를 기억하십니까? 사실 특별한 명작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구성이 치밀하지도 않고 사용된 언어와 개념의 구사가 문학적으로 특별나게 탁월하지도 않았습니다. 소재가 기발한 것도 아니었지요. 오히려 삼류 신파극의 흔한 소재 선정의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랑과 죽음이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모두 울었습니다. 아버지들도, 딸들도, 아내들도 모두 눈물을 뿌렸습니다. 저도 이국 땅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마구 쏟았습니다. 왜냐구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이 시대의 아픔과 정서를 잘 대변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정말 아픈 곳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울고 싶었는데 울 건덕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아버지」였지만 주제는 인정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조금만 인용을 해 봅니다.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사람의 냄새를 맡아본 것이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사람의 냄새가 그리워 그토록 아쉽고 허전하고 외로운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의 결어 부분은, 취장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아내를 위해, 아들과 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나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내를 위해 준비한 진주목걸이와 반지를 손에 쥐고 죽은 한 외로운 가장의 유서입니다. "… 아이들을 잘 길러 주시오.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말이오. 사람냄새가 그리운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오. 메마른 이 세상 사람으로 남읍시다…" 사람냄새에 대한 그리움. 이것이 우리를 울게 한 숨겨진 눈물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 사람냄새를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서로를 아프게 하고 서로를 찔러 상처를 주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미가의 시대와 같이 사람냄새가 아쉬운 인간성 말살의 시대에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요? 최고의 십일조와 물량공세로? 할렐루야 찬양과 소리 높은 통성기도로?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출석의 완벽함으로? 네 필요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열심은 존중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와 인자와 겸손의 경건이 없으면 오히려 눈쌀을 찌푸리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행위는 두 가지 단면을 갖는다고 봅니다. 첫째는 축제(celebration)로서의 신앙 행위로서 일반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로 정의하는 것들입니다. 예배로 모여서 찬송을 드리고 공중 기도를 올리며 말씀의 선포를 들으며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일들입니다. 성찬식을 갖고 세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집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예전적 행위와 감성의 고양, 지적인 확인 등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종교학의 용어로 '의식'(儀式, ritual)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신앙 행위의 또 다른 단면은 '삶'(life)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동료 인간들과 갖는 관계로서 정의됩니다.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이 경건한 자의 의무입니다. 남에게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를 '실천'(實踐, praxis)이라 해도 좋고 '윤리'(倫理, ethics)라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양자를 다 필요로 합니다.
전자의 신실함이 후자에의 신실함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괴롭고 가슴 아픈 말들을 듣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 "교회에 와보니 종교인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 우리가 기도는 잘 하는데 이웃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면, 찬양할 때 박수도 잘 치고 누구보다도 '주여, 할렐루야'를 멋드러지게 발음하면서도 밖에 나가서는 무섭고 매정하고 지나치게 악착같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며 이기적이면 이런 말을 듣습니다. 십일조는 정확하게 하는데 이웃 돕는데는 지독하게 인색하면 '먼저 사람이 되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인도주의와 혼동해서는 아니 되겠지만 인도주의를 상실한 신앙은 '사람잡는 믿음'이 됩니다. 「아버지」가 그리워했던 사람냄새는 신앙행위의 두 번째 단면인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향기였습니다.
사람 냄새가 그리운 이 시대, 정말 구수한 사람 냄새를 풍기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사람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자주 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담겨진 여러 가지 다른 암시가 있겠지만 오늘 저는 그 용어의 말뜻 그대로를 받아들여 묵상하렵니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인간이셨습니다. 압제하는 지도자와 힘있는 자들에게는 추상같았으나, 죄 지은 여인에게는 오히려 문제가 될 만큼 관대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에게는 독설로 꾸짖었으나, 죄인과 세리들과는 식탁을 같이 하셨던 예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가여운 병자들을 보고 민망히 여기시던 예수님. 사람냄새가 물씬 물씬 나던 분이셨지요. 예수는 참 사람이셨습니다. 사람냄새가 그리운 분들, 몰인정한 이 세상에 지친 분들, 이제는 정말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은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예수께로 오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양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선한 목자이고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는 화끈하고 끈끈한 사랑의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시는 참 사람, 진짜 인간 예수께로 오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사람의 아들,' '사람의 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풍겨야 할 사람냄새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그리고 참 사람의 아들이셨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냄새를 풍기는 존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을 때,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사람냄새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III. 결 어
지금과 같은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될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요? 사실 내용을 보면 그렇게 거창하거나 비용이 크게 드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과 역사의 현장에서 공의를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향기, 사람냄새 나는 사람으로 살면 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거인들이 실패하는 일입니다. 연세 들어서 기력이 떨어지는 분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넘치는 젊은 사람이 못하는 일입니다. 가난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 많은 재벌들이 실패하는 일입니다. 가방 끈이 짧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배운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일입니다. 외모가 뛰어난 미남, 미녀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스 코리아나 멋있는 배우들이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