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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 2: 15 업신여김
딛 2: 15 업신여김 -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
1]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바울은 항상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잘못된 길로 나간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책망해야 할 교역자의 임무를 디도에게 말한다.
특히 이러한 임무는 '하나님의 권위'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2]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이 명령은 디모데에게도 주어졌다.
* 딤전 4: 12 -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그러나 디모데에게 주어진 명령은 '연소(年少)함 때문에'라는 이유가 붙어 있다.
물론 본 절에서의 명령도 디도가 젊기 때문에 주어졌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디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보다 확신을 가지고 임하라는 권면으로 보아야 한다(Scott).
목사들과 설교자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각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이상의 말들을 말하고 권면하고 모든 권위로 책망하기도 하며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적 권위가 아니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말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친 백성 ( 딛 2: 11-15 ) : 박조준 목사
이미 봉독하신 말씀 가운데서 디도서 2장 14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친백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려 하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친백성이란 헬라어로 ‘페리우시우스(περιούбιουѕ)’인데 그 뜻은 “둘러싸인 한복판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친백성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관심과 긍휼과 돌보심과 사랑으로 둘러싸여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친백성으로 삼으신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아주신 목적과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친백성이 되게 하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세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한 일이라는 것은 어느 한 가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말합니다. 복수형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선하다는 말이 언제나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들을 말하듯이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어느 특정한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열심’이란 말을 보세요. 이 말에는 ‘다른 사람들이 샘이 나도록’ 혹은 ‘시샘을 느끼도록’ 또는 ‘투기를 느끼도록’이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부러운 시기의 대상이 될 정도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에 헌신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은혜와 보호 속에 살고 있는 백성’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입니다.
시편 4편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하나님의 친백성은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이 누리는 기쁨은 곡식이 많아지고 넉넉해서 오는 기쁨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특별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친백성인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역사할 때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의 많은 지식이 저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친백성은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이는데도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사람과는 엄연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7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역설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친백성이 세상에서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친백성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백성은 하나님의 친백성을 비웃고 욕하고 핍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친백성인 우리가 왜 특별합니까? 세상 사람은 육신으로 한 번만 났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진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듭나 새로워진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니고데모같이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지식이 많고 지위나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듭나는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친백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사실 믿는 사람을 세상이 미워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왜요? 믿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만 두려워합니다. 세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바르게 살려고 힘을 씁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산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친백성은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 손에 붙들려 밤길을 가는 어린아이는 주변이 아무리 캄캄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 잠든 아이는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엄마 품에서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혹 잠이 깨었다가도 엄마의 손이 그 가슴을 두드리며 “엄마 여기 있어.” 하면 다시 잠이 듭니다.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잠이 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합니다. 스펄전의 말대로 “평화로운 양심은 좋은 침상의 벗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으나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순종에 기인된 것이라고 봅니다. 믿음을 단잠의 바위로 삼는 사람은 깊이 잠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아무리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폭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요란해도, 성난 파도는 바위라도 부술 것처럼 덤벼들어도 바위 안에 숨어 있는 갈매기는 고요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만세 반석되시는 그리스도에게 피하는 사람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친백성인 우리는 특별합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기쁨은 통하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생각 만해도 기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술을 생각하면 거기에 심취가 됩니다.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넘치는 기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실 세상의 것은 시들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실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행복한 부부는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볼 때마다 마음에 감사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게 저런 훌륭한 남편을 주셨으니, 내게 저런 좋은 아내를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것이 복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친백성을 누가 건드릴 수 있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친백성은 특별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친백성도 물 가운데로 지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불 가운데로 지나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물이 침몰치 못하고 불이 우리를 사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친백성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고 우리를 보내시고 우리가 일하는 동안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신 것은 실망하고 좌절한 사람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알리라고, 방황하는 심령들을 향하여 초대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친백성은 특별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쓰실 수 있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그릇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그릇을 깨끗이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더러운 그릇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그릇을 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친백성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백성의 호소를 반드시 들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호소를 듣기 위해서 기다리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친백성이 됩니까?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과정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 가는 과정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오는데 먼저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했고 다음에는 13절에 나옵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런데 여기 나오는 ‘나타나다’는 말은 역사인 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1.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가 나타나서 어떤 사건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까? 11절을 다시 보세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까? 바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사건은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 분을 믿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관심과 사랑과 보호와 그 모든 축복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또 한 번 우리에게 은혜를 나타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타나심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다리면 준비를 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날 그때를 기다린다”는 그 기다림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친백성다운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 삶에 성화를 촉구하는 일련의 덕목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주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의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으로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경건치 않은 삶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지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관념적인 하나의 신이 될지는 몰라도 절대로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삶은 실상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이고 이것이 곧 불경건한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디도서 1장 16절에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아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도 드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의 생활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만 의식할 뿐 하나님은 의식도 하지 아니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바로 불경건한 삶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시기를 정말 기다린다면 그런 사람은 자연히 경건치 않은 것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이란 이 세상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삶도 이 세상만 알고 오는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얽매여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합니까? 오는 세상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 땅에 살아온 삶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으며, 그 심판의 결과가 우리의 영원을 결정한다는 내세에 대하여 알고 깨닫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 있다면 경건치 못한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을 성취하기 위해 힘씁니다. 근신은 자기 자신에게 대한 덕목입니다. 의로움은 이웃을 향한 덕목이고,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입니다. 정말 우리가 나타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모한다면 우리 삶이 이 세가지 영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게 되고 이웃과는 정직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온전한 삶입니까. 이런 삶을 살려면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그때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관심을 받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이 되어 가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속에 나타났던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은 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흔들리고 열심이 식어지고 후퇴하는 순간을 맞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대상이었던 나를 그의 친백성으로 삼아주신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깨닫는다고 할 것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과 12절을 보세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여기 보세요.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할 때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감격이 시들해지면 그것은 신앙생활의 적신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정상적으로 하고 있나 하는 것을 알아보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생생하게 내 속에 살아 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이미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의 주님이 나타나실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은혜와 선물은 비슷한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면서 선물만 즐기고 그 선물을 주신 분은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신 분이 나타나십니다. 그 날이 재림의 날입니다. 왜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삽니까? 나를 구원하신 분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은 그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성도들)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하고 사려 깊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선한 일들에 열심을 가지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