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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 19 - 21 육체의 일 ( 2 )
2]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육체의 일의 세 번째 부류는 싸움이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열다섯 가지 죄악들 가운데 여덟 가지나 제시되어 있다.
전통 사본에는 이 부류의 마지막 악인 '투기와'라는 말 다음에 '살인과'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악들은 서로 통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다 이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들이다.
주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 여러 가지의 악들에 반대되는 덕이다. 물론 이 싸움은 정당한 싸움, 선한 싸움, 진리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었다. 미가야 선지자는 400여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었다.
신약 시대에 바울 사도는 많은 사람들의 버림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해 싸워야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한다.
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가 치러야 할 정당하고 선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이 아니고 육신의 죄악성에서 나오는 싸움이 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생긴 싸움이 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싸움이 있다.
자기 명예를 위한 싸움, 세상 권세를 위한 싸움, 이권(利權)을 위한 싸움이 있다. 이것들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싸움들이다. 이런 자들은 이웃을 향해 악한 분노를 품고 그를 해하기 위해 파당을 만든다.
파당과 참된 교제는 다르다. 우리는 성도들 간의 참된 교제는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육신의 죄악성에서 나오는 파당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싸움을 다 내어버려야 한다. 이 여덟 가지 죄악은 육체적으로 범하는 불화(不和)의 죄악이다.
"원수를 맺는 것"(*)은 성경이 여러 가지로 금한다. 사람이 원수를 맺음은 자기와 충돌된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기인한다. 성도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 출 23: 4-5 -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 욥 31: 29 -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 잠 24: 17 -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 롬 12: 21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몇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1) 하나님의 완전성이 나타난다.
* 마 5: 48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2)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심판장이 되는 참람한 죄를 면함
* 롬 12: 19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3) 용서하는 자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옴
* 잠 19: 11 -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원수를 갚는 자는 상대편의 악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대적하는 악을 더 많이 만들어 놓는다. 요한 번연은 진리 파수를 위해서는 강경하였으나, 진리의 적들이 그를 욕할 때에는 온유하게 참았다고 한다.
"분쟁"은 "원수를 맺는"일에서 나온다. 분쟁은 언제나 확대될 위험성이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 잠 17: 14 -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 잠 18: 19 -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 잠 25: 8 -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시기"는 남이 나 자신보다 나아진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은 마땅히 남이 자기보다 우수함을 볼 때에 기뻐해야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나보다 우수한 자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쁨을 가지게 됨.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과 같다.
(2)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쳤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인하여 억울하게 탈직을 당하여, 마침내 사막에 망명하여 종신(終身)하였다.
유명한 사무엘 루더포드(Ruderforth)도 사이드 셀프라는 교권자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하였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인하여 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분냄"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가지 훈계가 있다.
* 잠 12: 16 -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 잠 16: 32 -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잠 27: 3 -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 잠 27: 4 -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 전 7: 9 -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분노"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당한다.
고대(古代)의 유명한 학자 제롬(Jerome)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공적이 있다. 그러나 "분노"하는 성질이 과도하여 어거스틴(Augustine)에게 보낸 편지에도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그의 업적에 커다란 오점(汚點)이 아닐 수 없다.
"당 짓는 것"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는 '임금 노동자'를 의미한다(Greijdanus). 이 의미에서, 이것은 육체의 유익으로 매수되어 단결해서 진리를 항거(抗拒)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진리를 위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된 단결은 작든지 크든지, 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그것은 당을 지음이 아니다. 다만 비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육체적 수단으로 서로 단결한 것은 작당(作黨) 행위이다.
고대의 제 2 에베소 회의는 당파를 짓는 악한 사람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주회(主會)한 회의였다. 그 회는 경건한 플라비아누스(Flaviaus)를 축출하였고, 이단자(異端者) 유두게를 포용하였다. 칼뱅은 말하기를, "이 회의는 성령이 주장하시기 않았다. 나는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 BK. 4. chap. 10).
교회사에 나타난 대로 교황 그레고리(Gregory) 11세가 죽은(1378 A. D.)후에 교황권 쟁탈전으로 인하여 울반(Urban) 6세는 로마에서, 클레멘트 7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교권을 가지고 근 30년을 분립하였다. 이것은 순전히 권리를 위한 당쟁이다.
"분열함"이란 말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화합성(和合性)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참됨과 거짓됨은 그 교회의 공동 고백과 권징 실시 여부(與否)로써 판별된다. 그 교회의 성원인 개인 성도들의 사생활의 완전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다.
만일 누가 교회의 개인 성도들의 결점으로 인하여 교회적 생활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그것은 혹시 "분열"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누가 교회의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義)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抑壓)으로 축출을 당한다면 그는 "분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게 되는 것뿐이다.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derforth)는 16세기의 영국인으로서 건전한 개혁교회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신앙 위인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경 작성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어느 교직자의 시기를 받아 수감(收監)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가 옥중에서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이 땅의 목사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1637년 7월 14일 아벧딘 옥에서).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가 "분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떼로 하여금 이리와 같은 거짓 스승들에게 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요,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뿐이다.
* 마 7: 15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단"이란 말은 "채택함"을 의미한다. 곧, 이것은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진리와 표준에 위배되는 의견을 채택함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이란 칭호가 타파(打破)에 대한 편견으로 사용되었던 실례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옳은 편에서 그릇된 편을 향하여 부른 파명(派名)인 동시에, 그릇된 편을 향하여서도 사용하였다.
공정한 의미에서 "이단"은 역사적으로 고백해온 성경적 교리를 위반하고 다른 의견을 채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잘못된 다른 의견을 채택하였다가도 조만간 그것을 버렸으면 그는 이단자가 아니다.
갈 5: 21 유업을 받지 못할 것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투기"는 "시기"가 좀 더 악화된 것이다. 이것은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하여 심술이 나서 그것을 빼앗으려고까지 생각하는 악심(惡心)이다.
"술 취함" - 신구약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을 금한다.
* 잠 23: 29-35 -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 엡 5: 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을 약으로 사용함이 허락되었다. 그것을 빙자하여 술을 탐해 먹는다면, 그것은 속이는 죄까지 범함이다.
* 딤전 5: 23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성도가 술에 취하는 것이 불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에 알 수 있다.
(1) 성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술에 취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실수하게 된다.
* 벧전 2: 9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레 10: 9 -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 겔 44: 21 - 아무 제사장이든지 안 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2) 술에 취하면 일반적 행동에도 실수하게 된다.
성도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진리를 다 준행하지 못하는데, 술에 취하여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으랴?
* 잠 23: 29-35 -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3) 술에 취함은 건강을 해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의 마지막 부류는 술 취함이다. 술 취함이 육신의 죄악으로 정죄된 것은 사람을 방탕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술과 마약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을 빼앗아 간다.
술 취함이나 마약 복용은 사람을 비현실적인 환각 상태에 빠뜨린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 있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게 한다.
성경 시대에 술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술에 대한 몇 가지의 점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완전 금주(禁酒)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① 성경 시대의 술은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은 술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술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다.
② 술 취함은 죄로 명백히 정죄되어 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과연 술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③ 술이 가져오는 폐해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술은 몸에 해롭다. 술은 위와 내장과 혈액 순환기에 크게 해롭다. 또 심장병, 간경화, 중추신경마비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④ 술로 인한 경제적 낭비가 크다.
술과 담배 값을 절약한다면 어려운 가정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될 집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그러하다. 1986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간 마신 술값은 1조 3천 7백억 원이 넘었다. 25년이 넘은 오늘날에는 얼마나 더 늘어났겠는가? 국가적으로도 금주 운동이 필요하다.
⑤ 술은 여러 가지 사고의 원인이 된다.
살인과 강간 등의 범죄들은 술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도 현대의 골치 아픈 사회악의 하나이다.
자기 목숨만 앗아갈 뿐만 아니라, 무고한 이웃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죄악이다. 또 술 취하여 아내를 구타하고 자녀를 구타함으로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파탄케 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이 술의 폐해가 크므로, 잠언 23: 31은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고 교훈하였다. 술 취함은 방탕한 것이므로, 우리는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의롭고 선한 삶을 힘 있게 살아가자.
"방탕함"은 음란 이외의 모든 무절제(無節制)한 향락주의를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 진리를 악용(惡用)하여 이 세상 향락을 방종하게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나 이제는 양심으로 율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순종할 자유인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겨야 할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향락을 자기 마음껏 취할 처지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극기(克己)하며 사랑의 수고를 해야만 한다.
2]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에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 갈 곳이 어디인가? 그러므로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이런 죄를 회개치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구원받은 신자는 이런 일을 행하고 있을 수 없다.
일곱 번 넘어졌을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런 육신의 죄악 된 일들로부터 떠나야만 한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을지라도, 진리를 안 후부터는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 백성처럼 살다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