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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하나님 나라의 예표 막 9:1
본문의 말씀은 앞의 8장에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믿음을 굳게 하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신 예수의 말씀과(막8:30-38) 본문 다음에 바로 나타나 있는 엿새 후의 산상변화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영광의 재림에 대하여 예고하시고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엿새 후에 이루어질 산상변화에 대한 예고를 본문은 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기초가 서게 되는 것이며, 죽음과 부활과 재림으로 요약되는 신적 사역은 엿새 후에 있게 될 산상 변화로써 확실히 보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1) 십자가 수난의 예고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1절). 이 말씀은 8장에서의 말씀의 연속인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며, 이때 예수께서는 자기의 때가 가까워 온 줄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8:31)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주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몰락이며, 모든 희망의 붕괴를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그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라고 하셨습니다.
2) 순교신앙의 촉구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그러한 사람만이 재림의 때에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은 확실히 당황했을 것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에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다. 그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하여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산상변화의 신적 현현을 마음에 두시고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1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예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 메시야로서의 신적 현현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재림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지만 (막8:38), 그것을 믿는 믿음은 지금 곧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분명히 믿을 수 있게 하는 것 이상 제자들에게 요긴한 일은 없었습니다. 엿새 후 주님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들만 대동하시고 높은 산(헬몬산으로 알려짐)에 올라가서 변형되셨습니다. 변형되신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눅9:30,31)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셨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 있는 신적 존재임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그 한 장면의 목격만으로도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진리를 확신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2)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를 상징하고, 엘리야는 선지자 중 예언의 대표자를 상징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과 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산상변화의 모습은 율법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완성된다는 구속사역의 궁극적인 단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 구속 사역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십자가의 수난을 이야기 하신 것이며, 이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써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의 완수를 승인하셨습니다. 주님은 산상변화의 사건을 통하여 메시야로서의 신적 권능과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구속 사역의 완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유대 예루살렘에서 건설되는 인간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확한 진리와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절). 변화산상의 체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체험이었음에 틀림없으며, 베드로는 이때의 감격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벧후1:17,18)
변형사건의 교훈 막9:2-6
주님께서 앞으로 받으실 수난에 대하여 교훈하신 후에 제자들 중에서 지도자격인 세 사람을 데리고 헬몬산으로 오르셨습니다. 그것은 며칠 전에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수난을 예고하자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신성이 충만하신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믿음에 확신을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벧후1:17) 이러한 주님의 변화산 사건을 생각해 봄으로 신앙의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변화되신 주님
1) 변화되신 현장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2절). 본문에서 언급한 높은 산은 해발 3000M급의 헬몬산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팔레스타인 북쪽에 멀리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시다가 이 높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늘 하얗게 눈이 덮혀 있는 정상 아래로 깊은 협곡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맑은 물이 풍성하게 흐르므로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때 그 아름다운 주위 경관을 무색하게 하는 빛이 비춰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하신 주님으로부터 발현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꿈에 그리던 선지자 모세와 위대한 예언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서 순종하는 자세로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저편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는 신비하고도 엄숙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참으로 그 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토록 전능하신 분이심을 확신케 하는 자리였습니다.
2) 변화하신 목적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변형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고난당하는 메시야로 인하여 그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무력하게 끌려다니고 핍박 받는 예수님, 특히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리라는 주님의 예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계속 추종할 수 있는 용기를 꺽어놓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산상 변형의 사건은 제자들의 의심과 낙심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예루살렘까지 주님과 함께 입성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3) 산상변형의 의미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변화하신 모습을 통해서 장래 고난 후에 영화롭게 되어진 그분의 인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갈보리의 고난 저 뒷편에 주님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히12:1-3) 둘째, 이 사건은 성도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인격의 본성이 주님처럼 거룩하게 변화될 것이며,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권세를 가지시고 세상을 다스리실 때 주님과 함께 한 모세와 엘리야처럼 하늘의 영광을 누릴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주 예수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벧전4:13,빌3:10)
2. 제자들의 반응
1) 베드로의 기도
갑자기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경험한 제자들은 공포와 감격이 뒤섞인 감정으로 정신이 혼란했으며, 그로 인해서 바른 판단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면서 산상의 황홀경 안에서 안주하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산상 변화의 산건이 일시적으로 미래의 영광을 잠시 보여준 것일 뿐 현세에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기 대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다보면 때로는 주님의 영광을 힘입어 기쁨과 존경과 보람을 맛볼 수 있는 일도 많지만 결코 그런 면만 추구하거나 더 나가서 그것을 신앙생활의 주괸 내용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과 축복을 베푸신 것은 후에 닥칠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고난과 수모를 감당케 하시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주님 때문에 고난과 손해를 당하는 것마저 즐거워할 수 있어야 신앙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빌2:17;히10:33.34)
2) 제자들의 두려움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함으로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6절) 주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비록 성도들이라도 현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하면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눅24:36-38,사6:5) 제자들의 두려움은 주님의 변형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발현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결코 불의의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마10:28;행4:18,19)
변화산상의 기적 막9:7,8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변화산상의 체험은 참으로 경이적인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같이 다니시던 예수께서 휘황찬란한모습으로 변하시고 그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갑자기 제자들의 시야에 다른 광경이 나타났습니다. 한 떼의 구름이 몰려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을 감쌌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들려온 말씀이 본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름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매'.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구름이 와서 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1) 인간들을 보호하심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임재하신 것은 인간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특별 배려에서입니다. 범죄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로는 직접 대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지 아니하셨으며 나타나실 때는 인간의 보호를 위해 구름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와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구름 중에 강림하신 것은 세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광을 드러내심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임재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거룩하신 속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악된 속성이 하나니므이 거룩하심을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이처럼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증명하심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7절) 구름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은 직접 예수님을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 증거는 예수님의 사역 중 3회나 있었습니다. 본문을 비롯해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있었고(막1:11), 수난 기간의 기도 중에 있었습니다. (요12:28) 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증거하심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서 이와 같은 증거가 있었기에 주님은 험난한 세상에서의 사역을 무사히 마치실 수 있었습니다.
2. 사라진 사람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었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졌습니다.
1) 모세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가지를 교훈해 줍니다. 1) 율법이 증거하는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롬3:21) 2)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성이 되며(롬10:4) 예수님은 율법을 이룩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히10:7)
2) 엘리야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따라서 그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1)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의미하며(롬1:2,3,21;신18:15), 2) 이제는 선지자의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마11:13)
3. 남은 사람들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남은 것은 에수님과 제자들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위해서 남았습니다.
1) 예수님
예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증거를 받으셨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아직 그의 사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셔야 할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더 훈련시키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전인류의 죄를 대속하셔야 했습니다.
2) 제자들
제자들에게는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이 즐거웠습니다. (5절) 그러나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들림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자격이 미달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할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부활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고 세계에 증거하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들은 자기의 유익 이전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두가지 의문 막9:9-13
변화산상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은 교리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변화산상의 체험은 했으나 그 신비한 체험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두가지 의문을 제기했는데, 그 첫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것이며, 둘째는 메시야로 오셨는데 메시야보다 먼저 오리라고 한 '엘리야'는 어째서 아직 오지 않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엘리야'는 이미 왔으며,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죽음)이 있은 후에 온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 첫째 의문-부활이란 무엇인가?
1) 부활이란 무엇인가?
'저희가 이 말씀을…무엇일까 하고'(10절) 제자들이 부활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지금까지 부활한 사건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며, 변화산상의 체험으로도 아직 부활의 진리를깨닫지 못한데 있습니다. 또 이 의문 속에는 산상 변화에서 보여 주신대로 주님께서 메시야로서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 어찌하여 죽어야 하느냐는 전통적인 메시야관과의 갈드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산상변화의 신비적인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한 베드로의 생각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체험이 진리를 수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2)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부활
'인자가…이르지 말라'(9절). 예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에서의 다시 살아남'은 구약에서 있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소생과 (왕상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의 소생(왕하4:17-27)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소생은 어디까지나 '소생'에 불과한 것이며 결코 '부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생한 자들은 다시 죽었지만 '부활'한 자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죽음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며, 부활한 몸은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서의 변화이자(고전15:44) 3차원세계에서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4차원세계의 몸으로 승화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죽음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고전15:12-19)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 생명의 첫열매이며(고전15:20), 복음의 본질적 진리입니다.
2. 두번째 질문-먼저 와야 할 엘리야는 왜 오지 않는가?
1) 먼저 와야 할 엘리야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1절) 제자들의 이 두번째 의문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의한 것으로 이는 말3:1과 4:5,6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시고 (12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13절)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엘리야가 왔다고 하신 것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1:17;마17:11,12) 구속사역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언약(예언)대로 진행되어가고 있었으나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었습니다.
2) 숨겨진 또 하나의 질문
엘리야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속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질문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시는 당신이 진실로 메시야입니까?', '그렇다면 엘리야가 당신보다 먼저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앞의 질문은 생략하고 뒤의 질문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하여 그것을 직설적으로 여쭈어 보기가 제자의 입장으로서는 어려웠던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 기저에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메시야를 그들은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숨겨진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셨습니다.'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12절) 메시야는 '고난의 종'으로(사53:1-12) 와서 대속의 재물로 죽임을 당해야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3. 부활 후에 알게 되는 진리
'저희가 산에서…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 어째서 예수께서는 변화산상에서의 사건을 부활할 때까지 숨겨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진리에 대한 인간의 우매성은 비록 놀라운 신비의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체험이 진리에 이르도록 할 수는 없음을 (요2:22)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진리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진리의 성령'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 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였습니다.
산아래 사람들 막9:14-20
산 아래의 세계는 거룩했던 산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 대신 귀신이 세력을 잡고 있었으며, 영광의 찬양대신 무능자라는 비난이, 예언자의 위로 대신 대적자들의 음모가 주님과 세명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영혼에는 미움과 혼란과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잃어버린 죄악 세상의 모습을 변화산 아래의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1. 산 아래 사람들의 실상
산 아래 사람들은 소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어둠의 세력인 사악한 사탄의 영향력 안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1) 귀신에게 사로잡힌 소년
소년의 아버지가 고백하듯, 소년은 단순히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영혼과 육체를 잠식당하여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년을 주님께로 데려왔을 때 갑자기 발작이 심화되는 것이 뚜렷한 증거입니다. 마귀는 귀신들린 자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마귀는 소년에게 들어온 날부터 소년의 인격과 꿈과 몸을 철저히 파괴하였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가 없는 세계가 얼마나 두렵고 황폐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청소년들을 폭력과 정욕과, 방탕과 허무의 노예로 만들어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청소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각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2) 절망에 사로잡힌 아버지
소년의 아버지는 삶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악귀들린 자녀로 인해 가정의 행복은 사라졌으며, 의술에 의존도 해 보았으나 허사였으며,시간과 물질의 심한 소모를 초래했을 뿐이며 실날같은 희망으로 종교를 찾았으나 주님은 안보이고 제자들은 무기력하고, 신학자들은 변론과 언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정과 자녀는 허무함을, 사회는 실망과 권태를, 종교는 회의를 안겨 주었습니다. 산 아래 어두움의 권세 안에서 인생은 절망의 포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편견에 사로잡힌 서기관들
서기관들은 제자들의 무능함을 기화로 해서 자신들의 편협한 지식으로 주님의 신성과 능력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눈에는 악한 귀신도, 고통당하는 생명도, 절망에 몸부림치는 이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편견 중에 종교적 편견만큼 무섭고 폐단이 큰 것도 없습니다. (행8:1-3;26:10,11;딤전1:13) 진리되신 예수님을 미워하며 교만함으로 이웃을 외면하는 종교적 편견은 아무리 심오하고 논리가 정연하다 해도 사탄의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요8:38-44)
2. 산 아래 사람들의 불평
주님께서 '믿음 없는 세대들이여'(19절)라고 한탄하듯이 주님의 부재는 산 아래 사람들의 삶 속에 평화와 생명을 잃게 했습니다.
1) 무능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8절). 제자들은 전같이 귀신을 추방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군중들에게는 비웃음을, 대적자들에게는 공격할 기회를, 아이의 부친에게는 절망감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주님께는 영광 대신 비난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17절) 제자들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더라도 대적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로마의 백부장처럼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기도와 간구를 했다면 그들은 어린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을 것입니다. (마8:7-10)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5:7)라고 바울 사도가 고백했듯, 성도의 삶의 능력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히10:37,38)
2) 무관심과 무자비
'큰 무리가 둘렸고'(14절). 군중들은 귀신을 대적하는 제자들을 기도로 돕거나 서기관을 맞아 제자들을 위해 변호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관망만 함으로 제자들에게 큰 곤혹감과 당혹감을 주었습니다. 또 아이의 부친은 제자들에게 실망한 것을 곧 바로 예수님께 고해바치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인생이 주님께 관심이 없으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무자비하게 됩니다. 이것이 산 아래 인본주의 세계의 실상입니다.
3. 산 아래 사람들의 희망
'이에 제자들이 와서 보니'(14절). 주님께서 산 위에만 계시지 않고 산 아래 인생들에게 내려오셨다는 사실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군중들의 혼란과 갈등이 그치고 제자들의 고독도 끝나고, 서기관들의 악함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저들의 모든 문제는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불행의 원인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고 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문제를 성육신하사 우리 곁에 계신 주 예수님께로 가져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가 이웃의 무거운 짐을 져 주려고 할 때(갈6:2) 산 아래 인생들에게도 희망의 태양은 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믿음 막9:21-24
주님의 능력은 항상 무한합니다.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도 주님의 그 무한 절대하신 능력을 완벽하게 힘입을 수 있다고 주님은 본문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한 능력을 힘입게 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주님의 능력을 완벽하게 힘입게 하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구체적으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아버지의 불신앙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 짧은 몇마디는 아이의 아버지의 불신앙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1) 겸손을 가장한 불신앙
아이의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겸손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주님을 매우 위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는 매우 겸손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겸손 속에는 불신앙이 숨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에게 한번 실망한 예수님에게서도 실망을 맛볼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믿음으로 겸손을 가장했을 뿐 실제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은 없었습니다.
2) 주님의 존전에서의 불신앙
둘째로 그의 불신앙은 주님 앞에서의 불신앙입니다. 그는 지금 제자들의 '스승'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인류의 구속주이신 '주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제자들과 똑같은 '사람'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주님의 꾸짖음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명백히 상기시켜 줍니다.
2.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믿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인간사의 모든 가능과 불가능이 믿음의 분량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의 전능성
이 말씀은 간접적으로나마 주님의 신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그의 전능하신 능력, 창조주 되심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의 능력이 단지 바알세불이나 귀신의 왕을 힘입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임을 보여줍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심
이 말씀은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신 성품을 보여줍니다. 즉 악이 없으시고 인류에게 선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그를 의지하여 나오는 자들을 단 한사람이라도 거절치 않으시고 도와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도와 줄 준비를 다 마치시고 우리가 나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3. 믿음의 고백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단호하고도 책망에 가까운 주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촉발시켰습니다.
1) 믿음의 고백
'내가 믿나이다'. 믿음을 고배괘야 할 결정적인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는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고백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고백할수록 성장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는 아이의 고통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믿음을 심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며(롬8:28),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희생이 요구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불신의 고백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을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실제로 그의 불신을 고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연약함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고백은 바로 이러한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신앙적인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믿음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성령이 아니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믿음이 요구하는 인내
본문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교훈은 믿음에는 반드시 인내가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맨 처음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곧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주님께서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리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로해 주시고 곧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얻은 것은 책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렸습니다.그 결과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인내는 모든 기도를 응답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사의 능력 막9:25-27
주님께서는 연약한 믿음이었지만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아이를 벙어리되게 하고 귀먹게 한 귀신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발작을 일으키고 나감으로써 가사 상태에 빠진 아이를 손으로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며, 또 하나는 믿음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1. 축사하시는 예수님
1) 명령과 꾸짖음
'그 더러운…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주님께서는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어가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부모의 마음을 애태우게 한 그 사악한 귀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명령과 꾸지람으로 일관하시는 일련의 축사과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귀신과 비교되는 주님의 위치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귀신을 책망하실 수 있고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코 귀신과 대등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창조물과 피조물의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성경 어디에도 주님의 책망이나 명령에 대항하거나 불순종한 귀신은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천사나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히1:6-13)
2) 완전한 치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주님께서는 눈멀고 귀머거리 된 아이를 완전히 치유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있을 사탄의 영향력 까지도 주님께서는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제거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성령으로 보증해 주셨습니다. (고후1:22)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사납게 위협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완전히 패역한 사탄의 무리를 주님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3) 가사상태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귀신은 더 이상 아이 안에 있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주님께 대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발악을 하며 나갔습니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결과 아이는 최후이자 최고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곧바로 가사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병신으로나마 오래 살 수 있는 아이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수근거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오해와 비난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받게 됩니다. 그만큼 사탄은 한 영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빼앗기려 하지 않습니다. 포기하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최후 발악이나 이웃의 오해와 비난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4) 잡아 일으켜 세움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주님께서는 아이가 가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보시고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사탄의 극렬한 공격을 받아 침체와 절망의 상태에 빠져 있는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손으로 붙잡아 그들을 일으키십니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상태로 그들을 회복시켜 놓으십니다. 예수니므이 목적은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이 사탄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믿음의 또 다른 힘
우리는 본문을 살펴보면서 믿음의 또 다른 힘을 발견합니다. 즉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웃까지도 구원하는 힘을 발견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지극히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만큼 의심이 가득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아이를 살렸습니다. 실로 겨자씨 같은 믿음이었지만 그 믿음으로 '태산'을 움직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자를' 구원하고(약5:15), 하나의 도시를 멸망에서 구원할 힘도 있습니다. (창18:22-33) 따라서 우리는 이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활용이 직접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그들에게도 주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축사하시는 과정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주님을 신뢰케 합니다. 평안한 마음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막9:28,29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 하다가 고치지 못하자 많은 무리들이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그러한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탄식하시면서 그 아이에게 들렸던 귀신을 단순히 내쫓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어찌하여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귀신이 나가지 않았는데 선생님께서 하시니 단숨에 귀신이 쫓겨나갑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짧은 답변으로 그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응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합당한 정확한 기도를 드려야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기도는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불순종 때문에 응답받지 못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아모리 족속 앞에서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올라가지도 말라 싸우지도 말라'(신1:42)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하여 산지로 쳐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아모리 족속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나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패망하였고 그들은 여호와께 통곡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너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신1:45) 여호와께서는 이처럼 불순종하는 자들을 경멸하시고 그들에게 진노의 화살을 돌리십니다. (신11:28;삼상12:15)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한 아담의 뒤를 좇는 '불순종의 아들'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순종의 아들'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1:18)고 하였습니다.
2. 은밀한 죄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하나님은 정직한 입술을 좋아하십니다. 마음속으로 가증한 죄악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하나님을 격노케 할 뿐 결코 어떠한 간구도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나'(신59:2). 따라서 우리가 만일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을 주님 앞에 털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3. 교만하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가 열납되지 아니한 것은 그들의 교만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입니다. (눅18:11-14) 우리들도 열심과 봉사가 남다르다 하여 자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하면 할수록 더욱 겸손히 주께 순종하며 자만하지 않는 모습을 간직해야만 합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를 아시고 채워 주실 것입니다.
4. 정욕으로 구하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약4: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요할 양식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준비하시며 구하면 주십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 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과 함께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아닌 것, 즉 사치스러운 것,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구하는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정확하고 바르게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구하는 것도 정확하고 바르게 구해야 합니다.
5. 의심하면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게 얻기를 생각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5-8) 믿음은 기도의 여러 필수요건 중의 요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믿음이란 억지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는 그러한 믿음입니다.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억지로 믿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천진난만합니다. 거기에는 의심이란 조금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상태가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러할 때 주님께서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1:22;막11:23)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막 9:30-32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의미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신비스런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너무 난해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십자가의 죽음
1) 죄의 대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 안에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롬5:12)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인류의 멸망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율법이요, 제사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으로 하여금 양이나 염소나 황소에게 안수하게 하심으로써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 제도는 구원에 있어 완벽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죄인 자신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히10:1) 인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제물은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죄가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무흠한 것이어야 했듯이 죄가 없는 인간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의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인류에게 퍼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3:13) 그럼으로써 우리의 죄가 속해진 것입니다.
2) 죄권세의 분쇄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를 가져왔습니다. (롬5:14) 죄로 하여금 모든 인간을 다스리게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고 발버둥쳐도 선하게 살 수 없었으며,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롬5:17)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분쇄하였습니다. (롬5:17하) 그릿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와 생명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죄의 유혹에 빠진다 하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3) 은총과 회복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였던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켰습니다 (롬5:10)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은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은총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전과 같지 않습니다. 전에는 단순히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교제였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교제입니다. (롬8:14,17)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은 관계의 교제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2. 부활
1) 완전한 죄사함
주님은 자신이 제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제사장이셨습니다.(히9:11)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셨으며, 그의 죽음은 곧 그러한 자격으로 성소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히6:20) 따라서 일년에 한 차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살아서 성소에서 나아와야 모든 죄가 사해짐을 의미했듯이 그는 무덤에서 살아서 나아와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면 그의 인류를 위한 속죄는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구원의 보장
두번째로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구원의 보장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속죄를 위해 죽으셨던 주님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계속 활동하십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사랑의 띠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에 동참한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경 여러곳에서 주님의 부활을 강조했으며, 로마서에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5:10)
3) 영생
세번째로 주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11:25,26) 우리도 주님과 같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이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누가 크냐? 막 9:33-35
누가 큰가 서로 토론하던 제자들과 참된 의미에서의 '큰 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되어질 때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인간적 욕망에 이끌려 예수게서 왕 위에 오르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논쟁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련하기 짝이 없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예수께서는 인간이 참으로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잇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질문
1)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노중에서 쟁론한 주제를 이미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러한 분이신 예수께서 함께 동행한 제자들이 논쟁을 벌인 주제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도착하시기 전까지의 노중에서 책망치 않으시고 집에 돌아와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좌정하신 후 조용히 입을 여셨습니다. 애써서 가르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비방하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것을 볼 때 충분히 격노하고 남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질문 하나로 엄청난 책망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준엄한 꾸지람이 아니라 다정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것을 시사해 줍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벌컥 내며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인내하지 못하고 가르침까지도 포기하는 우리들은 이와같은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의 과실에 대한 고백을 직접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누가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배고픔이나 학문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으며, 우리의 행위도 누가 대신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뿌린 씨앗은 그대로 자신이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앞에 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과오는 자신이 인정해야 하며 자신의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새로운 가르침을 받거나 용서함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3) 제자들은 잠잠하였습니다. (34절)
제자들은 온화하고 조용한 예수님의 질문에 천근의 중압감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의 논쟁이 심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허물을 숨기고 그냥 넘어가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을 더욱 분노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허물을 일깨워 좋은 성품을 갖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2. 제자들의 쟁론(34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눈, 즉 유대 땅을 통치할 군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께서 왕위에 오를 날만을 기다렸고 그런 연후에는 국정에 참여하여 더욱 좋은 보직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그 자리에 앉느냐'는 논쟁이 뒤따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제넘게도 갑론 을박 일등공신을 가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권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하늘의 왕국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행한 무지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무지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 권력, 명예에 얽매여 그리스도의 귀한 상급을 젖혀두고 혼탁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도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좌표점을 찍고 나는 어느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3.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35절)
첫째를 원하는 사람은 첫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자격을 제한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시고 최고의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추앙받는 자가 되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사람에게 두가지 가르침을 통해 기준을 설정해 주셨습니다. 첫째,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35절)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상충되지 않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위대함을 부여하거나 억지로 위대함을 획득해서는 참된 우두머리가 될 수 없으며, 뭇사람의 끝에서 묵묵히 봉사할 때 모든 사람이 인정을 해주어 우두머리로 세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5절) 사랑을 하는 자만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시 남을 철저히 섬길 수 있는 자만이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섬기기를 게을리 마시길 바랍니다. 모든 자들이 그대를 섬겨줄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높이신 주님 막 9:36,37
주님께서는 노중에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하였던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높이 세우셨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 중의 하나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알아보겠습니다.
1.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
본문에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제자들 가운데 높이 세우시고 꼭 껴안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그처럼 사랑하신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어린아이들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에게는 예수님과 비슷한 공통점이 매우 많습니다. 첫째 어린아이들은 온유합니다. 어린 아이는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리고 또한 순수합니다. 속을 줄을 알아도 속일 줄은 모르며, 해악을 당할 줄은 알아도 해악을 끼칠 줄은 모릅니다. 치부를 숨길 줄도 모르며 꾸밀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겸손합니다. 어른들처럼 자기를 과신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합니다. 어른을 공경할 줄 알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신과 같은 성품으로 인하여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2.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입니다 .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요구하고 세상이 인정해 주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유능한 사람만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은 유능한 사람도 좋지만 그보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며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만이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그런 사람만이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면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온유하며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하셨습니다.
3. 지극히 작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아이들을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교정받고 교훈받아야 할, 다시 말해서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출12:37;막6:44)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금했던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해 줍니다. (막10:13) 따라서 어린아이들을 보살핀다는 것은 결코 큰 일이 못됩니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 드러날 일이 아니며,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비단 어린 아이 뿐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사람,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쉽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68:5;마25:40-45) 이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지극히 작은 일에 우리가 충성을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큰 직임을 맡기실 것입니다.
4. 약한 자들을 돕는 자들을 높이십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이 제자들이 누가 서로 크냐고 분쟁하는데 대한 답으로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대답속에는 이처럼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는 자들을 주님께서 높이시겠다는 약속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약속은 결코 내세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도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행은 알리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꽃이 스스로 향기를 내드시 그러한 선행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선한 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세속적인 부귀나 영달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정신적인 만족감과 선행을 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을 소유합니다.
금하지 말라 막 9:38-40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직접 따르지 않았는지, 혹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신실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자 제자들 눈에는 그러한 내적인 면보다는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외적인 면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자들일지라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이들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 금하지 말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복음의 문을 걸어 잠그지 말라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은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별하여 하락하지 말고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참예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별된 몇몇 사람이나 선택된 특정한 민족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증거하기를 '보라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3:16)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물론이요 방해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2. 시기하지 말라
본문과 같은 사건은 민수기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칠십 장로들이 회막에 모였을 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치 않은 '엘닷'과 '메닷'이 성령을 힘입어 예언을 하였습니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이것을 고하였고 옆에 있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것을 '금하소서'라고 간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모세는 여호수아를 책망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를 원하노나'(민11:29) 모세의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백성들에게 유익한 일을 왜 금지하는가라는 강한 반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든지 불이익이 돌아오든지 혹은 자리에 위협을 받든지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빌1:17)자들에게 대하여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고 하였습니다.
3. 지나친 열정을 품지 말라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열정을 품는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매우 권장할 만합니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그렇듯이 그 열심도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열심이 지나치면 사람이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실수가 잦아지고 실수가 잦으면 좌절하게 되고 좌절을 곧 신앙의 침체로 이어집니다.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 특심하였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호렙산까지 도망하여 영적 침체로 빠져든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왕상19:9-14)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을 금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 요소 중의 하나도 바로 이 열심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친 열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잘못된 열정을 품지말고 자신의 성취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열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위한 열정, 그리고 말씀 위에 근거한 열정이 우리가 품어야 할 열정인 것입니다.
4. 사도직을 고수하라
본문을 말씀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는 제자들의 과거의 실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벙어리 귀신을 내쫓는 일에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18절)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었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권능을 부여받아 귀신을 쫓아낸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귀신을 능히 쫓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실해야 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하지 못하면 우리의 사명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마25:28) 우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릅니다.(눅19:40) 본문에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내쫓는 자들을 금하기에 앞서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29절) 어리석게도 그들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마7:1-5)
그리스도인의 의무 막 9:41,42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두가지 본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접대에 관한 것과 소자들의 영혼의 소중함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징벌에 대한 예까지 들어가면서 강한 어조로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접대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1) 접대는 성숙한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마25:34,35)하였다는 말씀은 성숙된 신앙인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정립된 사람은 이제는 세상과의 관계도 정립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종교적인 삶의 자세만큼 윤리적인 삶의 자세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리를 종교보다 앞세우지는 않지만 결코 경시하지도 않습니다. (딤전3:2)
2) 희생으로 접대해야 합니다.
접대의 방법은 자기 희생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접대에 대한 예를 들어 강조하고 있는데,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해 주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어 주며,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마25:35,36) 발을 씻겨주고(눅7:44),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창12:1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자기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봉사하는 남은 여력으로가 아니라 자기 희생으로 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3) 접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의 희생의 대가를 세상에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의 희생을 칭찬은 할지언정 보상하려 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상이 희생의 대가를 보상한다면 아마 세상에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희생의 대가를 하나님께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희생의 대가를 보상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2.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1)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영혼입니다.
세상에 온갖 귀하고 값진 것을 소유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한 생명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마16:26) 그러나 육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그것은 곧 영혼이 육신의 생명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 영혼의 소중함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되 영혼을 사랑해야 하며, 외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영혼에 뜨거운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2) 구원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구원의 첫단계라고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롬10:9)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번 얻은 구원을 영원히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인내를 가르쳐야 합니다. (마10:22) 이것은 먼저 구원받은 자가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이며 의무입니다.
3) 구원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아 처형시키는 일은 당시 수리아, 헬라, 로마 등지에서 사용된 처형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잔인한 사형방법에 대한 예를 들어가면서가지 실족케 하는 자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하나의 역설적인 방법으로서 그가 실족케 함으로써 지옥에 빠진 영혼이 받아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실족시킬 가능성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3. 소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이 그들을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교육시킬 것이며,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딤후4:15-17) 그리고 항상 그들의 연약함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죽음인가? 생명인가? 막 9:43-48
본문의 교훈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교훈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라도 '영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손', '발', '눈'등은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주로 사용되는 육체적 도구들이며 실제로 그것들에게 죄를 짓도록 명령하는 것은 인간의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현방식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현을 통하여 무엇을 교훈하고 계시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와 '영생', '둘'과 '지옥'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씀에서 '하나'와 '둘'은 각각 '부분'과 '전체'를 뜻하고 있으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오히려 육체의 '불구'나 '온전'이 영생을 얻는 데 있어서 아무런 장애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있으며, '찍어버리라'는 말씀은 지체를 찍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악한 생각을 단절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1. 육체인가? 생명인가?
1) 상대가치와 절대가치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43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손은 다음에 나오는 발(45절), 눈(47절)과 같은 뜻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육체'들은 인간의 생명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있어서 방해되는 것이라면 그 어떤 중요한 것이라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 가치일 뿐, 절대적 가치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절대적 가치인 생명을 위해서는 상대적 가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생명의 원리
생명의 원리는 성장하는 것이며 진보하는 것입니다. 낮은 차원으로부터 높은 차원으로, 상대적 가치로부터 절대적 가치로, 죄인으로부터 의인으로 승화되는 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이 생명의 원리를 저해하고 반역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인간을 높은 데서 낮은데로,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생명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원리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5,36)
2. 욕망의 충족인가? 자제인가?
1) 자기통제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5절). '범죄'는 대체적으로 죄의 유혹에 대한 자기 통제 능력이 결여되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 (요일2:16) 자기 제어능력이 없으면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모든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정욕을 억제하고 버림으로써 인생이 절름발이처럼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2) 욕망의 통제 능력
죄의 유혹과 욕망에 대한 통제 능력은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써는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지는 그렇게 항한 것이 못됩니다. 죄의 유혹과 욕망에 대한 통제능력은 제1단계로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갖게 됩니다. (고후6:17,18). 모든 불경건으로부터 자기를 격리시킬 능력과(딤후2:21;요이9,10), 자기 자신이 악한 성품을 제어하는 능력과(롬6:11-13;엡4:22-32),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져 가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고전 1:2;살전5:23)
3. 죽음인가? 생명인가?
본문에서는 범죄와 관련하여 '영생'과 '지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생'을 얻을 수도 있고 '지옥'에 던져질 수도 잇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잉태될 때부터 죄 가운데서 잉태되어 출생하고 죄 가운데서 사는 죄인으로서(시51:5) 이세상에서의 삶을 종결짓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죄에서부터 해방됨으로써(롬8:2)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새 피조물로 만들어져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죄의 유혹에 빠져서 죄의 노예가 되어 살면 영원한 불못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43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생을 얻고, 죄 아래 있으면 죽음에 이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입니다.
교회와 성결 막 9:49,50
본문의 말씀은 43절부터 48절까지의 교훈에 대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에 유의한다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43절에서 48절까지의 교훈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모든 인간은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며,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할 대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성도 또는 교회가 죄의 유혹과 정욕을 제어하고 세상의 소금으로 존재할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보존을 받게 된다는 것이 50절의 말씀입니다.
1. 성결치 못한 교회에 대한 형벌
1) 교회가 '불'이 되지 못할 때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49절) 불은 모든 것을 소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은 이미 있는 죄악을 소멸하는 불로서의 의미를 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죄악을 항상 성령의 불로서 소멸시켜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의 죄악까지도 소멸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악을 소멸시키려면 먼저 자신의 죄악부터 정결케 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에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로서 구더기가 들끓는 속에 소금을 치듯 엄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살후1:7-9)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그것이 책임과 의무로서 응답되지 않는 한 그것은 저주가 된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손에 지팡이가 들려 있을 때에는 권능의 지팡이지만 그것을 그 손에서 놓았을 때는 뱀이 되어 그를 해치려 한 것과 같습니다.(출4:2-4) 은혜는 책임과 의무입니다.
2) 교회가 '소금'이 되지 못할 때
'불'은 이미 부패한 것에 대한 소멸의 능력을 말한 것이지만 '소금'은 부패를 예방하는 능력을 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소극적인 면에서 이미 부패된 것을 소멸해 없애버리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반면에 부패를 미리 방지할 수 잇는 적극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5:13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교회가 이 소금의 능력을 상실하면 구더기 가운데 소금을 치듯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부패란 본질이 변질되는 것이며, 그것은 창조의 의도에 반역하는 것으로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 성결에 대한 교회의 임무
1) 거룩한 존재로서의 교회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50절). 교회가 거룩해야 할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며(엡4:15;5:23;5:29,30)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 성삼위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 지체이며, 자녀인 교회도 마땅히 거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소유이기(출19:5;시135:4)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요14:21;롬6:18;딛2:12). 피조물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접촉됨으로서입니다. '거룩'은 거룩한 것만을 가까이 합니다.
2) 거룩한 영향력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요20:21) 거룩한 하나님의 영향력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 했으며, '세상의 빛'이라 했으며(빌2:15), '그리스도의 편지'라 했으며 (고후3:3), '그리스도의 군사'라 하였습니다. (딤후2:3)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요13:34;15:12)고 하셨으며, '섬기는 자'(막10:43,44) 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으며, 주의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마28:20)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말씀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으로서 자기 소임을 다해야 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영향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3. 성결된 제물로서의 교회
1) 성결된 제물
구약시대의 성전에 드리는 제물(소제)은 소금을 쳤습니다. 이때의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했습니다. (레2:13) 즉 하나님의 언약(말씀)은 부패하지 않으며,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다는 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들입니다. (롬12:1) 그리고 주님은 교회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마5:13) 제물처럼 교회의 생명들은 소금으로 절여져야 합니다. 소금은 언약이고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절여진 생명, 말씀으로 만들어진 생명만이 성결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2) 성결과 화목
'너희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절) 소금은 썩지 않습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아니합니다. 썩지 않는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소금은 말씀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말씀과 성결이 있을 때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성결한 생명의 모임이며, 화목의 집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