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 廣評侍郞 儒 시 조 광 평 시 랑 유
신라시대(新羅時代)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중앙 귀족의 질시로 인해 암살 당한 후 그 후손들은 전라도 벽골군(碧骨郡, 현 金堤郡)으로 강제 이주되고 핍박과 감시 속에 출사의 길을 접었지만 비상할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중 흥덕에 살고 있던 휘(諱) 유(儒)는 은인자중 학문과 도량을 키우면서 가문의 부흥과 영광을 되찾으려는 굳은 의지와 희망을 품고 새 시대의 개막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 무렵,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고, 또한 지방 호족이 독립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등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가 전개되고 전라도 서남해안은 고려(高麗)의 왕건(王建)과 후백제(後百濟) 왕 견훤(甄萱)이 나주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그 전쟁의 피해는 이웃 흥덕까지 파급되었다.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자 시조(始祖)께서는 중국 오월(吳越) 나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 곳에서 공(公)은 끊임없는 노력과 열성으로 중국어를 배우고 정치 철학인 유교 이념을 깊이 습득하였다. 그 동안 고국(故國)은 왕건(王建)에 의해 삼한(三韓)이 통일되고 사회가 점차 안정되었으나 공(公)의 귀국은 광종(光宗) 때에야 성사되었다. 광종(光宗)은 막강해진 공신을 제거하고 왕권과 국가 체제를 공고히 다지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높은 학문과 식견을 소유한 공(公)을 등용하고 그의 역량과 활약에 큰 기대를 가졌다. 공(公)은 객성(客省)에서 외교 업무에 치적을 남겼다. 당시 송국(宋國)과 고려(高麗)는 빈번한 교류가 있었기에 중국 사정에 밝은 공(公)의 중용은 필연적이었다. “유(儒)의 고매한 인격과 능숙한 화어(華語)는 사신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조정은 매번 사신이 올 때마다 그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다” 고 하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었다. 건국 초기의 외교 정책에 혁혁한 공헌을 한 공(公)에게 그의 사후에 광평성(廣評省) 시랑(侍郞)을 증(贈)하였다
흥덕,흥성장씨(張氏)의 시조(始祖)인 유(儒)의 호(號)는 청계(淸溪)이며, 지금의 고창(高敞 흥덕(興德)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연대(年代)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헌 자료들을 검증(檢證)해 본 결과 그는 서기 917년을 전후(前後)해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공(公)이 출생한 때는 신라(新羅)는 점차 쇠약해졌고,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되어 상호(相互) 간의 세력 다툼이 극심했던 무렵이었다. 더구나 그가 살았던 전라도(全羅道) 흥덕(興德) 지방은 후백제(後百濟)와 태봉(泰封), 그리고 뒤를 이은 고려(高麗)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던 나주(羅州) 지역과 매우 가까워 항상 전운(戰雲)과 긴장이 감돌았던 지역이다. 공(公)이 조국(祖國)을 떠나 중국(中國)의 오월(吳越)에 피난 또는 유학(留學)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기간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사회불안은 계속되어 자신은 물론 가족(家族)의 신변(身邊)이 매우 불안(不安)하고 위태로운 상태라 좀더 안정된 사회에서 학문(學問)과 인격(人格)의 도야(陶冶)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둘째. 그 당시 연속된 흉작(凶作)으로 인해 사방에서 굶주린 백성들은 초적(草賊)이 되어 민가를 약탈하는 행패가 지속되었는데 이는 오월(吳越)에 유학(留學)을 떠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셋째. 선진문물(先進文物)에 대한 동경(憧憬)과 조국(祖國)에 대한 애국심(愛國心)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祖國)의 통일(統一)과 안정(安定)에 기여하려면 선진국 오월(吳越)에서 학문(學問)과 경세(經世)의 지혜(知慧)를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유유(儒)가 건너간 오월(吳越)은 농업경제(農業經濟)와 해상(海上) 무역(貿易)을 통해 번영된 왕국(王國)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 나라와 지형적으로도 가까워 교섭(交涉)과 왕래(往來)가 빈번한 지역으로 오월(吳越)로의 유학(留學)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편 그사이 조국에서는 왕건(王建)이 평화적 방법으로 신라(新羅)를 병합하고 뒤이어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하여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유학(留學) 중인 유(儒)에게도 전해졌으나 그는 귀국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것은 건국(建國)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기를 유(儒)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유유 (儒)가 예측했던 대로 왕건(王建)이 사망한 뒤 왕위계승(王位繼承)을 둘러싸고 혈육(血肉) 간에 치열한 다툼과 대신들 사이에 정권쟁탈전(政權爭奪戰)이 벌어져 훈신(勳臣)과 장군(將軍)들이 수도 없이 죽어갔다. 오월(吳越)에서 귀국한 유(儒)가 조정(朝廷)에 나아간 것은 광종(光宗) 즉위 직전으로 보여진다. 광종(光宗)은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왕권(王權)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거제도(科擧制度)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제정하여 호족(豪族)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중국(中國)의 정치사상인 유교이념(儒敎理念)과 통치철학(統治哲學)을 실천하려는 이상(理想)을 품고 있던 유(儒)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중원(中原)을 통일한 송(宋)과 고려(高麗)왕조는 튼튼한 우호적 관계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유(儒)처럼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은 중용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유(儒)의 고매한 인격(人格)과 능숙(能熟)한 화어(華語)는 중국(中國) 사신(使臣)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조정(朝廷)은 “매번(每番) 사신(使臣)이 올 때마다 그로 하여금 접대(接待)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은 이를 증명해 준다 건국 초기의 외교정책(外交政策)에 혁혁한 공적을 세운 유(儒)에게 조정(朝廷)은 그의 사후에 광평성(廣評省)시랑(侍郞)을 증(贈)하였는데, 이는 조정(朝廷)으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책임있는 관료(官僚)로서의 능력(能力)과 외교(外交) 분야에 그가 끼친 업적(業績)을 높이 평가하여 내린 은전(恩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儒)에 대한 기록은「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처음 나타나며, 흥성(興城) 장씨(張氏) 가문에서 시조(始祖)인 유(儒)를 시랑공으로 받들어 모신 것은 문헌상으로 선조(宣祖)때부터이다. 흥성장씨(興城張氏) 가문의 최초의 족보(族譜)는 조선(朝鮮), 명종(明宗) 병인(丙寅, 1566년)에 치은공(癡隱公) 현(俔)에 의해 만들어진 흥성장씨세계(興城張氏世系)인데 여기에는 시조(始祖) 유(儒)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병인초보(丙寅草譜)보다 50년 뒤인 광해군(光海君) 2년 문장가(文章家) 장경세(張經世)가 쓴‘승지공 건(承旨公 健)의 행장(行狀)’에는 광평시랑(廣評侍郞) 유(儒)를 흥성장씨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고, 유몽인(柳夢寅)이 쓴 승지공묘갈명(承旨公墓碣銘)에는 유(儒)에 대해 좀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려(高麗) 초. 역사(歷史)의 전환기(轉換期)에 내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외교 담당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가 발전과 국위 선양에 진력했던 시조(始祖) 유(儒)의 일생을 확인하면서, 현금(現今)의 후손(後孫)들은 공(公)의 생애(生涯)와 정신을 오늘에 되새겨 보고,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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