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가을날, 추사 김정희를 만나고자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추사관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유배의 섬, 제주에 가장 상징적인 인물인 추사 김정희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배의 세 가지 방식
죄 중에서도 사형 다음으로 가장 중한 형벌이 유배였다고 합니다. 유배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배의 세 가지 방식은 주군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입니다.
주군안치는 유배지 행정구역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되었을 때의 형벌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나은 유배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절도안치가 있는데요. 외딴 섬에 보내고 그 안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약전이 해당됩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었는데요. 흑산도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흑산도에 머물면서 어부들과 생활을 하며 고기를 낚는 법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책이 <자산어보>입니다.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어서 매우 반갑네요.
마지막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유배방식의 하나가 위리안치입니다.
제주도에 유배온 사람들은 위리안치였다고 하는데요. 위리안치는 거처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 가두는 형벌이었다고 합니다.
탱자나무의 가시도 막을 수 없었던 김정희
감옥에 쇠창살이 있다면 조선시대는 탱자나무의 가시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탱자나무의 가시가 제법 크고 날카로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탱자나의 가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이고 문인이며 예술가였습니다.
김정희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한 김한신의 증손자로, 왕실과 인연이 깊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문과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24세 무렵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현재 베이징)에 방문하면서 학문적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이때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교류하며 금석학과 고증학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김정희는 당시 조선 지식인 가운데 청나라의 최신 학문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금석학(金石學) 분야에서 뛰어났습니다. 금석학이란 옛 청동기나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해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학문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북한산의 비석을 조사해 그것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뿐 아니라, 글자의 기원과 역사, 학문적 의미까지 깊이 탐구했습니다.
1840년, 55세였던 김정희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제주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고, 유배 생활은 매우 고독하고 힘겨웠습니다.
경국대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해요. 중죄인은 삼천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그래서일까요?
한양에서 9월 2일 출발했는데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빙빙 돌려서 완도에 25일에 도착했다고 해요.
한양에서부터 배를 타기까지 무려 25일이 걸린 거죠.
그는 약 8년 3개월 동안 제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에는 건강이 악화되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배기간 아내와 사별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유배 생활 3년째인 1842년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추사는 제주에 있었기 때문에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어요.
특히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남긴 글이 유명합니다.
또한 아내가 죽은지도 모르고 아내의 병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주 유배 시절에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 <세한도>
1844년, 제주 유배 중이던 추사는 제자 이상적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렸습니다.
유배를 떠나자 많은 사람이 그를 멀리했지만, 이상적은 변함없이 스승을 존경하며 중국에서 구한 귀한 서적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림에 담긴 핵심은 공자의 말에서 비롯됩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변하지 않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세한도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추사가 경험한 인간관계와 고독, 그리고 변함없는 의리에 대한 감사가 담긴 작품이라고 합니다.
제자 이상적은 이 세한도를 받고 너무 기뻤다고 해요. 그래서 중국에 가져가 당대 유명한 문인들에게 보여줬다고 해요.
그러자 이 문인들이 시와 감상문을 남겼는데 이를 <청유십육가>라고 합니다. 작품에 대한 댓글, 리뷰 같은 개념일텐데.
이렇게 청나라 문인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났다는 것을 입증해고 있습니다.
<세한도>가 국민 품에 오기까지
일제시대 동경대 교수였던 일본인 후지쓰카가 「세한도」를 소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며 그의 학문을 연구한 사람인데요.
그는 세한도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 글과 작품을 있는대로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44년 한국의 서예가 손재형이 일본으로 찾아가 매일 후지쓰카를 설득하여
세한도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재형이 나중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빚을 지게 되고 이 빚을 해결하기 위해 세한도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고 해요.
그런데 돈을 갚지 못해 이 세한도는 돌고 돌아 손세기라는 기업인이 이를 수집하게 되었고 이후 아들 손창근이 2020년 국가에 기증하게 되면서
국민 모두의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추사체>를 제주에서 완성한 추사 김정희
추사는 젊은 시절 중국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 같은 대학자들에게 배웠고, 중국의 고대 비문과 탁본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특히 한나라 시대의 예서(隸書)와 북조 시대의 비문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추사의 글씨는 붓글씨인데도 마치 돌에 새긴 듯한 단단함과 힘이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글씨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서예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지식인을 유배보내고 탱자나무를 둘러 그를 가뒀지만 그의 학문적 경지는 결국 청나라까지 전해지며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과 학문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배는 역설적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네요.
겨울에 수선화는 핀다.
모든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삼천리 밖을 돌아 결국에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에 내려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면서요. 그 답을 찾고자 지난 몇 년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듯 지난 과거와 단절하며 살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스스로를 더욱 살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성숙하고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것이라 믿으면서요.
추운 겨울 다시 한번 추사관을 찾아보려 합니다. 봄이 아닌 겨울에 피는 수선화를 보려고요. 수선화처럼 살아야겠다는 약속도 하고요.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봄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겠다는 다짐으로.
첫댓글 유려한 문체로 쉽고 편안하게
술술 읽히는, 글맛나는 리뷰를 쓰셨네요.
바람도 , 탱자의 가시도 결코
막을수 없는 선경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멋지게 잘 보여주실것 같습니다.
수고했어요~^^
함께했던 그 날의 생생한 기억이 글로써 되살아나 재답사하는 기분입니다. 거기다 선경님의 부드러운 멘트끼지, 글로 읽는 고품격 여행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