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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4:12-22) 보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모습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보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보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모습’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아주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엘리제사장의 집안이 멸족을 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마치 줄줄이 사탕으로 꿰어서 연쇄적으로 망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제사장의 집안에 멸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여러분! 아들들이 죽지요. 법궤를 빼앗기지요. 그리고 엘리제사장이 죽고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고 그리고 달랑 '이가봇'이라고 하는 갓난쟁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엘리제사장의 이러한 멸망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보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보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기 싫어하는 이 하나님의 모습을 정말로 보지 못할 때, 정말로 안 볼 때 이런 연쇄적인 멸망의 길로 접어들듯이 우리의 삶에 큰 난관과 환난과 어려움들이 닥치게 됩니다.
보기 싫어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작년 가을에 여러분이 다 아시는 탤런트 이영하씨 선우은숙씨 부부가 이혼을 했습니다. 결혼 26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혼의 이유가 TV뉴스에 나온 대로라면 이영하씨 인터뷰 내용인데 앞으로 여생을 서로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이혼을 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면에서 서로가 구속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서로가 어떤 제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이유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이혼한다는 이혼의 사유를 밝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자유가 뭡니까? 두 사람이 살아갑니다. 어디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자유에 반대되는 어떤 구속과 억압과 어떤 그런 매임을 느끼는 겁니까?
상대방이 생각하는 존재고, 상대방이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고, 상대방이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다고 하는 예를 들어서, 밥 한 끼를 먹어도 나는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데 부인은 된장찌개를 먹고 싶습니다. 그래서 김치찌개를 끓여달라고 하는데 젊었을 26년 동안 잘 해왔는데 그만 이제는 귀찮은 것이에요. “나가서 사먹자. / 아니 나는 집에서 먹고 싶은데. / 아휴, 좀 나가서 사먹읍시다. / 집에서 밥하는 게 뭐가 힘들어? 당신이 하는 게 뭐 있어?”라고 의견이 충돌하는 거예요. 서로 바라는 바가 충돌하는 겁니다. 이 '자유'라는 게 궁극적으로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걸 마음대로 펼치고 싶은 것이 자유에요. 내가 바라는 것이 마음대로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자유 아니겠습니까? 이사 가고 싶을 때 이사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여행가고 싶으면 여행 가고, 이런 것인데 두 사람이 함께 사는데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른 겁니다. 거기서 엇갈리는 겁니다. 젊은 남녀가 사귑니다. 사귀는데 남자를 봅니다. 아주 외모가 훌륭합니다. 집안이 좋습니다. 학벌이 아주 훌륭합니다. 다 좋습니다. 어디서 부딪힙니까? 생각에서 부딪힙니다. 생각이 달라요. 여기서 부딪히고 여기서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의견이 다르고 바라는 바가 다릅니다.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고 불화가 생기는 것이에요.
하나님도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능력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다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를 원치 않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 내 인생의 삶의 하루하루에 대해서 먼저 소원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도 보기를 원치 않는데 이게 신앙의 문제라는 겁니다. 내 삶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갖고 계시고 먼저 소원을 갖고 계시고 먼저 의견을 갖고 계시고 계획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을 보지 않고 전부 의견과 생각과 소원은 내가 먼저 가져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을 능력의 하나님으로 찾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찾고, 은총의 하나님으로 찾습니다. 이제 남는 것은 엘리제사장 가문에 임했던 심판이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필이면 법궤 안에 말씀이 들어 있을까요? 말씀의 돌판이 들어 있었을까요? 왜 하필 그게 들어 있었을까요? 왕권을 상징하는 왕의 홀이라든지 아니면 옥쇄라든지 아니면 인장반지라든지 아니면 금관이라든지, 하나님을 나타내는 능력을 상징하는 어떤 오른 손이라든지 이런 것이 들어 있지 않고. 그러기를 바랐던 게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올 때의 마음은, 능력의 오른 팔이신 하나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본 거예요. 그런데 오늘 그 비느하스의 아내, 엘리제사장의 며느리였던 그가 아기를 낳으면서 '이가봇'이라고 이름을 지으면서 한 말이 뭡니까? "영광이 떠나갔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나갔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뭡니까?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빛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요? 봤어요. 안보이긴 왜 안 보여요. 어떤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생각은 내가 먼저 합니다. 이 전쟁을 우리가 일으키고 우리가 승리로 이끌자는 생각은 내가 먼저 해버립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30,000명이 도륙을 당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 선민들이 망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어떤 하나님을 놓칠 때 영광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안 보이게 됩니까? 능력의 하나님 백날 찾아도 하나님 못 봐요. 절대 못 봅니다.
자비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 아무리 외치고 부르고 찾아도 절대 못 봅니다. 그렇게 난리치면서 성령 받겠다고 펄펄 뛰고 두 손 들고 주여! 삼창하고 그래도 성령이 임하지 않아요. 흥분이 임하는 것이지요. 왜 성령이 임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의 영이세요. 왜 임하지 않아요? 성령이 임하는 것은 그렇게 난리를 치고, 좋으신 하나님 노래를 백번을 연거푸 부른다고 해서 내리는 게 아니에요. 생각과 의견과 소원은 우리가 먼저 다 갖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먼저 생각하시는 하나님, 먼저 의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구체적인 하루하루의 삶에 대해서 소원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을 못 보게 되고, 못 볼 때 나타나는 게 멸망뿐이라는 것이에요.
자, 엘리제사장의 가문이 망합니다. 우리 다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언제 이 가문을 멸망시키려고 결정하셨는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서 좋은 것들을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먼저 취해 버렸어요. 엘리의 문제가 먼저 생각하시는 하나님, 먼저 의견이 있으신 하나님, 법궤에 말씀이 들어있다는 의미가 무엇이었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가 뭐였다는 것을,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거나 배우지 않은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법궤 안에 말씀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이 '말씀'이라는 게 '생각'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에는 너희가 우상을 섬기면 안 돼. 내 생각에는 너희가 도둑질하면 안 돼. 내 생각에는 너희가 거짓말하면 안 돼." 라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먼저 바라시는 게 있으신 하나님이세요. 이 하나님을 못 봅니다. 그리고 제물을 먼저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탈취해 버리고 말았어요.
저는 이런 맥락에서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님의 자리를 세습하는 문제 때문에 말이 많지 않습니까? 그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어요. 왜 답답하냐? 목회를 성공적으로 잘 하신 목사님들께서 아들 목사에게 물려줄 것은 예배당이나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은 물려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뭘 물려주느냐? 그 아들을 향해서 먼저 소원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을 보게 하면 됩니다. "너를 위해서, 너를 향해서, 너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다. 하나님의 소원이 먼저 있다. 그 하나님만 봐라." 라고 하면 시궁창으로 내려 보내도 하나님의 뜻이 그런 대형교회를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의 대형교회를 만들어 냅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 주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어느 대형교회에서 아들에게 세습되었다는 그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어요. 그냥 획일화된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요지는, 우리가 대형교회라는 조직을 아들에게 물려 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 아들이 그렇게 담당할만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그릇이 준비된 자라면, 정말 시골교회 부목사로 목회를 시작해도 대형교회를 맡게 됩니다. 대형교회를 일으키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면 우리가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식에게 돈을 물려줄 필요 하나도 없어요. 그 자식이 큰 재벌의 어떤 그런 정도의 물질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바가 있으시다면, 정말 서울역에서 지게꾼을 시켜도 하나님이 그 자식에게 그런 돈을 주십니다. 주시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을 보게 하면 되는 겁니다. 먼저 소원하고 계시는 하나님, 먼저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럼 우리는 뭐하냐? 우리는 소원하는 것 아니에요. 우리는 계획하는 것 아니에요. 우리는 뭐하냐? 지금 이 형편에 대해서 감사하는 게 우리의 본분입니다. 지금 나의 환경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먼저 계획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법궤 안에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하면 내 삶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시고, 내 아이에 대해서 내 사업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이 생각하신다는 이 점이 얼마나,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지 몰라요. 나를 가볍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제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말씀을 드리면, 너무 사소한 것이지만 주일날 선교회 예배를 인도하러 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전에는 먼저 생각하시고 먼저 소원하시는 하나님을 못 보고 있을 때는, 그래서 교회 부흥을 바라보고 있고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처럼 엉뚱한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예를 들어 삼성교회였다면 그 시절에 교인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갖는 거예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바라신다. 오늘 예배현장이 이렇게 있으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림이 있는 겁니다. 예배의 그림이 있는 거예요. 예배에 성령이 임하게 해 주시옵시고 불이 임하게 해 주시옵시고 구름떼 같이 모이게 해 주시옵시고 이렇게 바라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바람이 있다는 겁니다.
내 자식을 바라봅니다. "아, 얘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러다가 깜짝 놀랍니다. 먼저 하나님이 바라고 있다는 거예요. 그 아이에 대해서 미래가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 것을 마음으로 볼 게 아니라, 그 아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뭔가를 바라고 계시면서 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을 먼저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궤 안에 말씀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하시는 하나님, 의견이 있으신 하나님, 먼저 소원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법궤의 상징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먼저 의견을 갖고 먼저 생각을 하고 먼저 소원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십자가가 온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영하, 선우은숙 부부가 자유를 위해서 이혼한다면 그 자유가 뭡니까? 자유의 핵심이 주체성이에요. 주체성.
주체성이 뭡니까? 내가 스스로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결정한다. 내가 스스로 바란다. 이게 주체성이거든요.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안 보이는 수풀 뒤에 숨어버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내가 주체적인 인간이 된 다음에, 내가 스스로 먼저 바라고 먼저 소원하고 먼저 생각하고 하는 존재가 된 뒤에, 하나님과 단절 된 뒤에 수풀에 숨어버립니다. 보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책을 펴냅니다. 책을 출판하려고 합니다.
그럼 뭐예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있는 거예요. 처음 찍어낸 2,000권밖에 안 팔리면 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먼저 생각하시고 먼저 바라시는 하나님을 원치를 않는 겁니다. 보기를 원치 않는 거예요. 자식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능력의 하나님을 찾지요? 그건 멸망 길로 가는 겁니다. 엘리제사장입니다. 이 가문이 그랬다는 겁니다. 생각하시는 하나님, 의견이 있으신 하나님, 소원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망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제사장 집안이 망해요. 깡그리 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이게 죽는 거예요. 생각하는 나가 죽는 것이고, 소원하는 나가 죽는 것이고, 의견을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고 관철시키려고 하는 나가 죽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고, 의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고, 소원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일 때, 참 자유가 주어집니다. 참 자유가 주어져요. 행복해 집니다.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바라지 않습니다. 먼저 소원하시고 먼저 계획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때 진정한 평강과 진정한 행복이 이 순간에 온다는 겁니다. 작은 일에도 소원을 갖고 생각을 하려고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세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거예요. 우리가 소원하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바라도 되는 것은, 딱 한 가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 죽음이 오늘날에 나의 죽음이 되게 하는 것뿐입니다. "자식에 대해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사업에 대해 내가 죽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유일한 기도이고, 그래서 내 마음이 모든 것에 대해 죽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좋아하게 해 주세요. 사랑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바로 지금 먼저 생각하고 계시는 하나님, 살아 계시는 하나님, 내 옆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 먼저 알고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 지금 이 환경을 주신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 뭡니까? 마음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소원을 듣는 거예요. 하나님의 바람을 깨닫는 거예요. 계속 기도합니다. 하나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이 순간에는 또 이 순간에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감사하는 거예요. 항상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항상 하나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내가 자꾸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대해 마음이 살아나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그러면서 내 소원을 죽임으로 나타나는 게, 지금을 만족하고 지금을 감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닙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보이는 영광의 빛이 우리의 집안에, 우리의 선교회에, 우리의 교회에 끊임없이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보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이 먼저 생각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소원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바라신다.’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서 내 소원 내 생각 내 바람은 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임을 깊이깊이 깨닫고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보기를 원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굉장히 생각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내 삶에 대해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내 소원과는 다른 소원을 먼저 갖고 계신 하나님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러한 마음 못 박혀 죽은 것임을 우리가 잊지 않고 깨닫게 해 주시며 그리하여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계획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깊이깊이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