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들이 가져가는 잉여가치는 상품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며 판매의 시점에서 그 잉여가치(이윤)는 실현된다. 마트매장은 자본가들이 착취한 잉여가 실현되는 곳이다. 영화 ⌜카트⌟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업자본가들이 잉여의 몫을 더 할애받기 위한 저열하고도 잔인한 공격을 보여준다. 영화는 2007년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이었던 뉴코아-이랜드 투쟁을 실제 배경으로 한다. 계약직을 정리한 후에 정규직의 연봉계약직 도입이라는 탄력적인 인력운용의 수순을 읽었기에 공동투쟁의 장이 가능했다.
영화에서는 2003-2008년 임기내 처리하였던 비정규직 개악 입법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결국 그 법이 시행되는 2007년 7월 1일 이전 시점에 중계동, 방학동, 상암동, 강남에서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뉴코아-이랜드 투쟁은 ‘비정규직 보호법’을 내세운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권과 자본가들의 제휴공격에 대한 생존권 투쟁이었다.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측으로 간다.’는 ‘좌파 신자유주의자’의 정부는 나이든 청소원, 순례(김영애 분)님의 대사대로 “뜨신 데서 발 뻗고 자는...” 자본가들의 위원회들이었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가 정리해고를 입법하고 과잉생산 공황으로 파괴되어야 할 금융자본과 산업자본가들에게 IMF의 비싼 고리대로 구제를 해 준 사실과 동일한 결정이었다. 국가란 언제나 갈등의 중재자인 듯, 질서 유지자인 듯 행세하지만 본질은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위원회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은 개점 구호로 시작한다. “고객은 왕이다!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어서오세요. 행복한 하루되세요...고객님." 물류창고 통로에서 반성문을 쓰는 노동자도 있고 탈의실까지 ‘침입한’ 진상고객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하는 노동자까지.. 그들의 잉여의 실현을 위해, 그리고 노동자들은 생활수단을 얻기 위한 절박함에서 사람으로서의 품격은 매장에서 없다. 보일러실 옆에 판자때기로 가려놓은 판매원 탈의실이나 계단참 아래 칸막이를 대놓은 좁은 청소원 대기실만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다.
2007년 그 때, 그 투쟁에 많은 연대단위들이 결합을 했다. 중계동, 방학동 홈에버 투쟁시에 빠지지 않고 볼 수 있었던 한‘정당인’은 작년에 자본가 야당(2007년 당시, 개악입법을 주도한 여당)의 대변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았다. 운동이 이런 식으로 흐르니 카트에 실린 상품의 무게에 비례하여 노동자들의 처지는 변화하지 못한다. 자본론 1권, 10장에 나오는 ‘쟈거노트의 수레바퀴’에 밟혀 죽던 1830년대 영국의 13세 아동노동자들의 처지는 자본주의 국가 곳곳에서 여전히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게 “생산력의 발전”이다. 판매 노동자가 상품 하나하나의 바코드를 체크하는 현재를 넘어 카트 안에 실린 상품 전부를 일시에 계산하여 영수증까지 뽑아내는 캐시 머신의 매장 배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산과정에서 배제되는 노동자들은 유통과정에서도 배제된다. 소비자들의 욕구는 충족되지도 않았는데 대중들은 궁핍하며 소비는 제한된다.
물대포를 맞아가며 전경대오로 비장하게 카트를 밀어붙치는 장면이 엔딩 컷이다.
‘바쁘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저 물대포 뒤에 숨어 있는 이 ‘비장함’의 원인, 착취와 억압과 배제라는 “결과의 원인”을 찾는 영화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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