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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Nairobi ĝis Bunda tra Mwanza
pro la neatendita afero en flughaveno de Nairobi, bedaŭrinde nia karavano alvenis kongresejo post unu tago.
Mwanza 빅토리아 호수
체크인하고 여권 검사하고 들어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우리는 비행기를 탈 수 없었고 이때부터 공항을 빠져 나오는 오후 2시 50분까지 7시간 동안 있어야만 했다.
우리가 타려는 비행기는 프레시젼 에어이지만 일을 맡은 회사는 케냐항공이었다. 그런데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계속되어 프레시젼 에어 직원을 만날 수도 없었다. SO Jinsu교수가 들어가고 다음에 SO Gilsu교수가 들어가는데 직원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SO Gilsu교수는 체크인을 안 했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결국 다음날 비행기로 가기로 하고 새로운 보딩패스를 받는데 2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미 출국 수속을 했기 때문에 다시 20달러씩 주고 입국비자를 받는데 2시간, 그리고 짐을 찾는데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어이없게 서길수 교수님 짐은 이미 비행기를 타고 가서 킬리만자로 비행장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의 멍청한 실수가 모두에게 너무 큰 문제를 일으켜버린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오늘 대회장에 도착하여 내일 10시에 열리는 아프리카대회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시아 대표단 이름으로 참가하는 것인데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 한편 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직원에게 팁을 주고 짐도 찾고 아울러 탄자니아 국경까지 가는 버스를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밖에까지 나와서 Samuel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처음 이 일정을 준비할 때 나이로비에서 버스로 분다까지 가는 일정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버스로 가면 밤 12시쯤 도착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대회 개막식에도 참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사무엘은 우리가 아루샤로 가는 도중에 있는 국경도시 Maranga까지 가는 줄 알고 400$이라고 하더니 분다를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Isebania Sirari로 가야 한다고 했더니 1,000$를 내라고 한다. 어떻게 가보려고 몇 번을 흥정하여 750$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버스를 전세 내서 가려던 계획도 실패
드디어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비록 비행기는 놓쳤지만 돈을 들여서라도 목표로 했던 개회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어려운 10시간의 버스행군도 달게 참기로 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우리를 싣고 가던 기사가 차를 주차장에 대더니 다른 기사가 탔다. 국경까지 가려면 경험이 있는 기사라야 된다기에 그런 줄 알았다. 새로 탄 기사는 자기가 국경을 잘 안다고 했다. 그리고 도중 가다가 나꾸루에 가서 저녁밥을 먹고 가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시내로 들어가더니 차를 바꾸어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탄 차는 시외로 나가 국경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시외에 다니는 영업 버스들에게 우리를 적당한 값으로 퍼 넘길 공산이었던 것이다. 차가 너무 작아 짐을 실을 수 없다며 반대하자 나중에는 바로 국경도시 시라리에서 온 버스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운전수는 영어도 모르고 그 차도 12명이 타면 짐을 실을 곳이 없었다. 버스 회사라는 곳을 가보았으나 자신들조차 안전 때문에 문지기가 있고 창살로 막아놓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김성은 선생과 내가 그렇게 흥정하고 다니는 동안 차 안에 남아있는 단원들은 차 문도 열지 못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다행인 것은 기사 핸드폰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탄자니아의 심바와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심바는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내일 개회식에 참석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10시 밤 버스를 타면 편하고 아침 8시면 분다에 도착한다며 그 버스를 타라고 강력하게 부탁했다. 결국은 2시간 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너무 위험하니 우선 비행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동안 모두 힘든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우리가 버스를 타면서 비행기 좌석을 물렸기 때문에 좌석이 다시 있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휴일이라 좌석이 그대로 남아있어 내일 표를 다시 끊고 가까운 Airport Hotel을 잡아 호텔에 다다르니 6시 되었다. 결국 새벽에 호텔을 떠나 비행기도 버스도 타지 못하고 12시간 만에 다시 비싼 돈을 주고 새로운 호텔을 예약하여 돌아오는 하루를 보냈다. 호텔에서 6시 반에 저녁밥을 먹고 일찍 쉬기로 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케냐 나이로비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게 되었다.
12월 27일.
공항 호텔이기 때문에 시간을 잘 지켜주고, 손님 위주로 잘 해 주었다. 정확하게 셔틀을 이용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은 Precision Airway 카운터가 운영되고 있어 아무 문제없이 짐을 부치고 수속을 마쳤다. 어제 일을 항의하기 위해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했더니 매니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매니저가 우리를 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오늘도 어제처럼 나이로비 공항의 철저한 검색을 거치느라 1시간이 걸렸다. 이곳에도 테러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 어떤 공항보다도 보안 검사가 심하다. 우선 공항에 다다르기 전 한 지점을 정해 모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검사를 받은 뒤 그 구역을 지나서 기다리고 있는 차를 탄다. 공항 입구에 내리면 또 검색을 받아야지만 들어가서 탑승수속을 할 수 있고, 출국 심사를 마치고 들어갈 때 검색하고, 게이트를 찾아 긴 복도를 지나가다가 다시 검색, 그리고 게이트 입구에서 다시 한 번 검색을 받아야지만 대기소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보딩패스 받고 타는 곳까지 모두 한 시간이 걸린다.
나이로비 공항에서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지 급하게 하다가는 낭패가 된다.
나이로비(08:00) –PA722- 탄자니아 킬리만자로(09:00)
킬리만자로(09:40) –PA722- 므완자(Mwanza, 11:10)
모두들 처음 타보는 프로펠러 비행기다.
우리는 승무원이 주는 빵과 음료수를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동아프리카를 감상하였다. 비행기가 작기 때문에 낮게 나르고 모두가 양쪽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어 좋은 점이 있었다.
아침 해가 뜨고 있어 역광이라 뚜렷하지는 않지만 아프리카 최고의 킬리만자로가 모습을 나타냈다. 5,895m의 키보(Kibo) 봉우리가 구름에 쌓여 신비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킬리만자로를 돌면 바로 남쪽에 공항이 있다. 출발이 늦었으나 조금 앞당겨 킬리만자로 공항에 내렸다. 미국 같으면 이곳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그 다음에는 국내선이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직원이 올라와 여권과 표만 검사하고 처음에는 바꿔 타는 사람들에게 주는 표를 나누어 주었다가 다시 걷어갔다. 본디 쉬는 시간이 40분으로 잠깐 내렸다가 타는 모양인데,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늦어져 그냥 비행기 안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다.
본디 9시 40분에 떠나야 하는데 10시 30분에 떠난 비행기는 천천히 서쪽을 바라보며 날아갔다. 하늘에서 보기에도 응고롱고로 분화구의 분명한 지형이 나타났다. Maps Me 앱으로 지도에서 지나가는 길을 보면서 땅콩과 마실 거리를 즐긴다. 세렝게티를 지나던 비행기가 11시 20분 탄자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므완자 공항에 내릴 준비를 한다. 수많은 양철 지붕에서 되비치는 하얀 지붕들이 인상적이었고 큰 빅토리아 호수도 아름다웠다.
므완자 공항으로 입국
아주 작지만 국제공항이다. 좁은 곳에서 입국심사를 받았는데 뜻밖에 까다롭다. 세렝게티 가려고 왔다고 했더니 증명서를 내놓으라고 해서 투어영수증을 보여주었다. 세관검사는 더 심했다. 모든 짐을 다 뒤져보는데, 결국 여행 짐속에 김치를 비롯하여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많다고 해서 20달러 벌금을 냈다. 조사를 하다가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 것을 보면 벌금이 아니라 뇌물인것 같았다.
에스페란티스토 2명이 차를 가지고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나타나니 갑자기 모든 문제가 수월해지는 듯했다. 말이 완전히 통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다. 겐도와 다비도는 에스페란토 실력이 완벽했다.
먼저 프레시전 에어 사무실에 가서 매니저를 만나 어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항의하였다. 겐도가 마침 공항에서 근무하다 세관업무를 하는 회사에서 일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다.
에스페란토 대회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내리자마자 대회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현지 회원들은 어제 못했던 일정을 오늘 그대로 진행하였다. 겐도 씨가 자기 친구가 하는 중국집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중국집 You Long(游龍)은 바로 빅토리아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므완자의 상징인 비스마르크 바위(Bismarck rock)를 비롯하여 호숫가의 항구, 건너편 나지막한 산 위에 펼쳐진 바위 마을들이 정말 절경이다. 호숫가에서 먹는 늦은 낮밥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크게 걱정했던 아프리카의 무더위는 뜻밖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아주 으뜸가는 날씨를 보여주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도 걸렸지만 분위기를 즐기느라 2시 50분에야 식당을 나섰다.
빅토리아 호수 유람선
준비해 둔 빅토리아 호수 유람은 그만 두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기 때문에 배타는 1시간을 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배도 타지 못하고 3시 40분 배타는 곳을 떠나 대회장인 분다로 향했다. 준비위원장 심바(스와힐리어로 사자라는 뜻)는 2시간이면 온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3시간이 다 걸렸다.
므완자 → 분다 버스 이동 (전세버스, 230 USD)
아프리카의 시골길은 마치 옛날 우리나라 시골 길을 달리는 것처럼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크게 낯설지도 않았다. 가는 길에 한 시골에 서서 망고와 바나나를 샀는데 애플망고 19개에 5,000원, 바나나 3덩이에 3,000원이니 참으로 싸다.
이곳에서는 애플망고를 300원에 사고, 삼성 집안만 먹었던 애플망고를 이곳 사람들은 우리 토마토 따먹듯이 먹고 있다.
분다에 가까워지자 세렝게티 서쪽 끝을 지나면서 들판 짐승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해가 넘어가는 6시 반에야 목적지 호텔에 다다랐다. 짐들을 들여놓고 대회장에 다다르니 이미 땅거미가 지고 7시가 넘었다. 그렇게 보니 오늘은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오기만 한 것이다.
탄자니아 합중국, United Republic of Tanzania
위치 아프리카 동부
인구 5104만 5882명(2015년 현재)
수도 도도마
면적 94만 7300㎢
언어 스와힐리어, 영어, 아랍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대통령 중심제, 단원제
인종구성 아프리카 원주민
종교 이슬람교(35%), 그리스도교(30%), 토착종교
화폐 탄자니아 실링 (TZS)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 연안에 있는 적도 바로 남쪽에 있는 나라.
정식 명칭은 탄자니아합중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Jamhuri Ya Muungano wa Tanzania)으로, 인도양 연안 해안선의 길이는 1,424㎞에 달한다. 영연방에 속한 독립국으로, 면적 94만 7300㎢, 인구 5104만 5882명(2015년 현재), 1974년 이래 공식수도는 도도마(Dodoma)이다. 그러나 정부청사는 대부분 탄자니아 최대의 도시이자 항구인 다르에스살람에 있다. 종족은 수쿠마(Sukuma), 냐메우지(Nyamewzi) 등 120여 개의 부족이 혼재하고, 종교는 기독교가 30%, 이슬람교 35%, 토착종교가 35%이다. 공용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이나 잔지바르 섬은 주민 대부분이 아랍어를 쓴다.
동쪽으로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말라위·모잠비크, 서쪽으로는 잠비아·콩고 민주공화국·부룬디·르완다, 북쪽으로는 우간다·케냐 등과 각각 접한다. 본토 외에 잔지바르 섬(1,660㎢), 펨바 섬(984㎢), 마피아 섬(518㎢) 등의 해안영토가 포함된다.
기후는, 해안지방은 고온다습하며, 중부고원지방은 건조하고 계절에 따라 기온 차가 크고, 산악지역은 온화하다. 전통 농업국가로서, 경작지가 전 국토의 13%에 불과하나 80%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산품이 국민총생산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커피·면화·차 등 수출작물이 주산물이며, 식량은 수입에 의존한다. 교역은 서방측과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주요 수출품은 농작물로 총수출의 70%를 차지하고, 특히 커피는 총수출의 40%에 달한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481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955달러이다.
이 나라는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274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탄자니아혁명당(CCM), 탄자니아인민당(TPP), 연합시민전선(CUF), 연합민주당(UDP) 등이 있다.
1880년대까지 잔지바르 왕국의 영향권에 있다가 1891년에 독일령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령이 되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고, 1946년부터 유엔의 신탁통치를 받았다. 1961년 12월 9일 영국에서 독립하여 영연방에 속하는 탕가니카공화국이 되었다.
한편, 잔지바르는 1963년 12월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여 유엔에 가입하고, 이듬해 1월 혁명으로 잔지바르 공화국으로 바뀌었으며, 10월에는 탕가니카공화국과 연합하여 탄자니아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초기인 1967년 대부분의 주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나 경제적 성과가 뚜렷하지 않자 1970년 말 실용주의적 노선을 일부 채택하였다. 1977년 4월 헌법을 제정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완화하고 산업의 효율화를 위한 민간경제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과거 비동맹중립·범아프리카주의, 공산국가와의 친밀한 관계 유지, 서방측과의 관계 향상을 통한 원조 획득 등을 특징으로 한 외교정책을 전개하면서 좌경중립의 외교를 펴고 있으며, 1961년 유엔에, 1964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전 세계적인 민주화 추세에 따라 점진적인 정치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2005년 12월에 키크웨테(Jakaya Kikwete) 대통령이 취임하여 정부를 이끌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1992년 4월 30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6년 한때 우리와의 교역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적도 있었으나, 2013년 현재 우리니라의 대 탄자니아 수출액은 1억 968만 달러로 주 종목은 경유, 석유화학제품, 섬유제품 등이고, 수입액은 5,084만 달러로 주 종목은 잎담배, 미정제동괴, 커피 등이다. 양국은 1998년 12월에 경제과학기술협력 협정과 투자보장 협정, 그리고 문화 협정을 체결하였고, 1999년 4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을 체결하였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6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15년 현재 대진광업 등이 진출해 있고, 480명의 한국 사람이 있다.
한편 북한은 1965년 1월 1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한 뒤,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탄자니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양측은 고위인사의 상호방문뿐만 아니라 1965년 6월에 통상 협정을 체결한 이후 1966년 7월 과학 및 문화협조 협정, 1984년 6월에 방송분야협조 협정과 체신협조 협정, 1986년 2월에 농업분야협력 협정, 1993년 6월에 공보분야협력 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또한, 북한은 탄자니아에 건자재·기계류·옥수수 등을 무상으로 원조하였으며, 특수훈련교관단 등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3만 2000달러 상당의 기계류와 전기기기 등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탄자니아 자연환경
국토의 대부분이 평야와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복이 심한 지형도 있다. 해안지대는 낮고 좁다. 산계는 북에서 남서방향으로 구불구불 퍼져 있으며 우피파 고원, 음베야 산맥, 룽궤 산맥으로 구성된다.
해안 가까이에는 우삼바라 산맥과 파레 산맥이 있다. 고지대의 기복은 해발 5,895m로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의 설봉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르에스살람에서 서쪽으로 약 190km 지점에 울루구루 산맥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키펭게레 산과 리빙스턴 산이 니아사 호 위로 솟아 있다.
킬리만자로(Kilimanjaro)
케냐와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탄자니아의 화산괴
세계에서 2번째로 깊은(수심 1,436m) 호수인 탕가니카 호는 세계 최대 대륙 지구대(地溝帶)의 일부를 이룬다. 니아사 호의 북쪽에서 이 지구대는 서쪽 지구와 동쪽 지구로 갈라지며, 팡가니 계곡(킬리만자로에서 남동쪽으로 인도양까지 뻗어 있음)과 말라가라시 늪 등의 함몰지들은 이 지구들 때문에 생긴 지형이다. 킬리만자로 서쪽에 있는 올도이뇨렝가이는 유일한 활화산이다.
국경지대에는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담수호인 빅토리아 호(면적 6만 9,484㎢)를 포함하여 3개의 호수가 있다. 나일·콩고·잠베지 강 등 3대 하천이 탄자니아에서 발원하지만 정작 이 나라에서 물이 마르지 않는 하천은 보기 힘들다. 최대의 하천유역은 루피지 강 유역으로 국토의 남부 15만 6,160㎢를 차지한다.
루피지 강(Rufiji River)
탄자니아에서 가장 큰 강
토양은 풍화된 암석이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쌓여 형성된 잔적층(殘積層) 토양과 풍화된 자리에서 물에 녹거나 씻겨 내려가 쌓인 집적층 토양이 대부분이다. 높고 습한 산지에서는 갈색의 화산토와 철을 함유한 토양이 발견된다.
탄자니아는 대체로 고도에 따라 완화되는 적도기후를 보인다. 해안지역과 바로 인접한 후배지는 평균 26.6℃의 기온과 높은 습도를 보이며, 1년에 1,000∼1,900㎜의 비가 내린다. 기온이 매우 높고 건조한 중앙고원은 500∼750㎜의 강우량을 기록한다.
빅토리아 호 일대는 평균 강우량이 750∼2,250㎜ 분포이다. 미옴보라고 하는 삼림지대가 전국토의 거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지표면은 대체로 풀과 여러 종류의 숲으로 덮여 있으며, 국토의 약 1/3이 임야로 이루어져 있다. 갈대와 풀이 우거진 늪은 해안가의 짙은 홍수림 지대와 대조를 이룬다.
국립공원과 금렵구역들이 약 2만 3,552㎢를 차지하는데, 그중 1만 4,600㎢ 이상이 세렝게티 국립공원 내의 영토이다. 서식동물로는 코끼리·코뿔소·물소·사자·표범·얼룩말·기린, 그리고 일런드·쿠두·디크딕·누 등을 비롯한 다양한 영양류가 있다. 가경지는 육지면적의 약 6% 정도이다.
관개지는 196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초 사이에 약 80%가 확장되었다. 국토의 거의 절반이 목초지나 방목지이다. 탄자니아에는 금과 비금속의 주요광상이 있다. 1980년대 초에 화석연료로 30억㎥의 천연 가스와 2억 7,000만t 이상의 역청탄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국민
인구의 거의 절반이 15세 미만인데, 이는 출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1967년의 국세조사와 1978년의 국세조사 사이에 인구의 연 증가율은 3.3%였고, 그 증가폭은 점점 가속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민보건 향상으로 사망률은 1,000명당 22명(1967)에서 15.8명(1978)으로 떨어진 반면, 출생률은 1,000명당 46명 선을 유지했다. 평균인구밀도는 1㎢당 22명꼴이다.
인구분포의 양상은 토양, 기후(강우량), 체체파리의 유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체체파리는 중부와 서부 지방에서 주로 발견된다. 매우 건조한 북부지방도 인구가 희박하다. 인구밀집지역은 빅토리아 호 연안과 고지대 등을 비롯하여 주로 물이 풍부한 지역들인데 대부분이 변두리에 있다. 농촌주민을 다시 정주시키려는 계획이 1970년 정부 주도로 시행되었다. 1980년대 초에는 약 7,700개의 마을들이 등록을 마쳐 사회복지사업의 시행이 촉진되었으며, 이 마을들에 농촌인구의 3/4 이상이 거주했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에서 도시화가 가장 덜 된 나라의 하나로, 도시인구가 전체인구의 1/10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잔지바르 섬에서는 주민의 거의 1/4이 도시에 산다. 다르에스살람에는 75만 7,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는 전체도시인구의 1/2에 해당한다.
이 나라에는 식별되는 종족이 약 120개나 되지만 두드러지게 큰 집단은 하나도 없다. 최대 종족인 수쿠마족이 인구의 13%를 구성하며, 그밖에는 5%를 넘는 집단이 하나도 없다. 유럽인·아시아인(인도인·파키스탄인·고아인)·아랍인을 포함하여 비아프리카인이 인구의 약 1%를 구성한다.
탄자니아의 국민
대표적인 언어는 반투어군·나일어군·쿠시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이다. 인구의 과반수가 반투어를 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용인구가 많은 스와힐리어는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아랍어는 해안지방에서 널리 쓰인다. 아시아인이 주로 쓰는 언어는 구자라트어·힌디어·펀자브어이다.
종교면에서 볼 때 토속종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점차 줄고 있는 실정이다. 해안지방에서는 이슬람교가 가장 널리 퍼져 있다. 인구의 2/5 이상이 그리스도교도이다.
경제
탄자니아는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중앙계획 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1970년대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경제발전이 이루어졌지만, 그 후 우간다에 대한 군사개입(1979∼81)으로 경제력이 손실된 데다가 수출의 감소와 석유가격의 앙등이 겹쳐 경제상황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에 약 43억 5,00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1인당 GNP는 280달러로 매우 낮았다.
경작지가 극히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부문이 GN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4/5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생산고는 변동 폭이 상당히 크며, 가뭄과 연료·기계류의 부족 때문에 심각한 부족사태도 종종 발생한다. 정부는 커피, 잔지바르 섬에서 생산되는 정향, 목화, 사이잘삼, 캐슈나무 열매, 차, 담배 등 수익 작물 생산의 위축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책적으로 옥수수·카사바·수수·기장·벼·플랜틴 등의 식량작물 재배를 장려하지만, 심각한 식량부족상태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탄자니아의 농업
다이아몬드 생산은 최근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으며, 대신 금·소금·귀석류·석고·고령토 등이 생산된다. 석탄은 남서부 지방에서 채굴되며, 중국의 원조를 받아 석탄생산을 늘리고 철광산을 개발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송고송고 섬에서 석유와 천연 가스가 발견되었으며, 세계은행(IBRD)과 알제리의 협력으로 정밀시추가 진행되고 있다. 공업은 GNP의 약 1/8을 차지할 뿐이며 노동인구 중 공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은 그보다 더 낮다.
제조업은 주로 토산물의 가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국영기업들이 주도한다. 식품가공업이 최대공업이며 그밖에 직물·양조·담배 제조 분야가 발달해 있다. 연간 전력생산량은 1980년대 초에 시간당 7억 1,000만kW를 기록했으며, 주로 수력발전으로 충당된다. 서비스업은 GNP의 1/3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10% 이상이 종사하고 있다. 상업부문은 사실상 전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1977년 동아프리카 공동체(EAC)가 와해됨으로써 탄자니아는 국내의 항구·철도·항공 수송망을 운영하고 정비하는 데 막대한 재원을 전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AC의 와해는 관광여행 코스가 되어온 탄자니아-케냐 국경의 폐쇄와 그에 따른 탄자니아 관광산업의 쇠퇴를 야기하기도 했다. 국영 탄자니아 관광공사는 자체 관광산업의 부흥을 위해 독자적인 계획 수립을 모색하고 있다.
식료품·연료·기계류 등의 수입총액이 커피·면화·사이잘삼·정향 등을 주종으로 하는 수출총액의 2배가 넘어 심각한 외화부족을 초래하고 있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영국·독일·네덜란드·일본·이탈리아 등이다. 경제개발의 2/3 이상이 쌍무계약을 맺은 광범위한 기증단체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치와 사회
1977년에 채택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헌법은 좌익혁명당(Chama Cha Mapinduzi/CCM)을 합법적인 유일한 정당으로 하고 행정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며, 대통령은 CCM의 당수를 겸하고 부통령과 국무총리의 보좌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회는 최고입법기관이며, 임명된 의원과 5년마다 대통령과 동시에 선출되는 의원들로 구성된다. 잔지바르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10명으로 되어 있다. 탄자니아 본토는 부족법, 이슬람 법, 영국 보통법 등 3분 관할의 사법제도를 가지고 있다. 잔지바르에는 변호사, 배심원, 고등법원에의 상소 등을 허용하지 않는 인민법원이 있다. 잔지바르 혁명위원회는 법원의 판결을 심의한다.
정부는 병원과 약국으로 구성되는 전국의 의료 망을 관장한다. 의료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예방의학이며, 단속법의 시행 결과 국민보건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가장 흔한 풍토병은 말라리아·아프리카수면병·주혈흡충증(住血吸蟲症)·사상충증 등이다. 영양결핍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노동입법은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 여자와 미성년자의 고용, 종업원의 보상, 노동분쟁의 해결 등을 다루고 있다. 노동조합들과 그 밖의 대규모 단체들은 CCM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이곳의 노동조합은 서방세계의 전통적인 노동조합과는 달리 임금과 근로조건에 관한 협상의 기능이 없다. 저소득층을 위해서는 주택건설계획이 시행되고 있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중등학교·대학교의 3단계로 되어 있으며, 초등교육은 무상·의무로 실시되고 있다. 정부는 중등학교 진학률이 낮기 때문에 실업훈련을 초등교육 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장려하고 있다. 정규교육기관 외에 전문학교·실업학교·종교학교 등도 있다. 여러 일간지들이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병행하여 발간된다. 〈내셔널리스트 Nationalist〉는 당 기관지이다. 그 밖의 주요 신문인 〈스탠더드 Standard〉는 정부가 관리한다. 스와힐리어와 영어로 방송하는 탄자니아 라디오 방송국 역시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학교와 농민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문화
여러 인종집단과 각각의 다양한 전통·언어·관습 등이 탄자니아 문화의 특징을 이룬다. 조형미술 가운데는 오랜 전통을 가진 추상적 마콘도 목각과 마사이족의 무기제작이 포함된다. 부족마다 고유의 무용과 민속이 있으며, 스와힐리어를 이용한 시와 산문의 저술이 활발하다. 유명한 문인 가운데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도 포함되는데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의 극들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한 업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
BC 1000∼1년 카프카스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에티오피아계의 남부 쿠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이 탄자니아 북부에 거주하면서 점차 남부지방으로 퍼져나갔다. AD 1∼1000년 전반의 어느 시기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소수집단의 사람들과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로 이주해와 정착했다. 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 해안지방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인도와도 무역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해안의 무역 중심지들은 주로 아랍인 정착지들이었다. 15세기말경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 해안지방에서의 아랍인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었지만, 포르투갈인은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18세기 초에 루부마 강 이북의 소유지를 상실했는데, 이는 해안지방의 아랍인들과 오만의 지배자가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아라비아의 무역상들은 노예를 찾아 끊임없이 내륙으로 깊이 침투했는데, 그들의 주요 내륙침투로는 니아사 호를 향한 남서쪽 경로였다. 1825년경 아랍 상인들은 토착부족들의 교역로를 따라 노예 못지않게 값이 나가는 상아가 있는 니암웨지로 들어갔다. 1840년대 초 아랍인들은 니암웨지로부터 탕가니카 호까지 전진하여 교역소들을 설치했다. 1840년대 말 독일인 J.L. 크라프와 J. 레프만이 영국국교회 선교회의 대표로 이 지역에 왔다가 킬리만자로 산을 발견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관심이 커졌다. 1885년경 마침내 독일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 지역에 도달했으며, 1907년경 이 지역은 완전히 독일인의 영향권 내에 편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이 독일 점유지들을 점령했고, 전쟁이 끝난 후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영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이 지역을 국제연합(UN) 신탁통치령으로 계속 지배했다. 1961년 탕가니카가 독립을 얻어 UN에 가입했다. 1년 후 탕가니카는 줄리어스 니에레레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었지만, 계속 영국연방 내에 잔류했다. 1964년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합병하여 탄자니아를 이루었다. 1977년에 이르러 탄자니아는 잔지바르의 자치를 보증하는 신헌법 하에 1당제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우간다의 대통령 이디 아민 다다가 1978년 말 탄자니아를 공격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79년 탄자니아 군대가 우간다를 침공했다. 그들은 아민을 축출하고 1981년 철수했다. 1974년 도도마가 이 나라의 수도로 지정되었지만, 1980년대 초까지도 이 신도시의 건설이 거의 진척되지 않아 정부청사의 대부분이 다르에스살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탄자니아와 한국과의 관계
원래 탄자니아는 북한 단독수교국으로서 한국과는 한때 한국친선사절단이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다가 1992년에 와서야 수교했다. 북한과는 1965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주공관을 설치한 이래 상호 고위인사의 방문 등으로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해왔으며, 북한은 이 나라에 기계와 곡물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65년 6월 통상협정, 1966년 7월 과학 및 문화 협조협정, 1984년 6월 체신협조협정을 각각 체결했다.
인용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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