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관조차 짜지 못했던 백성, 그들을 보듬은 정약전
촌로들은 말했다. “청높바람에 도구통 자빠진 곳이요.” 도구통이야 알겠다. 곡식 찧는 절구의 남도 사투리 아닌가. 청높바람은 또 뭔가. 어학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북서풍이요, 바람이 아주 씨고 춥다는 뜻이지라. 볕도 잘 안드는 음습한 곳이제.” 서당골은 멀고도 높았다. 바다로 흐르는 산자락 따라 집들이 붙어 있다. 76세대 139명이 살고 있단다.
예리항에서 남서쪽 작은 마을 흑산면 사리(沙里). 1200년께 밀양박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변에 모래가 많아 ‘모래미’ ‘사촌(沙村)’이라 불렀다. 흑산 면소재지에서 승용차로 20~30여분 남짓 거리다. 집 가는 길과 집들의 경계는 오래된 돌담이다. 돌담은 이 마을에 농토가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밭이래야 손바닥 만 한 텃밭이 전부다. 마을 사람들에게 농토는 칠형제 바위 건너 바다였다.
촌로들이 말을 잇는다. “배타는 애비전, 애기 낳는 어미전이란 말 모르제. 우리 사리에서 내려오는 말이여. 참말로 하루에 초상을 다섯집에서 치른 적도 있었제.” 사리 사람들은 그랬다. 아비가 바다에 나가 죽으면, 그 뒷날 다시 아들이 나갔다. 먹고 살아야 하니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없듯이, 남자들이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질긴 생존의 삶이런가.
사리는 북쪽마을 예리, 진리와 달랐다. 흑산도에서 가장 어업이 발달했다. 어장이 뭔지 모를 때 이 마을은 어장을 가졌다. 어업이 발달한 것은 뒷산 선유봉 덕분이었다. 물고기가 많은 서쪽 바다 어장에 나가 돌아올 때면 선유봉이 등대 역할을 했다. 마을 뒷산을 보고 어둔 밤바다 길을 냈다. 공부 내력도 두터웠다. “내리 이장이 안가면 회의가 안 열릴 정도였제” 자부심이 묻어난다. 이준곤 교수는 ‘서남해 바다이야기와 해양인의 삶’이란 책에서 사리가 조개류와 바다고기가 풍성한 지역으로 정리했다.
돌담을 따라 몰랑터로 오른다. 바다에서 나는 ‘몰’을 말리는 터란다. 몰은 해조류의 일종인 모자반의 경상도 사투리다. 마을 여기저기에 밀양박씨 경상도 흔적이 담겨 있다. 몰랑도 산자락을 뜻하는 전라ㆍ경상도 방언이다. 몰과 몰랑이 터와 섞여 있다. 선유봉 산자락 몰 말리던 곳이란 뜻일게다. 몰랑터와 사당터가 한 자리에 있었다. 두 땅을 합해 서당골이라 했다. 몰랑터에 사리 공소가, 서당터에 손암 정약전(1758~1816)이 머물렀다.
사리공소-. 작아서 아름다운가. 소박해서 하늘에 가까이 가는가. 미사를 집전할 사제조차 없어 공소다. 벽에 페인트 치장도, 성모동굴도 없다. 2층 종탑에 맞배 양식에 함석지붕을 덮었다. 입구는 아치형으로 모양을 낸 뒤 샷슈 미닫이다. 미닫이에 자물쇠를 채웠지만, 열쇠가 붙어 있다. 효용 없는 잠금이다. 그냥 손 타는 걸 꺼리는 속내 일게다. 종탑 외벽은 시멘트에 몽돌을 넣었다. 아치 중앙에 ‘천주교사리성당’이라 쓴 자연석을 세로로 심었다. 세상에 이리 작은 성당문패도 있을까. 어른 손바닥 두개 길이다. 탑 2층에 성인 조각상을 넣고, 맨 위에 십자가를 올렸다. 종은 정문 오른편에 나무로 세워 묶었다. 굳이 종을 쳐 미사를 알릴 일이 없을 성 싶다. 마당에 잔디도 없이 그냥 맨땅이다.
공소 마당에 성모상이 서 있다. 동굴에서 발현한 성모가 아닌 세상 비바람 맞는 마리아 상이다. 성모상 뒤편에 수국이 한 아름이다. 보랏빛에 연붉은 수국이 활짝 피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을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 푸른
한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무더기로 쏟아지네
-‘수국을 보며’ 이해인 수녀 作
소에 수국을 피운 까닭이 뭘까. 막 꽃을 피운 수국은 녹색기가 도는 흰 꽃이다. 점차로 청색으로 변하여 나중에 붉은 기운이 도는 자색으로 바뀐다. 액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해 집안에 심었다. 꽃말은 냉담, 변심, 변덕이란다. 수국이라-. 혹 하얀 수국처럼 맑고 깨끗한 심성으로, 냉담하거나 변심하지 말고, 그 푸른 기운을 끝까지 붉은 열정처럼 지키자는 믿음의 다짐은 아니었을까.
손암 정약전은 믿음을 지킬 수 없었다. 동생 정약종과 조카사위 황사영이 순교할 때 그들에 기대 유배형을 받았다. 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를 거부하다 장남과 함께 참수됐다. 부인 유씨와 차남, 딸은 기해박해(1839)때 사형 당했다. 온 식구가 절멸했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능지처참 당하고 부인과 아들은 관노가 됐다. 막내 정약용은 강진으로 내쳐졌다.
흑산 사리에 몸을 튼 손암은 서당을 열고 물고기를 공부했다. 유배 4년째이던 1804년에는 ‘송정사의(松政私議)’를 냈다. 나라의 소나무 정책에 대한 사견이란 뜻이다.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국법 때문에 죽어서 관도 만들지 못하는 백성들의 비원을 담았다. 흑산도 일대에 초장(草葬)이 성행한데는 소나무로 관을 만들 수 없는 국가의 윽박지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손암은 벌채를 못하게 하지 말고, 대신 식목을 장려하라고 했다. 10년 뒤에는 물고기 공부를 모아 자산어보도 펴냈다. 틈틈이 성가도 지었다. 그는 ‘상스러운 어부, 천한 이와 패거리가 되어 귀한 신분으로 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암이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려 하자 섬사람들이 길을 막고 남아 있어 달라고 했다. 1년을 설득해 겨우 우이도로 건너갔다. 강진에서 약용은 형님의 삶을 편지에 담아 두 아들을 가르쳤다.
약전의 삶이 신앙은 아니었을까. 관조차 짜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글을 짓고, 물고기의 길과 생김을 적은 책을 낸 그였다. 책들은 민중이었고, 민초의 삶이었다. 삶이 곧 믿음이었다. 사리 공소, 소박하고 검박한 공간에 신과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먼 바다 흑산의 또 다른 한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