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다큐=김윤겸] 10년 전인 2014년 10월 갑작스런 비보에 당시 많은 30~40대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가수 신해철의 사망 소식이었다. 후에 의료사고라는 사망 원인이 밝혀지고 사회적 논란으로까지 확대됐지만 당시 팬들의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故 신해철을 떠나보낸지도 10년이 지났다. 27일은 그의 사망 10주기다. 강산이 변할 정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아왔던 팬들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유튜브, 커뮤니티 등 각종 온라인 공간에서는 그의 사망 10주기와 관련한 콘텐츠가 무수히 제작되고 있으며 댓글과 SNS에서는 여전히 그리워하는 반응이 많다. 이제는 4050이 된 그들 세대에게 신해철은 무슨 의미일까?
국내 가요사에 있어 신해철의 족적은 상당하다. 그룹 무한궤도 보컬로 참가한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선보인 '그대에게'는 가요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화려한 신디사이저로 시작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 곡은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석해 졸고 있던 가수 조용필을 번쩍 깨게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이후 무한궤도에서 솔로로 데뷔하며 귀공자 이미지로 당대의 아이돌로 거듭난 그는 단순한 톱스타 이상의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가수가 직접 작사, 작곡하는 싱어 송라이터를 넘어 사실상 원맨 밴드로 편곡, 프로듀싱까지 도맡아 한 2집 'MYself'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특히 독학으로 미디(MIDI)라는 장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당대에는 생소했던 컴퓨터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혁명에 가까웠다. 미디 활용은 90년대 가요계의 다양성을 폭발시키는 계기였고 가수 서태지가 데뷔전 신해철에게 미디를 배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독보적 뮤지션으로 우뚝 선 故 신해철의 당시 행보는 확실히 남달랐다. 솔로에서 다시 그룹으로 돌아가 '넥스트'라는 밴드를 조직한 것. 수익배분과 음악적 지향성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그는 했고 백두산, 부활, 시나위로 대표됐던 록 음악이 퇴조하고 장르의 침체기 시절에 그는 그룹 넥스트로 명맥을 유지했고 여전한 인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다시 솔로로 돌아가 영국 유학길에 오르고 테크노 음악을 적극 도입했던 그는 가요계의 선구자였다. 물론 독단적인 성격과 완벽주의로 자주 잡음을 일으키고 두 번의 대마초 흡입으로 인한 구속 등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취는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이런 족적들만으로 현재의 40~50대가 그를 그리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사를 통해 전달한 그의 메시지는 세대의 울림이 있었다.
신해철의 가사는 사랑이야기 혹은 사회비판을 넘어서는 독보적인 영역이 있다. 바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아성찰적 가사다.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나에게 쓰는 편지'나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라 읊조렸던 '민물장어의 꿈' 등 그의 가사는 개개인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위로하는 형식이 많았다.
불안한 미래와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당시의 젊은 세대는 이를 보듬는 신해철의 가사에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각종 사회문제에 비판 어린 시각을 가진 그와 동조하며 함께 성장하는 존재로 인식해갔다.
그랬던 그가 의료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들 세대에게는 일종의 허탈감과 무력감을 줬다. 그리고 이는 10년이 넘도록 고인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됐다.
25일 배우 김수미가 심정지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던 20세기의 스타들이 최근 하나 둘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흔히들 요즘 시대에 대해 '낭만이 없다'라고 푸념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낭만의 시대를 경험하고 공유했던 이들이 서서히 세상을 등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