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진훤의 땅, 광주
892년 무진주에서 거병한 후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진훤은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인지, 광주 북촌 출신인지 궁금하다.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삼국유사 권2, 후백제와 진훤조에 실려 전하는 진훤의 출생 설화 때문이다.
“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단아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로 와서 관계를 맺곤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바늘에 실을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놓아라.’ 딸이 그렇게 했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풀려나간 실을 찾았는데, 실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꿰어 있었다. 그 후 딸이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진훤이라 일컬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진훤이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진훤이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고, 학계에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진훤의 출신지가 오늘 어디인지를 묻는 이유는 상주 출신설이 갖는 논리적 허점이 너무 많아 보일 뿐더러, 지렁이 설화의 땅 광주에 진훤 관련 흔적이 많이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상주 출신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자개가 진훤의 친 아버지라면 그의 아들의 적수였던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할 수 있겠는가?
둘째, 918년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한 사건은 아자개가 진훤의 생부였다면 당시 최고의 빅 뉴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어디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은 없다.
셋째,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기 10여 년 전인 906년, 진훤이 후백제의 왕이 되어 상주에 금의환향하지만 상주민들의 진훤에 대한 어떤 반응도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넷째, 진훤 정권에 참여한 인물 중 상주 출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광주 출신일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진훤은 거병한지 한 달 만에 5천의 무리를 모은다. 궁예가 3,500의 무리를 모아 자립하는데 10년이 소요되었음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의 놀라운 속도다.
둘째, 지훤을 비롯한 박영규, 김총, 능창 등 진훤 정권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광주와 광주 주변 출신의 인물들이다. 진훤 정권의 중심인물 중 상주 출신은 단 한명도 없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진훤은 상주 출신이 아닌 광주 출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며, 출신지의 끈끈한 연고를 바탕으로 후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아 보인다. 그 합리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많은 흔적들이 각종 고지도나 문헌 및 전설 등에 남아 있다.
광주의 북쪽, 영산강 상류지역에는 삼국유사의 출생 설화 이외에도 진훤과 관련된 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19세기에 제작된 각종 문헌에 남아 전하는 진훤대(甄萱臺)와 방목평(放牧坪)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옛 문헌 가운데 진훤대와 방목평에 대해 처음 언급한 관찬 자료는 18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다. 여지도서 이후 간행된 광주읍지에도 진훤대와 방목평을 다루고 있고, 그 내용도 여지도서와 대동소이하다.
광주읍지에 따르면 “진훤대는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고 했고, “방목평은 진훤대 아래에 있으며 민간에 전하길 진훤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고 한다.”로 적고 있다.
진훤대와 방목평은 지금 어디일까? 광주읍지에 보이는 진훤대가 지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생룡동 뒷산인 대포리봉(죽취봉으로도 불린다)과 동림동의 대마산으로 견해가 엇갈린다. 북구 생룡 마을 뒤에서 대포리봉으로 가는 가파른 구릉을 따라 꼭대기까지 약 2.5킬로미터에 걸쳐 흙과 돌로 쌓은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성터 꼭대기를 진훤대라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생룡 마을 뒤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대포리봉이 진훤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훤이 광주 북촌에서 출생했다는 삼국유사의 설화나 생룡 마을 등 ‘용’자 이름이 붙은 동네 이름이 유독 많은 것과 관련짓기도 한다. 그러나 대포리봉이 진훤대라는 설은 다음의 취약성을 안고 있다. 대포리봉이 있는 생룡 마을은 옛 거리상으로 북쪽 40리에 있던 동네다. 이는 당시 진훤대가 북쪽 15리에 있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동림동의 대마산(93.9미터)이 진훤대라는 증거는 이렇다. 19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 방안지도에 “진훤대는 황계면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황계면은 대마산이 있는 지금의 동림동 일대를 부르던 옛 지명이다. 또한 이 지도에 “황계면이 읍치로부터 10~1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진훤대가 북쪽 15리에 있다고 했던 광주읍지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19세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진훤대가 황계면 남쪽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더욱이 대마산은 왕조대로 추정되는 광·송간 도로변의 사월산(혹은 백마산으로도 추정함)과도 서로 마주보고 있어 “왕조대는 진훤대와 더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여지도서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동국지도는 황계산(지금의 운암산) 옆에 별도의 산을 그려놓고 이곳을 진훤대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조선시대 후기 사람들은 진훤대가 북구 생룡마을이 아닌 동림동의 대마산을 진훤대로 믿었음을 보여준다.
북구 일대의 ‘용’자 마을
영산강 유역에서도 나주 이남의 중·하류 지역은 왕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설화가 압도적이다. 왕건과 오다련의 딸이 처음 만난 나주 시청 앞의 완사천, 왕건이 진훤의 군대에 쫓기던 중 꿈의 계시를 받았던 나주시 동강면의 몽송마을, 그리고 왕건이 진훤의 추격을 피해 건넜다는 무안 몽탄면과 나주 동강면 사이의 몽탄나루(오늘의 몽탄대교), 왕건이 진훤의 군대를 크게 이겼다는 무안 몽탄면의 파군교 등이 그것이다.
반면, 영산강 상류 지역에는 진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광주 북촌의 지렁이 설화나 문헌에 등장하는 진훤대와 방목평이 그것이다. 진훤 설화는 나주 이남에 남아 전하는 왕건 설화에 비하면 매우 적다. 이는 왕건이 역사의 승자였던 반면, 진훤은 패자였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산강 상류, 그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북구 생룡 마을 일대에 남아 전하는 ‘용’자 마을의 집중도 흥미롭다. 고려 2대왕 혜종이 태어난 나주의 흥룡동처럼 용은 왕을 상징하는 지명으로 곧잘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산강 상류인 북구 생룡 마을과 담양군 대전면 일대에는 생룡·용전·용산·용강·용두·복룡·용동·청룡·신룡·용정 등 용자를 쓴 마을 이름만 줄잡아 10여 곳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반경 5킬로미터 안에 이처럼 용자 지명을 가진 마을이 밀집해 있는 것은 이 일대가 유일하다.
영산강 이북인 광주에 오면 진훤은 왕건의 주위를 맴도는 조연이 아니라 ‘진훤이 태어났다, 진훤이 머무르며 진을 쳤다, 진훤이 포위를 풀었다’ 처럼 주어가 되고 주연이 된다. 역사적으로는 왕건에게 패했지만, 전설을 통해서나마 진훤을 역사의 승리자로 두고 싶어 하는 광주인들의 진훤 사랑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