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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살아 있는 참교육
10여년 전 독일에 갔더니 도로변에 초등학생이 작은 돗자리를 펴 놓고 자기가 썼던 학용품과
장난감을 진열해놓고 팔고 있었다.말이 안통했지만 눈치와 코치로 디스카운트까지 하여
작은 구슬을 사줬다.그랬더니 건너편에 있던 얘 엄마가 달려와 쓰다듬으며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 주는 것 같았다.수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도초등학교 교육과정에 시장거래를 실습하고 있고 간단한 가구를 직접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다.생활과 연계된 교육,생활을 가르치는 교육,이것이 참교육이고 산교육이 아닐까?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우리나라, 특히 순천조례초등학교에서는 산교육을 시켰다.
방석우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기도 했지만 그 때는 대부분의 시골 학교에서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교과목에도 ‘실과’라는 게 있었고 중학교 때에는’기술’ 인문계 고등학교에도 ‘공업일반’을
가르쳤었다.
■ 퇴비증산
내가 초등학생 때인 1960년대에는 4학년 이상 고학년이 되면 여름부터 가을까지 일정량의 노동을
해야만 했다.여름에는 각 반별로 퇴비를 만드는 경쟁을 한다.운동장 가장자리에 각 반별로 풀을
베어다 쌓는 것이다.땡볕에 고사리 손으로 산과 들을 다니며 풀을 베어 오는데 가끔은 아버지가
한 짐 베어다 주기도 했다.이렇게 모아 온 퇴비는 거름을 만들어 학교에서 직영하는 농지에
뿌리기도 하고 학교 주변으로 이름표를 달고 서 있는 갖가지 수목에 거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비료가 귀하던 시절 퇴비증산은 곧 식량증산이었다.공동작업으로 마을 퇴비 생산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도 시나 군청 주관으로 ‘퇴비증산대회’를 했다.
내가 구경했던 대회는 지금 이수중학교가 자리한 ‘순천시립 공동묘지’에서 였다.
퇴비증산도 하고 주인 없는 공동묘지 벌초도 해주는 1석2조의 효과를 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 대회에는 내노라 하는 낫질 실력자들이다 모여서 풀을 베는데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낫질을 잘해 금방 풀더미가 쌓인다.완장을 찬 사람들이 평가를 하여 등위를 정한 후 상품을 주는데, 시상품은 대개 농기구 들이다.
1등에게는 당시 귀했던 논 매는 기계였다.엄밀히 말하면 기계가 아니고 도구다.
죽죽 밀고 다니면 잡초가 톱니바퀴에 의해 뽑히면서 감기는 도구다. 2등에게는 괭이나 구화,
쇠스랑.삽. 이런 것들을 줬고 3등에게는 ‘왜낫’이라 불리는 풀 벨 때 쓰면 편하고 잘 베어지는 낫
몇 자루씩 줬었다.
■ 여름방학 과외
여름방학 때는 과외비를 얼마씩 내고 주산을 배웠다.주산 실력은 사회생활을 한다거나 공부를
함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인식되던 때라 농고보다 공부를 잘하는 엘리트들이 상고로
진학했고 당시 상고 출신들은 선망의 대상이던 은행에 다닐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화이트칼라로 역할을 했고 그런 훌륭한 학교인 상고를 갈려면 주판실력이 좋아야
조국 근대화의 역꾼이 되기위해 한자와 더불어 주산은 초등학교 필수교육
한다고 우리네 부모님들이 굳게 믿던 시대였다. 우리에게 주산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교복을
입은 채 온 남,여 상고생들 이었다.난 날씨도 덥고 흥미도 없어 몇 일 나가다관두기를 두 어번 했다.그래서 지금도 주판을 놓는 실력이 없다.“떨고 놓기를 5원이요 9원이요……….. 8원이면?”하던
리드미컬한 선생님들의 강의음성이 들리는 것같다.매미소리 요란한 교실에서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빡빡머리이고 여학생은 모두 짧은 단발머리 차림으로 앉아 더위를 참아가며 수업을 받는 모습들이 그려진다.그 때는 오로지 자연에 몸을 맡겨야 했다.에어컨이라는 물건은 이름조차 생소했고
선풍기도 부유층에서나 쓰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었다. 부채도 없어서 비닐로 된 비료포대를
재활용하여 접어서 만들어 썼으니 말이다.
■ 애향단
동네마다 “애향단”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그 동네에서 최고 학년이 애향단장이 돼 방학 때에도
주기적으로 마을 청소를 하도록 했다.날씨가 더우니 보통 아침 먹기 전에 청소를 하게 되는데
우리 ‘높은한질’은 운동부락으로 소속 돼 있었으나 운동 본동네는 한 참 떨어져 있어 걸어가는데
30분 이상 걸려 지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예 참석을 안해서 개학 후에 선생님께 기압을 받기도
했다.지금 생각하면 동네를 사랑하는 맘으로 공동구역을 청소한다는 것이 참다운 사회생활을 하는
애향단 활동모습
기본이라 생각되어 정말 좋은 교육이었다 생각한다.
일본은 지금도 공동으로 마을 청소를 하고 있단다.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기집앞의 눈도
치우지 않아 법으로 치우도록 강제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에 초등학생들에게그런 교육을 한다면 아마도 교장선생님은 학교 운영위원들에게 야단만
맞을 것이다.자원봉사 실적서도 되도록 애들 고생 안시키고 대충 하거나 아예 허위로 실적서를
떼주는 것을 학부모들이 나서서 하고 있는 실정이니 분명 학부모들에게 문제가 있고 이런 결과는
결국 그 학부모들이 받게 될 것이다.
■ 노력동원
가을이 오면 학교에서 운영하는 농지에 가서 수확을 한다.어떤 반에서는 고구마를 캐기도 했는데 우리 반에서는 학교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해촌뜰 복판에 경지정리 되어 중앙으로 흐르는
농업용수로를 따라 심어놓은 콩을 베어서 한 다발씩 어깨에 메고 왔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도랑 가에 콩을 심은 것은 주인 없는 땅이기에 학생들을 동원해 농사를 지었던 것 같다.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돈을 만들어 학교 비품도 사고 도서실에 책도 사고
그랬다.
원시시대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체조건에 맞는 ‘먹이활동(?)’을 해야 하는 게 동물의 본능이고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현재보다 60년대는 원시시대와 더 가까왔으니
어리면 어린 대로 능력에 맞는 노동을 해야 했고 그것은 초등학생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학교 농장에서 보리베는 초등학생들(이 사진은70년대?)
4학년 이상 언니들이 중노동(?)에 동원 됐다면 어린 학생들은 경노동에 동원됐다.
학교 옆으로 흐르는 시냇가에 가서 모래를 퍼 나르는 일은 기술이나 큰 힘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저학년 동생들이 맡아 했다.당시에는 책가방을 갖고 다니는 친구는 반에 한,두명에 불과했고
거의가 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래서 ‘책보’라는 말을 많이 썼지 ‘책가방’이라는 말은 어른이나 애 할 것 없이 거의 쓰지 않았다. 그 ‘책보’의 보자기는 모래를 퍼 나를 때 유용하게 쓰였다.
작은 양이지만 “1인당 5번” 목표를 줘서 논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며 개천가에 쌓인 모래를
퍼다가 운동장에 뿌려 나가면 여름 장마철에도 운동장에서 뻘물이 튀기지 않게 된다.
학교 옆 개울 얘기가 나오니 또 다른 생각이 난다.
지금은 복개천으로 바뀌어 버려서 흔적도 없지만 그 때는 조례저수지에서 흘려 보내는 물을 담아 해촌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해 주기도 했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씻어 흘려 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개천은 무척 맑아 한가할 때는 엄마들이 고동을 잡기도 했고 재첩이라 불리는 ‘갱조개’도 있었고
뻘 밭에서 사는 ‘칼조개’도 많았다.지금으로 말하자면 건강진단인 듯한 의사 선생님이 보는
‘신체검사’가 있었다.당시엔 치약과 칫솔이 보기 힘들었고 양치질은 오로지 소금으로 했으니 어린 우리들이 짠 소금으로 양치질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바꿔 말하면 양치질 하는 애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의사 선생님이 하는 ‘신체검사’ 전 날은 선생님께서 우리 반 전체를 시냇가로
데리고 가셨다.그리고는 모래로 모두 이빨을 문지르게 했다.그동안의 묵은 치석을 모래로 씻어
내는 것이었다.또한 작은 돌멩이로 손과 발의 때를 밀어내도록 했다.때가 불지 않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돌로 문지르면 때는 벗겨지지 않고 피가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신체검사시 의사선생님들로부터 ‘더럽다’는 인상을 줄여보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우리 고사리 손 학생들은 쓰임새가 많았다.
한 학년 해봐야 3개 반이고 1개 반 인원이 60명 정도 됐으니 180명 정도가 한 학년이다.
언젠가는 고향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가뭄’을 ’한해’라고도 했다.
논이 거북이등처럼 말라서 모를 심지도 못하고 모는 못자리에서 웃자라 키만 삐쭉 크고 허약했다.
농사에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들에게는 심각한 생존의 문제였다.
그 때 우리들은 호미를 하나씩 들고 등교하여 밭처럼 마른 논에다 호미로 파고 모를 심어 주었다.
하매나~~ 하고 기다려도 비가 오지않자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급하게 모를 심고 주전자로
포기마다 물을 줘서라도 키워보자는 절박함이 있었다.늦은 봄이자 초여름 노력동원이었다.
당시에는 농약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해충들이 득세를 하면 구제할 방법은 더디지만 사람 손으로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심할 때는 동네 어른들도 동원되어 송충이를 잡았지만 어린 우리들도 동원되어 집게나
나무젓가락으로 일일이 나무에 붙어 있는 송충이를 잡아 밟아서 처리하거나 봉투에 담아 한꺼번에
태우기도 했다.난 조례저수지 뒷산에서 송충이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한여름의 노력동원이었다.
간접적이지만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쥐 잡기’에도 동원됐었다.
정부에서 쥐약을 전 가구에 나눠주고 어느 일정한 날에 쥐약을 놓도록 한다.
어른들에게만 시키면 말을 잘 안들을 경우가 생기므로 학생들에게 잡은 쥐 꼬리를 잘라 오도록
했다.숙제처럼 가져가야 하니 틀림없이 쥐약을 놓아야 했다.지금도 생각난다.
겉에는 쥐가 그려져 있었고 한 해 동안 쥐가 먹어 치우는 곡식이 얼마라는 홍보문귀가 새겨져
있는 봉투 속엔 초록색 쌀이 들어 있었다.내가 태어난 하동 화개에는 지리산 자락이라서 여우가
많았었는데 ‘쥐 잡기 운동’을 하고서부터 전멸을 해버려 지금은 한 마리도 없다고 했다.
아마도 쥐약 먹고 죽은 쥐를 여우가 먹고 같이 죽은 것 같다.학교 농지에서 추수하는 것과 같이
했던 가을철 노력동원 이었다.
겨울철에는 고학년을 위주로 ‘토끼몰이’를 간다. 눈이 쌓여 있으면 더욱 좋았다.
토끼가 눈 때문에 잘 못 뛰기 때문이다.토끼는 앞다리가 짧기 때문에 쫓으면 십중팔구 산
윗 쪽으로 달아 난다,그래서 산 위 쪽에는 배구네트를 펼쳐놓고 몇 명이서 몽둥이를 가지고서
지키고 있고 아래 쪽에서 많은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교실에서 들고 나온 양동이나 세숫대야를
두드리면서 쫓는다.굴 속에서 얌전히 있으면 되는데 간이 적어 놀라기를 잘하는토끼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와 도망을 가다가 여지없이 배구네트에 걸리게 되고 몽둥이 세례로 최후를 맞는다.
학생들에게는 체력 단련이요,선생님들에게는 귀한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60년대만 해도 순천에 눈도 제법 왔고 냇물은 바닥까지 얼 정도로 추웠는데 요즘은 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요 얼음도 살얼음 정도로 끝난다.
지구 온난화는 분명한 것 같다.
지금도 학생들이 자기 교실은 자기들이 청소하지만 우리 때도 그랬다.
차이라면 청소도구가 빈약했다는 것이다.마당을 쓰는 빗자루는 대개가 싸리나무나 대나무 곁가지
또는 동네 골목길이나 마당 가에 심었던 빗자루 나무 말린 것으로 직접 만들어 썼다.
실내 빗자루도 집에서 수수나무를 엮어 썼다.걸레도 집에서 만들어 갖고 오라고 하면 어머니는
버리는 헝겊을 사용하여 사각형으로 꿰매 주셨다.
이 걸레를 여럿이 일렬로 정열하여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요이 땅’하면서 경주하듯 쫙 밀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청소가 끝난다.겨울에는 걸레를 빨기 힘들므로 늦가을에 각자 교실 바닥을
광 낼 수 있는 물건 하나씩 가져오라고 한다.
제일 좋은 재료는 양초였으나 귀했고, 아주까리(피마자) 씨나 유동나무 열매를 주로 가지고 간다. 까만 껍질을 벗기면 기름진 하얀 속살이 나오는 피마자 씨나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역시 기름이
많은 알맹이가 나오는 유동으로 남학생들이 교실 바닦을 골고루 발라주면 여학생들은 마른 걸레로
그곳을 열심히 문질러 광을 낸다.이렇게 광을 내 놓으면 바닥이 반질반질 하고 미끄럽다.
개구장이들은 장애물이 없는 복도에서 미끄럼을 타다가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광을 내 놓으면 겨울에 차가운 물에 걸레 빨 일 없이 쓸기만 하면 된다.,
■ 여러가지 대회
방석우 교장 선생님은 유명한 교육자셨다.현재는 그분의 소박한 공적비가 동문쪽에 세워져 있지만 마른 체격에 키가 꽤 크셨던 모습과 자전거로 출퇴근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일제시대 때 소학교 출신이었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은 박사 못지않으셨다.특이한 행사로 ‘농산물 품평회’와 ‘식물이름알아 맞추기 대회’가 있었다.
또 보편적인 행사로 소방서에서 매년 주관하는 ‘불자동차 그리기 대회’와 ’과학전람회’ ’백일장’
’사생대회’등이 있었고 체육행사로는 매년 봄 순천 남국민학교에서 벌어지는 ‘학교대항 체육대회’가 큰 행사였다.
‘농산물 품평회’는 집에서 기른 농산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갖다 내면 심사를 해서 상을 주는
행사였다.우리 집에는 밭이 없어 ‘한 점씩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성화가 무척 부담스러웠던
행사였다.그러나 볼만한 게 참 많았다.뭐든 보통 것보다 큰 것만 전시됐으니 말이다.
엄청 컷던 무우와 고구마.그리고 어린이 세 명이서 들어야 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호박이 생각
난다.
‘식물이름 알아 맞추기 대회’는 참 이색적인 대회였고 난 그 덕분에 지금도 나무나 화초 이름을
많이 아는 측에 속한다.일단 조례국민학교 특색은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폭 5미터 정도로 화단을
조성했다.바닥에는 금잔디가 깔려 있는데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잔디만 잔디인줄 알았다.
골프장에 깔린 잔디는 잔디가 아니고 전라도 말로 “짠두박”이라 불리는 풀로만 알았고 잔디가
깔렸다고 하면 당연히 금잔디인 줄 알았다.머리카락 같았던 금잔디는 정말 쿠션이 좋은 잔디였다.
앉아도 엉덩이에 풀 물이 안들었었다. 화단에는 갖가지 나무와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식물원처럼 모두 명찰을 달고 있었다.
우리나라 4대 정력제 중 하나인 구기자도 있었고 아카시아 씨앗처럼 생긴 결명자 밭도 있었고
향기가 끝내주는 치자 밭도 있었다.‘식물 이름 알아 맞추기대회’는 일정기간을 주고 학교 주변의
식물을 외우도록 한다.그리고 대회 날에는 운동장 가에 책상을 펼친 후 하얀 종이로 덮고 그 위에
식물의 줄기나 잎을 진열해 놓고 각각 번호표를 붙여 놓는다.
학생들은 나눠준 답지에 씌여진 번호에 맞는 이름을 써 넣으면 그것을 채점하여 상을 주는 것이다.
100개의 식물을 전시하는데 내 기억으로 80개~90개를 맞췄음에도 상을 타지 못했었다.
우리들의 모습('책보'를 가지고 다니던 시절)
또 1년에 한 번씩 과학작품전시회라는 것을 한다.
과학적인 아이디어로 도구를 만들거나 관찰 일기를 써서 제출하면
그것들을 진열해 놓고 선생님들이 평가를 하여 상을 주고 우수작품은 도 대회를 거쳐 서울
전국대회까지 가게 되는데 지금도 방식은 다르지만 학생들의 과학 작품중 매년 최고의 아이디어를 선정하여 대통령 상을 주고 있다.
난 가는 대나무 통에 구멍을 뚫고 대막대기를 실로 감아그 구멍을 통해 감았던 실을 갑자기
당기면 그 회전력에 의해 막대기에 부착됐던 날개가 휭~ 날라가는 장난감에 힌트를 얻어
좀 굵은 대나무에 분리되는 나무날개 대신 고정된 막대에 부채를 달아 당기면
회전하는 힘에 의해 부채가 부쳐지는 “간이 선풍기”를 출품하여 ‘가작’이라는 상을 받았다.
매년 실시되는 소방서 주관 ‘불자동차 그리기 대회’는 학교 대표로 몇 명씩 뽑아 순천 시내로
버스를 태워 보낸다.선발된 애들은 자랑스럽게 화판을 메고 왕자파스를 화판 포켙에 넣고
선생님을 따라 의기양양하게 버스를 탄다.
그 때만해도 버스 한 번 타 보는 게 소원이었을 때다.평상시 버스를 탈 일도 없었지만 돈이
귀하던 때라 아무리 멀어도 걸어 다녀야만 했던 시절이었는데 그것도 학교를 대표하여 공짜로
버스를 탄다는 게 무척 부러운 일이었다.내 기억으로는 광만이와 도학이가 자주 상을 탓고
난 딱 한번 상을 탓다. 백일장이나 보통 사생대회도 광만이의 독무대였던 기억이다.
물론 나도 몇 번 상을 탓는데 ‘입선’정도에그쳤다.
축구보다 배구가 유행했었다.
봄이면 실시되는 학교대항 체육대회는 항상 순천 남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순천시에서 가장 큰 학교가 남국민학교였고 그 때는 전교생이 가서 응원을 한다.’남교오거리’를
그런 체육대회 때문에 알았다.커다란 남국민학교 운동장 둘레로는 큰 장대 두 개에 묶은
하얀 광목천에 “필승”이라는 글씨와 함께 독수리나 호랑이 그림이 군부대 문장처럼 크~게
그려져 있고 아랫쪽에 학교 이름을 새긴 깃발 아래 서 열심히들 응원을 한다.
학교마다 가져온 북은 필수품이요 악대가 있는 곳에서는 밴드연주로 옆의 학교 학생들의 기를
죽인다.우리 순천 조례국민학교는 악대가 없는 데다가 학생 수도 적어 선수 층이 얇았다.
학교를 대표로 하는 선수들 모습이 자랑스럽다.
가난하여 밥 먹기도 힘든데 누가 운동을 하겠는가?
내 기억엔 종합성적이 상위에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촌 학교인
도사국민학교와 등위 비교가 주된 관심사였다.
■급식빵
난 지금도 빵 중에서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이 제일 맛있다.
학교 급식 빵으로 나온 것이 구수한 옥수수 빵 이어서 일까?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에 교회에 가면 당시에 귀했던 사탕이나 떡을 나눠 줬다.
어느 핸가 순동교회를 다녀온 누나는 속에는 은색 봉투가 들어있고 겉 상자에는 온통 영어로
씌여진 선물을 하나 가져왔다.형이 읽어 보더니 ‘토마토 가루’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기독교 단체에서 보내준 구호식품인 것 같다.
어느 날 집에서 그것으로 죽을 쒀 놓았는데 아무도 안 먹었다.
당시에는 토마토라는 과일 자체가 보기 드물었는 데 그 가루야 당연히 처음 보는 것이었다.
토마토 자체도 난 비위에 안맞아 잘 먹지 않았는데 그저 곡식 가루인줄만 알고 죽을 쒔으니
지금의 캐찹 수준이었지 싶다.지금도 난 캐찹을 안먹는데 그 때 그 음식이 비위에 맞았겠는가?
냄새도 싫었다.
미국에서 못사는 나라 원조의 일환으로 밀가루,옥수수가루,토마토 가루를 우리나라에 많이
줬던 것 같다.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구호품을 나라 산업발전의 기반을 닦는 데 썼다.
자라나는 학생들은 굶길 수가 없으니 빵을 만들어 공급을 하게 해줬고 밀가루는 사방공사나
마을 공동작업을 하는 사람에게만 일당으로 나눠주도록 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하신 것이다.
옥수수 빵은 처음엔 얇고 큰 정사각형으로 나왔다.담임 선생님마다 달랐지만 사각형의 빵을
4조각으로 나눠 매일 전체 학생이 같이 먹게 했던 분도 있었고 어떤 선생님은 2등분 하여
분단 별로 하루걸러 먹도록 하신 분도 계셨다.
5학년 때부턴가? 지금의 카스테라 모양을 닮은 둥근 모양을 한 빵이 공급됐는데
난 키가 크다는 이유로 매일 빵을 교무실에서 타오는 당번을 했다.
하지만 훔쳐 먹으면 안되는 줄 알고 단 한 번도 몰래 먹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억울하다.
한두 번쯤 노동의 대가로 훔쳐 먹어 볼만도 하고 큰 죄도 아닌 것 같은데…..
배짱이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급식 빵은 ‘음빠샤’라 불리던 짐자전거에 많은 상자를 싣고 아저씨가 배달을 했다.
교무실 옆 자료실로 들어간 빵은 반 별로 분배를 하게 되는데 그 때부터 나는 구수한 냄새는
먹을 게 부족했던 당시라 애들을 환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급식 빵에 대한 추억과 사연은 각자마다 참 많을 것이다.
집에 있는 어린 동생에게 줄려고 먹고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감춰가는 애들도 있었고
또 그럴려고 아껴둔 빵을 훔쳐먹는 얘들도 있었다.남의 빵을 뺏아 먹는 친구도 있었고,
꼬임에 속아 빵 따먹기 게임을 하여 약은 애들에게 허망하게 뺏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도 힘있는 애들에게 잘보일려고 상납하는 사회성이 강한 친구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강요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른 간식거리와 바꿔먹은 애들도 있었다.
빵 급식이 있던 당시에만 있었던 추억이지 싶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 아프리카에서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보내주자는 운동을 건성으로
들을 게 아닌 것같다.땅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않은 100원짜리 동전 하나면 아프리카 얘들
하루 식사가 된다고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