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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기행(부안, 김제, 군산)
(2004.7.10(5.23)토 흐림)
이 명 철
7월의 싱그러운 바람은 우리의 가슴에 따뜻한 훈풍이다.
1년에 단 한번 가는 고창문인협회의 문학기행이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문운(文運)을 기원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빽빽한 일정(日程)이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이 이웃 부안(扶安)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자연사박물관(自然史博物館)은 지구의 생성과 기상학․천문학․동물학․식물학․지질학․고생물학․광물학․인류학 등 자연 그 자체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다.
‘자연사’란 내추럴 히스토리(natural history)의 번역어로, 이 말을 맨 처음 쓴 사람은 로마시대 말기의 박물학자 G.P.S. 플리니우스였다. 넓은 뜻으로는 살아 있는 표본을 다루는 자연사박물관으로서 동물원․식물원․수족관 등을 포함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것들은 자연사박물관과는 별개로 다루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은 1793년 파리의 왕립식물원이 개편되어 국립자연사박물관이 된 것이며, 영국에서는 1759년 개관한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으로부터 1880년 자연사 분야가 독립하여 설립되었다. 미국에서는 지질학자 J. 스미스슨이 미국 정부에 기증한 방대한 유산을 기초로 스미스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가 설립되고 그 부속시설로서 스미스슨이 수집한 8000점의 광물을 중심으로 해서 국립자연사박물관이 1903년 개설되고, 이곳에서는 5000여 만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또한 스위스 베른의 자연사박물관, 시드니의 오스트레일리아박물관, 하와이 호놀룰루의 비숍박물관 등은 지역의 자연사를 알리기 위한 박물관이다.
한국에는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이 1984년 개관되어 제주의 자연과 고유의 민속문화에 관한 자연사자료를 정리, 전시하고 있다.
이곳 부안의 자연사박물관은 개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화석과 수정 등 광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었다. 개인이 운영하기 때문에 몇 세 이상은 무료입장 같은 건 없었다. 더 서운한 것은 안내책자는 물론 설명도 전무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눈으로 보고, 써 붙여놓은 것을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고, 학술적 또는 문학적 깊은 의미 등은 제멋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나 상업적 영리목적에만 치우친 감이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으나, 우리 가까이 이런 박물관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위안을 삼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매창공원(梅窓公園)
매창(梅窓)은 1573~1610(선조 6~광해군 2)년에 38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조선 중기의 기생이자 시인으로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간 여인이다.
그녀의 본명은 향금(香今)이며, 자는 천향(天香), 호가 매창(梅窓)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고도 하였으며,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다. 부안(扶安)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룬 여인이었다.
매창(梅窓)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었으며, 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재(詩才)였다. 작품으로는 《추사(秋思)》 《춘원(春怨)》 《견회(遣懷)》 《증취객(贈醉客)》 《부안회고(扶安懷古)》 《자한(自恨)》 등이 유명한데, 이는 모두 스스로의 회한(悔恨)에 관한 글들이어서, 조선조의 여인, 특히 기생들의 뼛속에 사무친 한(限)을 읊은 것이 아닐까.
부안읍 봉덕리 공동묘지에 이 고장의 빼어난 여류시인 이매창의 무덤이 있다. 이 곳 부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을 공동묘지라 부르지 않고 특별히 '매창의 뜸'이라 부른다고 한다. 부안 사람들이 매창을 마음으로 아끼고 있다는 증거다. 매창이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던 너럭바위 금대(琴臺)가 있는 상소산 기슭 서림공원에는 매창시비가 있다. 그 당시 ‘이매창, 내변산의 직소폭포, 문장가 김구’를 일러 변산삼절이라 불렀다 하니, 이곳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同一視)한 화조풍월(花鳥風月)의 멋진 사람들이 아닌가.
― 이화우(梨花雨) 흩날릴제/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
매창이 그의 첫사랑 연인인 유희경을 그리며 읊은 시조다.
이 시는 서출 출신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의 애절한 사랑을 담고 있다. 이별의 슬픔, 사랑의 아픔, 삶의 외로움을 다정다감한 시인의 마음으로 구슬처럼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는 시이다.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명기로 유명한 그녀는, 유희경․이귀․허균 같은 당대의 명사 풍류객의 지극한 아낌과 사랑을 받았다. 매창! 그 아름다운 여인, 얼마나 심지가 깊고 절개도 곧았을까.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그의 시. 거문고를 벗삼아 사랑가를 부르다가 죽어간 여인. 그녀는 분명 그 시대의 명사(名士)였고, 조선조의 한 많은 여인이었다. 가사, 한시를 비롯하여 가무와 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다재 다능한 여류예술인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가곡원류에 60여 수가 수록되어 있고 작품집인「매창집」은 흩어져 버린 수백 수의 시를 아전들의 구전(口傳)에 의한 것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매창의 시재를 누구보다 아끼고 높이 평가한 사람은 바로 홍길동전의 허균이었다 한다.
매창의 무덤은 그 자손도 아닌, 시를 사랑하는 부안사람들이 400여 년간이나 지켜 왔다.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다 실패하여 사제지간이 된 것과는 달리 매창은 오늘의 우리에게 남녀간에는 자신을 한 걸음 물러서서 피차 소중히 아껴주어야만 정(情)이 곱게 간직된다는 교훈을 주는 증취객(贈醉客)이라는 시 한 수를 전하고 있다.
― 취한 손이 마음 두고 내 치마 잡아/ 당기는 손길에 비단치마 찢어졌네/ 그까짓 비단옷 아깝지 않으나 /두려운 건 그대와 나 정 끊어짐이라네 ―
여자에게 절제와 인내와 속박이 요구되던 시대에 매창은 기생이라는 신분으로 오히려 자유로운 삶 속에서 마음놓고 자기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한국적 여성 특유의 인고의 성정이 풍만한 작품들을 썼다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묘 앞 비석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였다. 공원에 세워진 시비(詩碑)를 읽고, 다음으로 가는 코스에서 문우들은 매창이 그리운지 위의 두 번째 시를 읊으며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신석정(辛夕汀) 고택(古宅)에 갔다.
전북 기념물 84호로 지정되어 있는 데도 관리는 너무도 허술하였다. 메모한 그대로를 적어보자.
시인의 고택은 낭자머리 잘라내고 파마머리를 위한 비닐 포를 쓰고 있었다. 뒷뜰에는 깨꽃 피어 시름을 달래는데, 앞뜰에는 신우대나무 무성하다.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곰팡이 핀 벽지가 옥(獄) 중 춘향 모(母)의 집을 연상케 하는구나. 먼지 퍼석한 마루 위 문지방 머리에 청구원(靑丘園)이란 현판이 마당에 사람 발자국 닿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리랑문학관
살아있는 작가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은 아직 유품이라 할 수 없는데도 심지어는 볼펜까지라도 전시되어있었다.
2000년 9월 김제 부량면 벽골제에 아리랑 문학비가 제막된 데 이어, 아리랑문학관은 부량면 용성리에 2003년 5월 지상 2층 규모로 개관했다.
문학관 1층에는 『아리랑』의 발원지인 김제의 전경과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를 소설 진행의 시간대에 맞추어 역사를 시각적으로 총정리한 영상자료들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중앙에는 작가의 육필원고 2만매가 직립 전시되어 있어 『아리랑』의 시작과 끝의 육필원고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학관 2층에는 『아리랑』의 집필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취재수첩들과 작품구성 노트 등, 각종 취재도구, 집필 당시 사용했던 필기구, 취재사진 등 작가의 혼이 배어 있는 89종 350여 가지의 물품들을 전시해놓았었다. 그리고 문학관 2층의 제3전시실 맞은편에는 영상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방문객들이 영상으로 작가를 만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또한 그 장소에서 작가와의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되어있었으나, 토요일 오후여서 우리 일행에게는 거기까지의 행운을 얻지 못하였다. 아리랑문학관은 『아리랑』에 담긴 뜨거운 혼과 감동을 온전히 보존하고, 작품과 작가정신에 대한 생생한 만남을 선사함으로써 살아 있는 문화 체험의 장이 될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폐교를 활용하여 이 지방 많은 문인들의 작품을 전시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채만식 문학관
소설가 백능 채만식(1902~1950)은 임피면 축산리 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중앙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의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였다.
1925년에 단편 「세길로」가 「조선문단」에서 추천을 받았고 그후 지속적으로 단편과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는데 1937년에는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편소설 「탁류」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45년 4월에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으며 지속적으로 글을 쓰시다가 건강을 잃게 되었는데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일주일전에 돌아가셨다.
군산시에서는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금강 하구 둑의 서쪽 옛 위생환경 사업소 부지 내에 채만식 문학관을 건립하여 군산문학의 기념비로 삼고 있기도 하다.
채만식 선생은 탁월한 풍자 작가였다. 그는 처녀작 [과도기]를 시작으로 하여 1950년 6월 17일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70여 편의 단, 장편 소설과 25편의 희곡 작품, 상당수의 콩트와 평론 등을 남긴 다작의 작가였다.
작가 채만식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인 카프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한때 동반자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채만식 선생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깊은 비판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풍자 정신을 구사하였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이 풍자는, 부정적인 인물을 찬양하고 긍정적인 인물을 희화화시킴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날카롭게 야유하며 비판한 것이다.
그는 치숙이란 단편소설에서, 일제 강점기의 현실 적응적 생활관과 사회주의 사상적 삶의 방식과 갈등, 지식인이 정상적으로 살수 없는 사회적 모순과 노예적 삶의 비판 등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도 친일에 대하여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백릉문학상’ 추진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고, 그를 지원하는 모든 활동도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유족회 등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친일 행각은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 실천문학 등 문인 단체에 이르기까지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문인 42인 중 한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의 친일 행적은 1938년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확인된 친일 문학작품만 13편이며, 친일단체에 가입해 몸소 친일활동까지 했던 반민족 범죄자란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개인적 비판이 아닌 ‘백릉 문학상’ 등, 반민족 친일문인에 대한 기념이나 미화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친일 잔재 청산을 넘어서, 이후에도 반민족적 반역사적인 일들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라 하고, ‘친일파 채만식은 분명히 ‘민족의 죄인’이라는 반성의 글을 남겼으나,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주장이고, 따라서 ‘그 반성문 하나로 그의 반민족적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고창의 미당문학관과 채만식문학관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고창의 문인들이 군산의 채만식문학관에서 세미나를 하면서, 미당의 친일 시를 미당문학관에 거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12편 모두 걸게 되었다.”는 이사회(理事會) 측의 말에 “백 편에 일 편의 비율로 걸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야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요, ‘오십 보 백 보’다. 단 한 편의 친일 시만 걸어놓아도 이미 미당문학관은 우리가 존경하는 순수한 미당문학관이 아니다. 훼절(毁節)한 여인이 열녀가 될 수 없고, 한번 반역한 자가 충신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채만식문학관에 그의 친일 시가 걸렸던가?
군산의 문인들은 채만식 문학의 길을 자연스럽게 년대(年代)별로 처리하였고, ‘억압과 탄압의 시기는 풍자 등으로 위기를 넘긴 것’으로 여운을 남겨 둠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판단의 몫으로 남겼다. 이러한 절묘한 수를 읽고서도, 남의 문학관에서 우리들끼리 조삼모사(朝三暮四)를 하고 있으니, ‘정구죽천(丁口竹天)’이라 아니할 수 없어 껄적지근한 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미당에 대한 지나친 추앙이나 미화, 찬사의 말이, 현실에서는 오히려 미당을 깎아 내린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면될 수 없는 눈앞의 현실에 급급한 우리의 현실이 답답할 뿐이었다.
우리는 철새도래지로 갔다.
철새는 없고 하구 둑의 물결만 잔잔한데, 전망대에 올라 멀리 충남의 서천 땅까지 바라보니,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서산에 지는 해를 차창으로 바라보며, 우리 문우들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고인돌휴게소에서 다시한번 우리 문우들의 우정을 다지는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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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행문이 살아 숨쉬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서정주, 채만식 선생들과 같이 슬픈 역사가 낳은 어설픈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 몇 십년만 지나도 매창이라는 인물처럼 기억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회자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름다운 글이 꼭 그 만틈 훌륭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청산되지 않은 어설픈 천제들. 청산의 끝이 어딜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