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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B Joshua 조슈아 원문보기 글쓴이: 나무
기도의 은사, 방언
윤경학교수(실천신학)
들어가는 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기도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기독교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신 3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인도하심을 따라 진행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각 위격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완성해 나가셨다.
그 하나님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 성령 강림 가운데 나타난 이적 중 방언을 말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방언뿐만 아니라 방언통역, 예언, 신유, 영분별 등의 은사들이 신약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두 가지의 상반적 입장이 있는데, 은사 중지론을 취하는 사람들과 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방언에 대한 입장 역시, 방언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과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 방언이 성숙한 단계라고 믿는 사람, 방언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 네 부류로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은 기도의 은사이다.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으로 기도하기 위함이다(고전 14:2). 우리는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전혀 다른 차원의 기도생활을 하게 된다.
필자는 여기서 신앙과 삶에 대한 유일한 표준인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방언에 관한 답’을 찾아 그 진리를 정립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방언의 유무를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언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영의 기도’로서 그것을 믿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어떤 유익을 주는지 그 중요성을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언의 필요성과 그 가치를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방언의 의미와 종류에 대하여, 다음은 방언이 성장하는 단계에 대하여, 그 다음은 방언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하여, 그리고 방언을 받는 원리와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법에 관하여 서술한다.
Ⅰ. 방언의 정의와 종류
신약성경에는 방언(ϒλῷϭϭα, διάλεϰτος)이란 용어가 50회 정도 나오는데 사용되고 있는 범위가 다양하게 쓰여 “혀”의 뜻으로 15회 사용되고 있고, “지방어”(외국어)이란 뜻으로 25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음부에서의 혀로(눅 16:24), 한번은 불의 모양을 회화적으로 표시할 때(행 2:3), 또 한번은 행함에 대조되는 뜻으로(요일 3:18),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번이나 인종적 집단의 뜻으로 사용 되고 있다.
특별히 “지방어”의 뜻으로 사용된 예를 찾아보면, 마가복음 16:17에 “새 방언”이란 말로, 사도행전 2:4에 “다른 방언”이란 말로, 고린도전서 14:22에서는 “방언”이란 말이 정관사와 함께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고, 고린도전서 12:10에서는 “각종 방언”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방언”이란 용어는 “말하다”(λαλέω)란 동사와 함께 여격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전에 나타난 의미를 보면, 아른트(Arndt)와 깅그리히(Gingrich)는 방언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말하는 기관의 혀, 둘째
외국어, 셋째 종교적 황홀 속에서 말하는 흩어진 말이라고 하였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의 종류에 대해서는 지방언어로 보는 견해를 가진 바네스, 헨리, 아이론싸이드, 랑게, 렌스키, 라이스 등이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황홀경에서 나온 흐트러진 언어의 조작으로만 보는 길무어, 버크레이, 라크햄 등이 있다. 후자의 견해보다는 전자의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많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방언어인 외국어와 황홀경에서 나온 흐트러진 언어의 두 가지로 본다.
필자 역시 고린도전서 13:1에 기록된 “사람들의 방언과 천사들의 방언”에 근거하여 두 가지의 방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란 성령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셔서 오로지 그들에 의하여 말해지는 지상(사람의 방언, 외국어), 혹은 천상(천사의 방언)의 언어이다. 말하는 자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방언을 듣는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대인방언), 하나님을 대상으로 비밀을 말할 수 있다(대신방언).
대인(對人) 방언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났던 방언의 현상으로 성도 자신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기도하였지만 듣는 자들에게는 자국어로 들리게 되는 역사이다. 이것은 특별한 통역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여러 나라의 말로서의 방언이다.
사도행전 2장 4-12절에 보면 오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적어도 15곳의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특히 각자 그들의 “난 곳 방언으로” 알아들었고, 10장 46절에서도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알아들었다. 이것이 대인 방언의 역사로서 요즘도 선교지에서 간혹 이 역사가 일어난다는 기록이 있다. 데이브 로버슨 목사는 그의 전도사역에서 불신자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19번이나 있었으며, 그 때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1906년 아주사 부흥에서도 한 어린 아이가 하는 방언을 들은 유대인들이 와서 그 소녀가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변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인 방언은 불신자에게 주는 표적으로(고전 14:22) 결코 배운 적이 없는 언어들로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이며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대신(對神) 방언은 하나님만이 알아듣는 기도이다. 이 “하늘의 언어”는 성령께서 나의 영(spirit) 가운데 말을 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 근거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 기록된 방언의 기사로서, 특히 14:2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하였다. 이 방언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만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말하는 초자연적인 수단으로서 ‘영의 기도’이다(고전 14:14, 15).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우리 안의 성령님에 의해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을 주시고, 우리는 우리의 영에서부터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며 기도하는 본인도 알 수 없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께 하는 대신 방언이다. 이는 오직 방언통역의 은사가 없이는 전혀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단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신성한 비밀이기 때문에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방언은 기본적으로 성령님께 속한 초자연적인 수단으로서의 신비한 영적 현상이다. 그것이 지상의 외국어이든 하늘의 말이든 언어의 능력과는 관계가 없고,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말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오직 영(spirit)으로 말하는 신비한 영적 은사로서 사람의 마음(mind)이나 지성은 아무관계가 없으며, 인위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고전 12:11).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지성, 이해력은 활동을 정지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의 은사 방언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를 가지는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신령한 은사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Ⅱ. 방언의 성장과정
방언에는 영적 세계가 발전하는 세 가지의 단계가 있다. 방언의 초보단계, 깨달음의 단계, 예언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높은 단계는 방언의 기도를 멈추지 않고 매일 수 시간 동안 실천하는 자에게 영적 발전을 통해 나타난다.
1. 방언의 초보단계
처음 방언이 열려지면, 혀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혀가 탄력을 받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아주 단순한 언어이다.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슨 방언인가?’라고 의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그대로 믿어야 한다. 방언기도가 단순한 언어를 반복하고 있지만, 의미는 다르며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 올라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4:2).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신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신다”(롬 8:26). 방언은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간구하고 있다. 초보단계를 빨리 벗어나려면 방언기도를 끊지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령께서 간구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기도한 후 우리 자신의 마음이 기쁨과 안식, 그리고 평안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사 28:11,12).
2. 방언의 통변단계
체험적으로 방언을 계속하다가 보면, 내 안에 영감이 쌓이게 되어 그 어느 때인가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나의 방언 기도가 감이 계속적으로 와서 마음에 문득 생각들을 통하여 이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지만,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방언도 들으면 말로써 이해가 되는 것이다. 방언통변은 성령님께서 우리 영을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시는 영감이 사람의 마음(의식)으로 이해가 되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이 지나가는 것은 지금 성령께서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어서 무엇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수십 명을 통역하다 보면 다 그들의 사정대로 통변이 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는 방언기도의 통역에는 공통된 영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방언통변은 방언과 짝이 되는 은사이다(고전 12:10, 14:13).
방언기도의 내용을 정리하면, 주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과 감사가 가장 많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고 있는-알게 모르게 지은-죄를 고백(회개)하는 것과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간구(중보기도 포함)하는 것과 말씀을 따라 신앙고백으로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하는 신자에게 명하는 말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통역의 은사는 성령의 중보적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제공하며, 개인의 덕을 세운다.
3. 방언을 통한 예언단계
방언이 깊어지게 되고 성장하게 되면, 자신의 방언기도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이, 방언기도 중 언젠가 입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이 돌발적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것은 우리 속에 가진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말이 나와 우리의 혀로 들리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예언의 시작이다. 이 예언의 말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듯이 일인칭으로 나온다. 곁에서 이런 역사를 보면, 같은 사람끼리 한 사람은 하나님이 말하듯 하고 다른 사람은 꿇어 엎드려 듣는 것을 보면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예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고전 14:4)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며(고전 14:3), 책망하여 판단을 주고 마음에 숨은 일을 드러내어 회개시키는 성령의 은사이다(고전 14:24). 믿음으로 예언할 때 신자가 권면 받고 안위 받아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다(롬 12:6).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운다면,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워 교회를 더욱 굳게 하며 든든히 세우는 역할을 한다(행 9:31).
“방언기도 가운데 예언의 단계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의 방언기도에 대하여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를 경험하여 알게 된다.
때로 내가 하나님께 질문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물음에 대하여 귀찮게 여기시지 않고 언제나 말씀해 주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얼마만큼 마음을 열고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깊이가 다르고, 깨달음에 대한 깊이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예언의 단계에서 언제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그 궁금한 것을 가지고 다시금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기도를 통하여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Ⅲ. 방언의 필요성과 가치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신자에게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방언기도가 반드시 필요한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인 방언은 신자의 신앙생활에 매우 주요한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방언 기도의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
방언은 신자가 자신의 속사람 영혼을 세우기 위한 기도의 은사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에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다.(고전 14:2).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 덕을 세운다”라고 하였다(고전 14:4). 여기 “덕을 세우다”라는 말로 의역된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라는 동사는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건축가로서 교회를 건물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고전 3:10-17). 모든 신자는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서 방언은 그 심령에 건물로서의 신령한 집을 든든하게 세운다는 것이다(행 9:31, 유 20). 따라서 ‘덕을 세우다’ 말은 방언을 지속적으로 하면 심령의 성전이 견고하고 힘 있게 세워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행 9:31).
다시 말하면, 방언을 계속적으로 하면 성령의 지속적인 도우심으로 비밀을 말하는 심령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며(고후 3:17-18),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한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것이다(엡 3:16). 그래서 홍성건 목사는 우리에게 방언을 주시는 주된 이유는 “우리 자신이 견고하게 서서 힘 있게 교회를 섬기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외적인 환경을 다스리는 힘을 얻게 되고, 또한 내적인 여러 억압들-영적, 정서적, 정신적, 육신적인 병- 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였고, 케네스 해긴 목사는 “방언은 영적인 세움을 위한 신성한 도구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습관을 지속하라”고 그 중요성을 지적했다. 김동수 교수도 방언이 자신의 덕을 세우고 신앙성숙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방언은 신앙 성숙에 이르는 중요한 하나의 도구이다. 신앙 성숙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는 자가 되고 사람에게도 신실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각 사람의 신앙의 출발점이 같지 않다. 예수를 믿기 전에 인격이 많이 손상된 사람은 예수를 믿은 후에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하고, 경건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세속적 사고와 행동에 물든 사람은 그것을 버리는 과정도 필요하다. 곧 신앙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 신자가 된 후에도 각자가 여러 다른 방면에서의 치유와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방언은 치유와 훈련에 있어서 기도의 영역에서 하나의 도구가 된다. 신앙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예배생활, 말씀 훈련, 성도간의 교제, 고난의 훈련, 기도 훈련 등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데 방언은 이 중에서도 기도에 관한 것이고, 방언은 신자의 기도에 있어 단순히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성령께서 혀를 직접 통제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기도를 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내면 가운데 있는 죄를 방언 기도 속에서 고백하고, 용서하고, 악한 것을 물리치게 된다. 방언기도가 어떤 사람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데 좋은 도구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방언기도가 영적으로 강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필자는 다섯 가지로 정리하겠다.
첫째, 방언은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생각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세상의 영인 마귀가 역사하는 현장이다. 우리의 몸은 영을 담는 그릇으로서(고후 4:7), 사람의 의식 속에는 사람과 세상의 말을 통해 마귀가 주는 세상의 의식들(상, 생각)이 이미 들어와 있고, 계속해서 들어 올 수도 있다(요 13:2, 27). 사람의 의식은 세상의 의식이 들어오는 것만큼 세상(마귀)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영적 손해를 보고 마침내 썩은 것을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더럽고 악한 영을 소멸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방언기도이다(마 12:28; 롬 8:12-14).
성령의 감화로 방언을 많이 하게 되면 세상의 생각과 걱정이 점점 소멸되어(사 4:4) 머리와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것은 방언을 통해 성령의 감화로 세상 의식과 욕망을 씻어 주기 때문이다. 방언을 금하지 않고 계속하는 성도는 보이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는 둔해지고, 하나님과 그 말씀 순종에는 민감하여 바치는 삶에 헌신한다(행 4:32-35).
둘째, 방언은 눌린 모든 생각들이 놓임 받기 때문이다.
세상 생각과 사람 생각으로 들어와 마음속에 쌓이면 우리가 기도하려고 눈을 감아도 그 세상의 상이 계속 의식에 떠올라 기도가 되지 않게 된다.
이는 사람이나 세상 것에 눌려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기 때문이다(갈 5:17).
주님께서는 말세 때 방탕함과 술취함,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믿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눅 21:34-36).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어서 세상으로 기쁨을 찾아 끌려간다. 세상으로 갔다는 것은 죄악된 생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찾아온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단으로부터 온 사람의 눌린 온갖 생각들을 이기고 소멸하는 것이 능력 있는 방언기도이다. 방언기도는 음주와 흡연, 그리고 마약 등 많은 염려로부터 놓임을 주는 성령의 능력 통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방언기도의 축복이다
셋째, 방언은 우리 안에 영감을 저축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장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고 했다. 우리는 속에 선한 것을 쌓거나 악을 쌓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선한 분은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쌓는 것이 선을 쌓는 것이다(마 19:27). 날마다 하나님의 선한 것으로 우리 속에 자꾸 쌓아야 한다. 주님의 것으로 많이 자주 쌓을수록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귀한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 이렇게 되는 길이 바로 깨어 기도하는 방언이다. 방언기도는 내 영에 있는 세상의식과 사람에 대한 상처받은 의식 등이 소멸되고(사 4:4), 방언기도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의 영감이 많이 저축되어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영성이 쌓일 때 성령충만한 삶을 누리게 된다.
넷째, 방언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영감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계속 영적으로 실패하고 손해를 보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실상의 하나님 세계를 보고 따라가지 않고 이 세상의 허상만을 찾아 가기 때문이다(히 11:1,2; 고후 4:16-18). 허상은 다름 아닌 눈으로 보이는 것이며, 머리로 상상되는 것이고, 마음속에서 생기는 정욕과 욕심이다(요일 2:15, 16; 창 3:6). 그런데 방언기도는 눈을 감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하기 때문에 머리와 마음으로 오는 헛된 공상과 욕정을 소멸시키고 성령의 생각과 성령의 감동을 받게 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이미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세상 생각과 좋고 싫어하는 인정에 미혹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러나 늘 깨어서 방언으로 기도하며 자신을 깨끗이 준비한 심령은, 어떤 일이 생겨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아갈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는 방언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여 나아가고, 이 영적 감동이 있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다섯째,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방언을 지속적으로 경험한 많은 신자들은 방언이 다른 은사들을 끌어들이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방언을 금하지 말고 지속하라고 권한 것이다(고전 14:39).
케네스 해긴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 할수록 성령의 여러 은사들이 나타났으며, 방언이 다른 영적 은사들을 불러오는 문의 역할을 한다”라고 하였고, 은사사역자 오랄 로버츠 목사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고 “방언은 크리스천이 하나님과 깊은 차원에 도달하여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또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들을 성도들의 삶 가운데로 끌어내는 통로가 되어준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언어』의 저자 김우현 감독 역시 “방언은 모든 은사의 기본입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로이지요”라고 은사체험을 증언했고, 성령 운동자 옵살은 방언체험을 “신자들의 신앙유산을 신앙성장(성화)의 방법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하나님 체험”이라고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방언이 ‘자기 덕을 세운다’는 것은, 세상(마귀)으로 들어온 내면의 의식(죄)의 묵은 찌꺼기가 성령님의 직접적인 도우심으로 씻음을 통해 밖으로 밀려 나가고, 그로 인해 우리의 속사람이 구조조정 되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강해지며, 영적으로 충만함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는 방언기도의 내용을 살피면 입증된다. 김우현은 이와 유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방언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예언’이나 ‘영 분별’, ‘치유’ 같은 놀라운 성령의 능력들이 확장되는 것이다. 방언은 내 영에서 나오는 ‘생수의 흐름’(성령의 역사)을 훈련하는 가장 중요한 은사다. 그래서 처음에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30분에서 1시간 이상 창자가 꼬일 정도로 쉬지 않고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도 온갖 육신의 것, 상처, 쓴 뿌리, 정보 등으로 잔뜩 뒤범벅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겨내는 ‘보링’작업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이 맑아지고 더욱 강화되어 성령님이 주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며, 하나님의 임재에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나타나, 귀신이 떠나가고 상처가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나타난다.
2. 방언은 성도들의 연약함을 도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토록 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 27).
로마서 8:26-28에서 오로지 은사적 기도, 즉 방언기도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방언기도를 배제해서도 안 된다. 헬라어의 권위자 넬슨은 ‘성령이 인간의 말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라고 그 원의를 말하면서 “인간의 말”(articulate speech)이란 우리의 일상어를 가리키고, 계속해서 “탄식”(groanings)은 방언을 포함한다고 지적하면서 성령은 우리가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신다고 하였다. 김동수도 “말할 수 없는”이라고 번역된 ‘알라레토스’(ἀλάλƞτο)란 단어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은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는 인간의 말로 표현되지 않는 방언기도를 지칭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방언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기도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지하고 있지만, 육이 강하거나 약하여 기도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다. 또, 기도한다고 해도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잘 몰라 영적 무력감에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방언은 이러한 인간의 상황과 한계를 넘어 영이 강해지고, 성령으로 마땅히 구할 바를 간구하게 하는 은사인 것이다.
우리가 가장 연약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언을 통해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방언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여 그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요하다(롬 12:2).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눅 22:42, 요일 5:14). 그러나 성도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방언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까지도 간구하게 된다(많은 중보기도를 포함한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에(고전 2:10), 그 뜻대로 간구하도록 우리를 도우시므로 100% 응답되는 것이다. 이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고전 14:2).
3. 하나님을 높인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5-46).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는 수단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에 담겨진 내용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유함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를 찬송하고, 경배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외에도 방언의 유익은 너무도 많다. 로버츠 리어든은 방언기도의 유익을 7가지를 말한다. 첫째, 방언기도는 표적이다. 방언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둘째,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만든다. 방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소유한 강한 사람이 된다. 셋째,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을 만든다. 방언으로 영적인 사건들을 분별하는 데 한층 민감해진다. 넷째, 방언기도는 믿음을 굳게 한다. 방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굳은 믿음이 생긴다. 다섯째, 방언기도는 언어 사용에 신중한 사람을 만든다. 방언으로 성령님께 입을 복종시켜서 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 여섯째,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새 힘을 준다. 방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신선함과 활력을 잃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일곱째, 방언기도는 증인 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방언이라는 기도 언어로 세계 전도에 기여한다.
웨인 와드(Wayne E. Ward)는 『방언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에서 방언기도가 주는 9가지 유익에 대해 소개하였다. 첫째, 방언은 영적인 열정을 회복시켜준다. 둘째, 방언의 발견은 성도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성경연구의 동기를 제공한다. 셋째, 방언은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해준다. 넷째, 방언은 기쁨을 회복시켜준다. 다섯째, 방언은 교만한 마음을 부수어 버린다. 여섯째, 방언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게 한다. 일곱째, 방언은 모임 안에서 매우 활기 있는 친교를 이루게 한다. 여덟째, 방언은 성도를 열정적인 전도자로 만들어준다. 아홉째, 방언은 열정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이 외에도 방언은 마음(생각)으로 하는 기도의 한계를 넘어 보다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유익이 있어 영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방언의 많은 유익함 때문에, 그 중요성을 밝히 알고 있는 바울은 방언을 고린도 교인들보다 더 많이 말하였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현대교회에는 방언기도의 가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많은 신자들이 이 주제의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바울은 방언에 부여한 가치로 인하여 아마도 엄청난 양의 방언기도를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노라”(고전 14:5)라고 방언의 가치를 특별히 강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 유익을 주는 방언을 우리는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Ⅳ. 방언의 은사를 받는 원리
방언이 성도의 영적 신앙성장과 삶에 매우 유익한 기도의 은사라면 우리는 어떻게 방언을 체험할 수 있을까?
1. 방언의 은사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가복음 16:17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새 방언을 말하는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신실한 약속을 하셨다. 이 언약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시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믿는 자(행 2:1-4)와 고넬료 가정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 등 모든 무리(행 10:44-46)와 에베소 지역의 남자 12명의 믿는 자(행 19:6,7)가 방언을 다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된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지금도 진리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믿는 자는 거의 체험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에게 반드시 입으로 시인하게 한 후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할 때 그 마음의 소원대로 성취된 것처럼, 방언을 믿고 인정할 때 그 믿음이 실체화 되는 것이다(막 11:23,24).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형으로 첫째, 거듭나지 못한 사람, 둘째 방언을 받으면 광신자 같아 방언을 두려워하는 사람, 셋째 “방언은 초대교회만 있었던 것이지 지금은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냐,” “방언을 받아도 별거 아니더라는 데,”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에서 ‘꼴찌 은사’라는데” 등 방언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넷째 “마귀방언도 있다” 또는 “대학생선교회의 창설자 빌 브라이트나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도 방언도 못했는데 하물며 내가 방언을 못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라고 방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 다섯째 방언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지적하였다. 이런 다섯 가지 유형의 사람들은 자의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지 성경에 근거하여 믿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방언을 체험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필자는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은사집회 사역 시 먼저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은사 방언이 얼마나 중요하며 유익한지를 깨우쳐 준다. 이는 그들로 “성령에 나타남” 방언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도록 돕는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확신에 넘쳐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받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진실로 방언의 은사는 방언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어서 “아멘”할 때 임한다. 방언에 대한 부정적 태도만 바꾸고 믿기만 하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
2. 사모해야 한다.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고전 12:11)과 신자의 사모함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주권이 신자의 사모함을 통해서 나타날 때 체험된다. 사모하는 심령에 방언이 체험되는 원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사를 체험하려는 고린도 교회의 신자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고전 14: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가르쳤다. 여기 “사모하라”는 동사는 영어로 질투(jealousy)라는 말의 어원이다. 질투하듯이 열정적으로 연모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이 각 신자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방언 체험하기를 불타는 심령으로 갈망하라는 것이다. 오순절 방언체험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믿고 기다리며 열심히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방언의 은사는 영적 성숙도에 따라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초신자라 할지라도, 방언 받을 것을 열정적으로 사모하는 신자가 체험하게 된다.
열정적으로 방언을 사모하려면 먼저 방언을 마음으로 믿고 인정해야 한다. 성령이 지금도 방언을 주시며 그 은사를 활용하면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태도로 갈망하면 방언체험이 나타나게 된다. 방언을 경험하는 것은 신자가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방언에 대해서 보다 열린 마음, 열린 생각을 가진 신자가 체험하는 것이다. 방언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방언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사모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체험하는 신자가 종종 있기도 한다.
3. 소리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
방언을 사모한 심령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동으로 나아간다. 기도하는 신자가 필연적으로 성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신실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눅11:9-13). 오순절의 방언 체험은 120명의 무리가 ‘같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행 1:14, 2:1) 나타난 사건이었다.
매우 실제적으로는 방언의 은사를 설교하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집회에 참가하여 방언하는 사람과 같이 기도하면 방언을 체험하기 쉽다. 혼자 기도하다가 체험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 후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가장 많이 경험되었다. 중고등부 수련회나 그 외 부흥집회에서 설교 후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할 때 나이 어린 학생들과 직분이 없는 평신도와 초신자가 더 쉽게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방언은 성령이 혀를 움직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눌린 분위기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방언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 속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하려면 우선 소리부터 내야한다. 소리 없이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기도해야 방언이 나온다.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시 81:10)라고 했다. 입을 크게 열어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흔히 산 기도나 부흥회 때 통성기도하거나 찬송을 부를 때 방언을 받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은 같이 모여서 찬양과 기도를 할 때 소리를 내면서 혀가 움직이는 조건이 된다. 방언을 많이 하는 교회는 소리를 크게 지르는 교회들이다.
우리들 중에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분은 방언을 거의 못한다. 방언은 성령님께서 혀를 움직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혀를 움직이려면 입을 벌려야 한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혀를 움직일 수가 없다.
필자는 실제로 방언의 가치에 대하여 설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신자가 은혜를 사모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 안수를 함으로써 가장 많이 방언을 경험하는 현장을 목격했다(행 10:44-46, 19:1-7).
이제까지 방언을 받는 원리에 대해서 살폈다. 방언체험은 흔히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방언체험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체험은 아니다. 방언은 기본적으로 혀의 체험이다. 자신의 혀를 자신의 뇌가 통제하지 않고 성령이 직접 통제하는 체험이다.
하나님 임재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한 번도 하지 않은 신자의 경우에는 이 방언체험이 매우 놀라운 체험일 수 있다. 실제로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한 성도들은 신앙의 크나 큰 격려와 힘을 얻어 영적 성장과 더불어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는다.
Ⅴ. 방언 은사를 지혜롭게 활용하기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 문제로 교인간의 갈등과 혼란을 겪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2-14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면 방언을 어떻게 지혜롭게 활용해야 하는가?
1. 교회의 덕을 세우며 방언하기(고전 14:5,12,26)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을 하는 자들이 덕을 세우지 못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통변자가 없이 방언으로 축복하고 감사하며 자기를 과시하기도 하였고(고전 14:15-17), 예배에는 방언 위주의 신앙생활로 교회가 분열과 갈등과 무질서로 화평하지 못하였다. 강경호도 방언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방언하는 신자가 잘못하면 그 특권을 자랑함으로 교만해지기 쉽고,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시기함으로 인해서 파당이 생기기 쉬우며, 예배 분위기를 소란하게 하여 질서를 깨트릴 수 있으며, 모방하기 쉬우므로 거짓 방언 내지는 방언하는 척하는 거짓 신앙의 모습을 가질 수 있으며, 미쳤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방언하는 자는 통변하는 자가 없으면 잠잠하여야 하고(고전 14:28),
만약 방언을 한다면 다른 이들이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로’ 기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교회의 기도회 등 공모임에서 너무 큰 소리로 특출나게 방언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전 14:23).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신자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 경험을 하여 무관심 내지 부정적 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하는 우리는 바울이 간곡히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명심해야 한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이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의 은사는 결코 나쁘지도 아니하고, 무익하지도 아니하고,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결코 손해를 끼치지 아니한다(고전 12:7).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셔서 유익하게 하시지(눅 11:13, 마 7:11), 나쁜 것으로 주시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방언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2. 담임목회자에게 순종하기(고전 12: 28)
고린도교회는 은사들이 공동체 안에서 통제되지 않고 사용되어 혼란하였다. 오늘날도 이런 유사한 문제가 교회 내에서 종종 발생한다. 때로 방언이나 신유 등 나타나 보이는 은사가 없는 목회자와 방언, 능력, 신유 등의 은사를 받고 교만한 신자 사이에 영적으로 겪는 혼란과 갈등이 적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위하여 고린도전서 12:28에서 목회자와 은사를 받은 성도는 영적 위치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첫째 사도, 둘째 선지자, 셋째 교사(목사)는 에베소서 4:7-12에 보면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세운 영적 권세자들이다(롬 13:1-2, 히 13:17, 계 1:20, 2:1). 따라서 ‘그 다음’ 위치인 능력, 신유, 구제,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등의 은사자들은 목회자의 치리에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성도가 권위자인 목회자에게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과 같은 죄다(롬 13:2). 그래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만약 권세자인 담임목사가 방언의 가치와 중요성에 무지하여 방언하는 것을 금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반드시 순종하여야 하고, 자신의 골방에서 많은 시간을 바쳐 방언기도를 해야 한다.
3.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말할 것(고전 14:28)
“만일 누가 방언을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7-28)
여기서 교회란 교회건물(예배당)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이다. 초대교회에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건물이 없었으므로 교회건물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교인들이 공동으로 모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축복 기도를 하거나 가르치거나 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 14:16-19).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데 있어서 방언기도가 유익이 없다는 뜻이지 방언자체가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고전 14:4).
그러므로 방언은 개인적으로 영적 유익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만 하라고 한 것이다. 방언은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은사이다.
방언은 개인적인 기도의 은사이므로 혼자 골방에서 수 시간 동안 어느 정도 큰 소리로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꼭 닫힌 공간만이 아니라도 운전하면서, 산보나 운동하면서, 어느 곳에서나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은사인 방언을 지혜롭게만 사용하면 사람들에게도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그 은사 활용을 통해 신앙의 성숙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
신앙의 거장들 중에 많은 이들이 방언기도의 유익과 가치를 알았기에 생애 가운데 개인적으로 계속된 방언기도로써 많은 시간을 헌신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태백시 산골짜기에 ‘예수원’을 세워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를 주었던 대천덕 신부(1918-2002)는 방언이 성도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해주며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익이 있다고 하면서 “최소한 하루에 한 번 홀로 있을 때 당신의 새 언어로 크게 기도하십시오. 차안에서나 샤워를 하면서 그 밖에 어떤 장소에서도 그렇게 하십시오…당신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당신의 불쾌한 요소들은 사라져버리고, 항상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방언기도의 중요성과 생활 중에 지혜롭게 활용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나가는 말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은사 중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결론으로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14:39)고 하였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자가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무조건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하여 그 영적 유익을 누릴 수 있도록 선도해야 한다.
필자는 매일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한다(고전 14:15). 그러나 생각으로 하는 마음의 기도보다 영으로 하는 기도인 방언을 더 많이 한다. 그 이유는 방언은 “성령으로 하는 기도로서”(유 20) 이성으로 하는 기도보다 ‘온전하기’ 때문이고, 그 내용이 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요소가 매우 풍성하고, 우리 영혼 안에서 주님과의 교제를 막는 의식 쓰레기인 죄를 회개하여 씻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함으로써(중보기도 포함) 100% 응답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말씀에 따라 신앙고백을 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때문이다. 실로 방언기도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신앙의 유익이 있는 은사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 제5운동은 ‘기도운동’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 기도운동을 추진하는 이유는 기도 없이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교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 즉 사단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길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해 주셔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무엇보다 능력 있는 기도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엡 6:10-17), 이것이 바로 “항상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는”(엡 6:18) 방언이다.
따라서, 필자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방언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학생들의 생명을 살리려는 백석학원 설립목적의 성취를 위해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래서 방언기도운동을 확산하기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먼저 기도의 은사인 방언을 하는 학생과 교직원이 일 주일에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운동을 정기적으로 가졌으면 한다. 이는 영적으로 강해지는 신령한 그리스도의 용사가 되기 위함이고, 학원에서 역사하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하기 위한 목적이다.
다음으로 매주 방언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기독 신자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정기집회를 갖기를 제언한다. 이는 방언을 체험하여 신앙생활의 성장과 변화를 꾀하기 위함이며, 이때 설교자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신앙생활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끝으로, 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신앙생활에 있어 방언기도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우선되고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교육하며, 방언이 주는 영적 유익과 필요성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가르쳐서 방언의 은사를 믿고 사모하도록 하여 방언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방언경험은 하나님의 역사 체험과 같은 유익이 있어 신앙의 변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방언기도를 더욱 힘써 지속적으로 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그리하여 신자로 하여금 자신을 더 깨끗하고 강한 사람으로 무장하도록 도와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은 영적 능력으로 교회를 잘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 운동을 힘 있게 펼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께서 방언을 선물로 주신 참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