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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중요성
나는 이 주제를 하늘에 붉은 불꽃처럼 선명하게 쓰고 싶다. 도덕과 무관한 그러나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주님은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은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지혜다. 그리고 배우자를 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신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하기 위해 온 우주에 있는 모든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성경의 약속을 생각해 보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5~8
지혜에 대한 또 다른 말은 분별력이나 건강한 판단이다. 다시 한번, 당신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리석거나 현명하지 않은 결정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어리석은 구획에 주차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차 구역 안에 주차했음에도 그럴 수 있다. 당신은 죄를 범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놓친 것도 아니다. 당신은 그저 현명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기찻길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었다면, 이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수많은 좌절, 혼동,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 건져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의 아름다움은 지혜가 우리에게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다. 요구되는 모든 것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다.
지혜는 어떤 상황에서 영적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이다. 내가 어리고 독신인 20세 청년이라고 가정해 보자. 내 몸은 호르몬을 뽐어 내고 있고, 나는 좌로나 우로 치우칠 유혹을 받고 있다. 나는 생각과 욕망과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다. 내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노라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 것은 나에게 심각하게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명백히 바보 같은 일이다.
당신의 결혼과 관련하여 꿈을 통해, 또는 천사를 통하여, 내적 감흥이나 신적인 표지 같은 것을 당신에게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없다. 지혜가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 남성이나 그리스도인 여성이라면, 그리스도인 이성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이라는 주차구역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매와 결혼할 자유가 있으며 그녀를 자신의 사역에 동행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고전 9:5).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에게 중요한 것을 말하고자 한다. 결혼 상대자로서 아무 자매나 형제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오래오래 해로(偕老)하며 끝없는 비극을 피할 수 있는 형제나 자매를 찾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과 결혼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맞는 그리스도인과 결혼하는 데는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결정을 할 때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좋다. 주님의 지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다.
지혜는 이렇게 묻는다: “영적으로 나에게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어떤 결정이 하나님 나라를 가장 증진시킬까? 어떤 결정이 나를 포함한 관련된 사람들에게 가장 최선일까?”
도덕과 무관한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그의 자녀들을 인도하기도 하신다. 때로는 “아니야!” 이 사람은 네게 맞지 않아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런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은 없다. 그런 경우에는, 주님의 지혜를 통하여 우리는 해답을 알게 된다.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영적인 유익이 있는 많은 결정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을 고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지혜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당신의 선택에 따라 수년 동안 아주 큰 유익이 있거나 손해가 되는 결정도 있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독신 성인의 경우에, 이것은 동등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 결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하나님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러면 도덕과 무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법은 어떤 것인 것? 한 가지 길은 단순하게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야고보서 1:5~8을 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계시나 표지 또는 감흥 같은 것을 당신에게 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지혜는 분별력과 관련이 있다. 즉, 그것은 건전한 판단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지혜를 주신다(때로는 우리 자신의 실수를 통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하여).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가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잠언 13:20). 삶에 대한 경험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지혜다. 잠언은 솔로몬 왕의 지혜로 가득하다. 그는 그리스도 이전에 인간 역사에 들어온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우리가 거기로부터 빛을 찾아내라고 기록되었다.
내가 젊은 청년이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서 많은 실수를 했다. 내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많은 실수를 피했을 것이며 고생도 덜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지혜가 있다. 그 몸은 우리 앞서서 살아간 하나님의 종들을 포함한다. 그들의 기록과 증거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주님의 몸에는 또한 중요한 문제들에게 대해서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을 포함한다.
이 문제를 실제적으로 제시해보겠다. 내가 자동차를 한 대 구매하려고 한다 하자. 나는 현명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 나보다 자동차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다. 그것을 연구한 사람들이 그 주제에 대해 쓴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어떤 차를 사라고 나에게 계시해주실 수도 있지만, 그분은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 물론 나는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이 허락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필요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주실 것이라고 나는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잠언에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 같은 지혜를 구할 수도 있다(잠 4:5, 8:1). 현명한 사람은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다(잠언 9:9).
잠언에서 온 지혜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담자가 많은 곳에 안전이 있다”(잠언 11:14, 24:6). 인생을 위해 당신의 주머니에 간직할 금과 같은 말이다.
신약성서에서 지혜의 본보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처음으로 위기를 만났을 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영적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 일곱을 뽑으라.” 왜 그런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지를 해석하고 내적 감흥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는가?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위기를 해결하는 판단을 겸손히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고린도교회에서, 개인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형제를 세속의 법정으로 데려간 형제들이 있었다. 바울의 해결책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는가: “너희 가운데서 내적 감흥을 해석하고 외적인 표지를 풀어낼 사람들을 선발하라”? 아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분쟁을 해결할 지혜를 가진 사람이 너희 가운데 없느냐?”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장로에 대한 지침을 줄 때, 장로들은 지혜와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그들은 지혜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딤전 3:2, 딛 1:8, 2:2).
사도행전 15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 행한 아름다운 기록을 볼 수 있다. 오랜 토론 끝에, 사도들과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라.”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다.
누가가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바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처음부터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글을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라.” “누가복음”이라는 복음서를 써 보내는 것을 누가는 “좋은 줄 알았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모든 말에 감동을 주셨다.
지혜는 하나님을 떠나 당신 자신의 자연적인 이성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많고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올 뿐 아니라, 진정한 지혜는 인격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당신이 받은 신뢰할만한 지혜는 당신의 주님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그분이 지혜시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분별력을 가지라는 권면을 주목해 보라. 분별력은 지혜의 사촌이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1~22)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15)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고전 11:13)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에 대한 결정을 하려면… 주차 구역을 찾으려면….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증거와 양심의 증거, 그리고 성경의 증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도덕과 무관한 결정을 할 때는,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이에 관하여 추가로 덧붙일 말을 하겠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계획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복종되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경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획을 세울 때, 우리의 내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을 변경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편지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장려한다. 그러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복종되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격려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3~16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위에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주님의 주권적인 뜻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계획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태도와 모습을 가지게 된다: “주님, 저는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시는 때만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갖고 계시는 다른 계획들도 인정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면 우리의 계획에 들어오시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게 된다. 주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복종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계획을 수정하시도록 주님께 우리가 양도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실 때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거나 그것과 대항해서 싸우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은 마음 속에서부터 어떤 일이 되게 하려고 강압을 사용하거나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는가? 이런 경우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다. 그런 경우에는, 그 상황에서 당신의 손을 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낫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몰아가실 때는, 그 문제에 대하여 고요한 침착함이 있다. 어떤 흐름과 편안함이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강압”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바울이 보인 것을 알 수 있다(롬 15:32, 고전 4:19, 16:7).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잠시 동안 방문할 계획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말이야.” 바울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의지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거슬러 가시채를 발로 걷어차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큰 씨름 중 하나가 여기서 발견된다: 맡기는 것과 개인적인 관심사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삶을 배우는 것이 영적인 성숙의 표지다.
이야기를 정리하기
이 장에서 그 대략적인 목록을 제시한 결정들과 같은 도덕과 무관한 주제에 대해서는(예를 들어, 어느 학교에 가느냐, 누구와 결혼하느냐,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이냐, 자녀를 얼마나 많이 낳을 것이냐 등),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안내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도덕과 무관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면, 즉, 내적인 감흥이나 “사람의 예언”, 또는 꿈이나 환상 같은 외적인 표지 같은 것으로 인도하신다면, 그것이 지혜(건전한 판단)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과 일치할 때만 신뢰할 만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위의 원리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삶에서 많은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 하나님이 잭의 삶에 주신 두 개의 놀라운 기회를 잭은 놓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점에 대해서 한 가지 요점을 더 말하고 싶다. 비록 당신이 어리석은 결정을 하더라도… 비록 당신이 판단에서 실수를 했더라도… 비록 당신이 판단의 실수로 말미암아 천금 같은 기회를 놓쳐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너무 거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 8:28).
이것은 어리석은 실수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어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실수를 다듬어서 지혜를 만들어내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천재성이다. 주님은 우리의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방법을 아신다. 그래서 내가 아픔을 줄여보려고 노력하고 어리석은 결정이 가져온 손해를 축소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경험은(괴롭기는 해도) 매우 효과적인 교사다.
나는 한 가지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배운 것을 요약하고 이 장을 마치겠다. 동일한 결정을 했지만 결과는 극적으로 달랐던 두 부부를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첫 번째 부부를 단(Don)과 데브(Deb)라고 부르자. 그리고 다른 부부를 짐(Jom)과 젠(Jen)이라고 부르자.
단과 데브는 같은 시기에 대학을 마쳤다. 그들은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결혼을 했다. 단은 보수가 좋은 직장에 다녔다. 데브는 가사를 돌보기로 했다. 그 둘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자녀들을 사랑했다. 단과 데브는 대가족에서 자라나 자신들의 삶에서도 대가족을 이루는 꿈을 꾸며 살아왔다. 그래서 자신들의 장기적인 금융 상황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해 본 후에, 즉, 그들은 비용과 유익을 저울질 해 본 후에, 그들은 산아제한(피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그 부부는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다섯 개의 침실이 있는 큰 집을 소유했다. 많은 연구와 자기 성찰을 통해서 그들이 결정한 것은, 데브가 집에서 홈스쿨링(Homeschooling)으로 그 자녀들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 가족을 직접 보았다. 그 아이들은 모두 잘 양육되었다. 데브는 매우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고, 그녀의 홈스쿨링은 빼어났다. 그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많이 성숙했다. 그들은 지적으로도 더 발달했다. 게다가, 단과 데브는 부모로서도 매우 빼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양육에 대하서 훌륭한 본보기(role model)였고, 자녀양육과 관련된 독서에도 열성이었다. 그들은 인내심이 많았으며 작은 이들로 구성된 군대를 돌볼 수 있는 정서적 자원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짐과 젠의 상황을 보자. 그들이 결혼한 후에, 짐과 젠은 기독교 생활 세미나에 참석해서 한 주간 정도 함께 했다. 거기서, 그들이 배운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은 어떤 형태의 산아제한(피임)도 반대하신다고 배웠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홈스쿨링을 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이유는 모든 공립학교는 악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배웠다.
결과적으로, 짐과 젠은 즉시 자녀들을 낳았다. 짐은 억지로 직장생활을 계속하느라 고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직(移職)을 반복했다. 짐과 젠은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은 생활비와 자녀 양육을 위한 경비를 맞추느라 뼈빠지게 고생을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늘 빚에 허덕였다.
게다가, 젠은 아이들을 집에서 가르쳤는데, 그것은 그녀가 세미나에서 그렇게 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잘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자녀들은 공립학교에 다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덜 성숙하고 교육도 뒤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짐과 젠은 자녀를 다루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군대를 통솔할 충분한 인내심이나 정서적인 자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녀들이 둘이었을 때는 잘 지냈다. 그런데 그 가족이 그 수를 넘어서자, 삶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안에는 늘 싸움과 말다툼, 갈등, 그리고 스트레스가 있었다.
우리는 다른 이유로 동일한 결정을 한 두 가정을 살펴 보았다. 나는 당신에게 다음의 질문을 드리고 싶다: 어느 부부가 자신들의 결정을 내리는 일에 지혜를 사용했는가? 어느 부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